2015.08.22



    책은 바다다. 밀려들어오는 바다다. 지표에 누워 있는 나는 얼굴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억겁의 수면들을 안경처럼, 혹은 가면처럼 뒤집어쓴 채 세상을 본다. 나는 눈을 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눈 위에 있는 여러 겹의 막으로 세상이 쏟아져 들어온다. 감으면 안 보는 것이고, 충격적인 상이 맺히면 잠을 설치는 것이다. 책은 글자의 군대이지만 나는 이미지로 된 상처를 입는다. 독서라는 건 한동안 잠수하는 것. 빠져나올 수 없는 경험. 물속에서 물 위를 바라보려고 하는 태생적 한계. 이 상태가 오래 되면,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숨 쉴 수 없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자. 그래서 바보라는 소리도 듣는다. 다들 숨을 쉬고 살아가기에, 왜 숨을 쉬지 않으려고 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멋지게 대답할 수는 있지만 그 겉멋 속에는 내일의 독서가 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다. 나는 “왜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한 이를 여태 본 적이 없다. 그건 존재의 문제다. 왜 독서가 존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나도 모른다. 죽으려고 뛰어든, 아니, 죽으려고 누워 있던 밀물 전의 바다에서 나는 썰물이 준, 달이 빚어낸 신비로운 조화에 감사하며 한창을 호흡하다가도 곧 쏟아질 글자의 폭격을 기다린다. 죽으려고 사는 것일까. 말장난 같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나와 당신의 로망이다.


    일상은 편하다. 아는 지도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눈 감아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모르는 길을 가면 내비게이션을 보느라, 도로표지판을 보느라,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로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쫓긴다. 초보 운전자가 복잡한 서울 시내에 들어가면 갖게 되는 공포는 웃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사납게 몰아치는 행렬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막강하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포에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이 편하다. 나름 박아놓은 이 땅의 말뚝 안에서 우리는 울타리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며, 아는 만큼 산다. 하지만 책은 우릴 울타리 밖으로 내친다. 글자에 저항할 수 있는 철갑을 입은 이가 몇이나 되는가. 책의 세상은 우리를 두드린다.


    마음을 때리는 것. 어디 있는지 모를 그 나의 ‘마음’이 타격을 받을 때, 그 타격을 육체적 고통으로 느끼는 이들도 있다. 나는 자신에 대한 회상과 작품 활동을 연결시켜 오래도록 고민하다 병을 얻은 한 화가를 안다. 그 화가가 보내준 이메일, 그 창작의 고통은 꼭 같진 않아도 나 역시 느꼈었다. 왜 그것은 그리도 아픈 것일까. 명치를 주먹으로 세게 한 대 맞은 것과 그것은 또 왜 다른 아픔을 주는 것일까. 책은 세상을 긁는다. 부스럼은 더럽다. 어떤 책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입 속으로 날벌레들이 수도 없이 들어온 것 같은 역겨운 감정만 남기기도 한다. 딛고 선 땅을 뒤흔들어버리는 책도 있다. 살을 베는 것도 있다. 엄동보다도 시려 읽는 내내 몸을 떠는 책도 있다. 익숙한 이 세상을 엘리스의 나라로 만들어 붉은 여왕과 쉼 없는 꼬리잡기를 해야 하는 책도 있다. 다 상처를 남긴다. 이렇게 말하면 콧방귀 끼는 이가 있을까. 독서는 자학에 가깝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싫다. 성장은 남이 봐야 아는 것이고, 자기 자신은 한참 뒤에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나의 옛 모습이 화석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단히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실로 성장하기에, 저 말이 사실이기에 그래서 싫다. 아프지 않으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들 한다. 현자들이 그렇게 말했고, 가까이는 어른과 선생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프고, 얼마나 아프며, 그 상처는 어떤 크기와 모양으로 얼마나 남게 되는지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고 떠벌리는 이들은 가라. 고통을 아는 자는 곧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정신 속 가사(假死) 상태에 있는 이들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만 본다. 손을 내밀어봤자, 내밀 손도 없고 붙잡을 손도 없다. 이건 정신의 놀이가 아닌가. 신이, 절대자가, 최상자(最上者)가 있다면 이 세상의 본성은 가혹한 놀이판이라고 할, 이건 정신의 놀이가 아닌가. 피해가는 이들은 그 지옥을 모른다.


    “그대는 나를 마치 허약한 어린아이나 전쟁에 관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처럼 시험하지 마라. 나도 전투와 전사들을 죽이는 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나도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마른 소가죽 방패를 돌릴 줄 알며, 그것이 내가 보기에 방패를 든 전사로서 싸우는 법이다.” (호메로스, 천병희 譯, <일리아스>, 98쪽)


    헥토르가 아이아스에게 외치는 구절이다. 강건한 장수 한 명이 상대 장수에게 이렇게 외치면 향후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용기백배의 호언은 우리에게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모양을 그리며 흩어져 창백한 배경을 내보여야 하는 가을 하늘이 꼭 우리의 모습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문자 앞에서 혹은 조용히 읽거나 혹은 침묵하며. 어쩌면 그 모습은 공포와 경외와 숙고 속에 어떠한 계시를 기다리는 수도승의 모습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장황한 글은 모니터 옆의 티끌을 훔쳐내다 써내려간, 한낱 사물과의 동질감을 느꼈더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티끌이다. 티끌은 쓸어가는 자에게 시끄럽게 지껄이는 법이 없다. 펼쳐든 책 앞에서 나와 당신은 어디로 쓸려 가는가. 어디가 그렇게 아픈가. 우린 서로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독자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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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2 0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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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2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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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오랜만에 신간들을 보러 들어왔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문장 하나가 땅 위로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글 다듬는 나 같은 이들은 안다. 무릎이고 손바닥이고 팔꿈치고, 그런 아픔이 좋다.


  예정된 고통을 향해 넘어지는 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진다. 글 다듬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 글을 쓴다. 어른이 되어도 습관처럼 넘어져야 하는 이 삶의 ‘아이 같음’을 매번 받아들인다. 상처 아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의 서랍 안에는 대단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이제니 시인의 <달과 부엉이>를 읽다 이 문장 밑으로 도무지 읽지를 못했다. 억울하게도 저건 두 번째 문장이었다. 하지만 남은 문장들은 상관없었다. 내 마음대로 문장을 주무르다가 잡히는 아무 종이 한 장에 코를 들이댔다. ‘기억에서도 종이의 향이 날까?’ 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바라는 바를 질문으로 바꾼 것이었다. 기억에서도 종이의 향이 난다면 참 좋을 것이다. 종이의 향이 기억이니,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아련해지는 많은 것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무력했고, 부모님도 그러하셨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무력함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봤다.


  “나는 기억을 종이에 가깝게 한다.”


  이 문장은 하나의 운동이다. ‘글쓰기’라는 운동의 성질은 기억을 종이에 가깝게 하는 것. 마치 기체와도 같은 ‘날것’의 기억을 하나의 묘비로 만드는 것. 극단적 단명의 성질을 어떻게든 없애 화석화시키는 것. 내가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모아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넣어보던가, 3개월 남짓 되는 숙성의 시간을 ‘가을’이라는 단어 안에 가둬두는 것.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안한 유동을 잠재워보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 인생을 완벽하게 기릴 수 있는 묘비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한 기억을 온전히 남기진 못한다. 모르는 것은 쓰지 않고, 거짓은 적지 않는다는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다. 한 권을 읽으면 한 권이 아닌 여러 문장과 장면만이 인상에 남는 독서의 비효율은 글쓰기에도 있다.


  하지만 글 다듬고 책 읽는 이들에게 그 비효율은 체념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결핍이 낳는 가능성의 세계를 언제나 믿기 때문이다.


  기억은 종이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두 대상은 서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절대 붙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있다. 그건 기억에서부터 종이로 넘어지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과정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자신을 기꺼이 그 ‘사이’의 공간에 들여놓는 사람은 남들보다 사유의 근육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수많은 사유의 경지들 중에서 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곳은 단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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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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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6 1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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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문태준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14.11.02



  한 가지 두려움이 있다. 곧 삶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질 것이다. ‘대단히’라는 저 부사의 의미를 나는 잘 모르겠다. 사회생활의 초입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자박자박 걸으며 나름대로 사유한 이 세계의 모습이, 혹은 모양이 서서히 바뀌어갈 것이라는 예상에서 오는 두려움이 크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늘 그렇듯 적응된다. 도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항상 약삭빠르게 적응하곤 했으니. 그러나 문제는, 아니 두려움은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부터 뛰기 시작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이 계절 지나가는 것마저 지나치며 살지도 모른다는.


  고집하던 속도가 있었다. 이 공간을 찾아와 기꺼이 누추함을 견뎌주던 나의 몇 안 되는 당신들은 그 속도가 얼마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역설적인 물리. 타인이 보면 멈춰 있는 것만 같고 그리하여 매우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미미한 속도를 사랑했다. 글은 지렁이처럼 쓰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생각의 밭을 가꾸려면 맨손과 자갈, 그리고 꿈틀거림을 사랑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분히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변에 ‘거느린’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주변을 생각하게 되었다. (배운 바) 철학과 닿아보자면 그건 장자에 가까웠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철학적으로 여겨본 적이 (이따금 굳이 글감으로 따져볼 때는 제외하면) 거의 없다. 들판에 세워놓은 나를 지팡이 든 방랑자로 만드는 것에 나는 익숙했다. 목동이 되지 않았다. 나를 세상 위에 띄워놓고 바라보면 나는 더 넓고 큰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나에게 주어진 기회만큼의 적잖은 양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그런 기회를 줬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는 읽는 속도만큼 걷거나 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느림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한다.


  “마치 식물이 햇빛의 방향에 따라 순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듯이,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자란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가장 느릿느릿한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마음도 속도를 늦추는 완보를 하게 된다.” (문태준,『느림보 마음』, 57쪽)


  최근 방송작가 과정을 밟아가면서 나는 나를 새로운 분위기에 몰아넣는 나름의 강행군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익숙지 않은 단어와 과제 사이에, 프로들 사이에, 제작의 입장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중압감 사이에. ‘어른’을 이해해가는 길목에서 나는 벌써 그들이 무엇을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그리고 생(生)을 위해 자신의 모양을 얼마나 바꿔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의 보온병 속에서는 어른들의 이기와 무지, 혹은 무감각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의 특권이란 게 별 거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해로부터 반보 물러나서 다시 바라본다.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이기하지 않고, 무지하지 않으며, 또한 무감각하지 않은, 그리하여 일상을 쪼개 그 속에서 세상을 분별하고 성찰할 줄 아는 어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끝없는 도전이며, 그들의 대단한 책임감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은 세간이 몹시 부러워하는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이 아니다.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 안에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밭을 부단히 경작하는 어른의 모습이 내가 좇는 이상에 가깝다.


  “구태여 우리 모두가 새벽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나는 다만 ‘홀로 앉아 있음’의 시간으로 새벽을 선택한 것이다. 비껴 앉는다 함은 한 발짝 물러선다는 뜻이다. 물러선다 함은 뒤를 만들어 뒤를 본다는 뜻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핀다는 뜻이다. 뒤가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그이는 이마를 앞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로만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옹벽이 있다. 옹벽을 만나 옹벽을 종일 고집스레 이마로 밀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문태준, 위의 책, 143쪽)


  그것이야말로 삶의 비밀이지 않을까 싶다. 삶의 새벽을 만드는 것. 아마 작가의 삶을 꿈꾸는 것도 그런 까닭. (프로의 길을 걷는 선배들에 따르면 그 삶은 무척이나 치열하다지만) 누구나 사는 대낮의 삶에서 내 손으로 조용히 태양을 내려 노을을 만든 뒤, 그들에게 새벽을 지을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리라. 문태준 시인이 그 새벽을 나에게 선물한 것처럼. 물론 그 새벽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하루를 서랍 속에 넣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새벽의 모습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벽은 대낮과는 다른 의미로 한 인생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것은 대체로 멈춤과 느림과 여유, 아득한 고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조우와 관련이 있다. 새벽이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뜻이다.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불면이 아니라면 새벽은 (조금 선정적으로 말하자면) 늘 노곤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잠으로 달래는 시간이다. 우리가 진정한 새벽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그건 과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당신의 삶에 있어 당신 스스로 새벽을 만드는 일. ‘이것을 할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렇게 할 능력이 되는가?’를 물어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삶은 거대한 바다로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다로 흐르는 강물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목할 만한 선각(先覺)의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제시되어왔다. 다양한 말을 통한 일관된 답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큰 위안을 받는다. 잠시 멈추고, 생경한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 순간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물리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멈춤이다. 나는 책만큼 그 멈춤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 시인의 이 책은 멈춰 있는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걸음이 생기는지 보여준다. 위대한 역설이다.


  “사랑이나 삶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는 말을 이제야 나는 알 것도 같다. 너무 손을 대면, 손 타면 안 된다는 그 말의 귀함을 나는 알 듯도 하다. 애써 성공하려 하지 말고, 애써 실패를 초래하지도 말라는 가 말을 알 것도 같다. 애써 헤어지려 하지 말고 애써 만나려 하지 말라는 그 말을 알 것도 같다. 삶이나 사랑은 강과 같아서 다만 유유히 흐를 뿐이다. 초봄의 새순이 무성해져 녹음을 만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그것이 시간의 변화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나에게 처음으로 용납한다.” (문태준, 위의 책, 337쪽)


  멈춤의 역설로부터 나는 세상을 배운다. 빠른 것이 소위 ‘대세’이고 우리가 습득해야 하는 속도의 기술이라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그 흐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 뛰어드는 일은 쉽다. 어른들이 슬그머니 나의 귓가 뒤에 와서 들려주거나, 아니면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그 일들은 빠른 속도에 알맞게 자기 자신의 덜어내는 일과 다름없었다. 아픈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리하여 정말 아프도록 뼈저린 일이리라.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다져나가야 하는 밭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 자동차를 무서운 속도로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아 멈춘 다음, 근처 밭으로 가 생각의 농부가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할 나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적정 속도로 달려도 양옆으로 차들이 바람에 날린 종잇장처럼 지나가버리는 게 이곳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멈춰 세울 수 있는 비(非)물리적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생각이 끊어지는 곳이 있다고 했다. 문 시인은 이 책 어딘가에 그곳이 궁금하다는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나는 이 놀라운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커다란 모습을 갖춰간다고 믿는다. 빨리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크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 그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의 세계. 한 욕심이 있다면, 그건 이 세계를 놓치기 아깝다는 욕심이다. 씨앗 뿌리고 정성 들여 이 밭 가꾸면서 그렇게 생각해본다. 멈춰 선다. 변화하는 모든 시간의 기름칠로 내 무딘 손이 다시 일을 시작한다. 밭 일구기 좋은 가을이다.


  “여름 매미가 얼음에 대해 알지 못하듯이 나도 소견이 좁아 시절의 오고 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무딘 마음의 안쪽으로도 가을은 와서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 위의 책,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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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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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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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차의 속도가 지나쳐버린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쫓는다. 그 눈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눈으로 담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우리는 마음에 넣어두니까. 실시간으로 흩뿌려지는 의미들이 내가 사는 속도만큼, 혹은 그 의미의 절대 속도만큼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사소한 욕심이 아니다. 아이의 투정도 아니다. 잠시 뭔가에 홀린 사람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그물이 되어보려는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착각이 낳은 것들을 사랑한다. 지금부터 많은 것들이 진다. 이미 진 것들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무 같은 비석을 세우고, 위로의 낙엽을 태운다.

  가을.


  거리를 걸었다. 비 내린 아침의 날카로운 공기가 비릿하기도 했다. 그렇게 목을 넣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두툼히 넣어 걷고 있는데, 낙엽 한 무리가 내 앞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보도블록의 맨살이 드러났다. 건드리면 안 되는 가을의 치부를 본 것 같았다. 전술한 바, (굳이 말하건대) 이것은 진부한 착각이었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때때로 가을을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착각은 가을의 절대명령이기도 했다. ‘멈춰라. 너를 멈추어라.’ 이 짧은 메시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떠오르게 되는 당연한 궁금함이 있다. ‘왜 가을의 풍경은 우리의 걸음을 끊는 것일까?’ 가을을 대하는 마음이 스스로 베일을 벗는 일은 결코 없으니, 그러하기에 우리는 시를 쓰고, 노래를 듣고, 허구를 현실로 끌어오기도 하는 것이리라.

  가을.


  그것은 아주 긴 발음이다. 길게 풀려나가는 두루마리와도 같다. 하늘로 바람 따라 날아가 풀리며 결국 구름 없는 청아한 파랑이 되어버리는 풍경이다. ‘가을’이라는 단어를 손으로 만져보면 때론 전혀 촉감이 없는 듯도 하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이미 수확이 끝나 기울어진 노을처럼 누워 있는 논밭의 내음이 그곳으로부터 풍겨오는 것도 같다. 거두고 난 것을 먹는데도 마음이 허할 때가 있다. 잔인한 11월일수록 더하다. 가을 하늘 청아함을 바라봐도 우리의 눈으로는 도무지 우주를 바라볼 수가 없으나, 그럴수록 시선이 우리 안으로 아득하게 굴러 떨어진다. 그것을 건져 올리는 것도 일이다.

  가을.


  어김없이 찾아와도 해마다 더욱 진하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부터 ‘가을’이라는 걸 알았을까? 지금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얼마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도 같고, 그로부터 결국 가을을 전혀 모른다는 결론이 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가을이지 않은가. 아침마다 느끼는 공기의 냉랭함과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과 그렇게 헝클어져도 다시 빗고 싶지 않은 이 마음도 다 가을이지 않은가. 언젠가는 줄기차게 서리가 얼 것이고, 첫눈이 내릴 것이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 가득 채우고 있는 지금의 가을, 그 의미와 그 풍부함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불안하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사뭇 포근하기도 하다. 어느 유명 시인에게서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라는 ‘시적 발악’이 나오길 기대하며, 내 마음도 그렇다고 말해본다.

  가을.


  한 마디로 이것 역시 붙잡아둘 수 없어 비석으로 세워둬야 하는 시간. 마땅한 장례식도 없이 추색(秋色)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고, 하필 무더기로 썩어간다. 그러나 시신을 밟아대는 이 계절의 발걸음들은 하나도 잔인하지 않다. 그 소리 듣고 사는 것이 가을의 생리이다. 우리가 밟는 것 중에서 눈과 모래 같은 것들은 그저 자연의 섭리인 것으로만 느껴지기 일쑤인데, 낙엽은 전연 다르지 않은가. 시간이 흘깃 떨어뜨려 바닥을 나뒹구는 그 의미로, 세상에 수도 없이 피어난 시. 그리고 세상은 하나의 시집. 당신과 나는 독자. 그러나 오늘부터 11월. 붙잡고 싶지만 이미 반절이나 지나가고, 그나마도 대부분 붉게 떨어져버린.

  가을.


  장인(匠人)이 다듬어낸 정교한 그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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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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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제 속에 있는 말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 저라는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라도 저는 꼭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 어떤 극심한 곤경에 처해서도 글은 계속 썼습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휘몰아치면 다른 문제들은 마음에서 해소되기 마련입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論創作』, 297쪽)


  나에게 그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는 작가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나는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섭렵하겠다는 (그 나이 때에는 꽤나 순진했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오싱젠의『영혼의 산(靈山)』은 아쉽지만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건대, 지금 읽는다 해도, 혹은 황혼이 되어 읽는다 해도 ‘나를 찾는 여정’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정신적 고립의 파탄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부단하면서도 절박한 노력이었을 것인데, 나는 과연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았을까. 혹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의 낮은 기준으로는 저울질 할 수 없는 세상이 많다는 걸 항상 느낀다.


  사실 읽기에 실패한 작품은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눈에 밟혔다. 가오싱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혼의 산’이란 아름드리나무들의 울창한 원시림과 시끄럽게 축제를 벌이는 마을, 그리고 곰팡내 나는 여관방의 이미지가 전부다. 그런 까닭에 『창작에 대하여』는 그 높던 누군가에게 느끼던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 글모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술과 글’에 대한 위안을 받게 되었다.


  “저에게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혼잣말입니다.” (위의 책, 297쪽)


  반드시 그렇진 않겠지만 전방위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는 한 가지 장르에만 치중하는 작가보다 ‘예술’이라는 총체적인 현상을 더 폭넓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오싱젠은 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들 중 한 명이다. 『창작에 대하여』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에 대한 가오싱젠의 생각과 철학이 녹아들어 있는데, 이는 가오싱젠이 직접 모든 장르의 창작에 참여하여 얻게 된 결과물이지, 다른 이들의 철학과 견해, 혹은 체험을 빌려 쓴 말이 아니다. 가오싱젠의 직업은 ‘작가’라고 한정지을 수가 없다. 악기연주, 무대연출, 소설집필, 회화, 언론, 번역,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유년시절에 여러 장르를 접할 수 있었던 배경과 예술에 대한 본능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이라는 작은 예술의 그릇이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오싱젠의 국적은 현재 프랑스이다.


  ‘중국’은 하나의 정치적 환경이었다. (또한 다른 대부분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오싱젠이 그곳에서 떠났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환경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문학이 정치로부터 이탈하여 냉철하게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또 다른 환경으로 도망쳤다고 봐야 옳다. 이 책에는 가오싱젠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정치와 문학의 분리’가 여러 문장과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신의 창작 철학에 대해 설명한 1~2부는 물론이고, 대담 형식의 3부에서도 등장한다. 가오싱젠의 ‘문학 제 1법칙’이라고 (다소 딱딱하지만)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가오싱젠은 문학을 정치에서만 분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한 사조나 사상적 배경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의 미학은 해석미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학에 대해서도 명제를 연구하거나 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합니다. 형이상학적 사변이든 언어적 분석이든, 철학자들의 미학 연구는 범주와 개념, 어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미와 예술을 일종의 언설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작업은 예술창작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위의 책, 124쪽)


  지금 책상 왼편의 서재에는 지난 몇 년 간 미술을 공부하며 읽었던 숱한 미학책들이 꽂혀 있다. 그 공부를 끝내고 다시 몇 년 간 작품들을 감상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던진 질문은 “과연 카라바조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바로크’나 ‘르네상스’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특정사조 속에서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을까?”였다. 어떤 작가든 마찬가지다. 물론 19~20세기 들어 ‘예술철학’이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예술이 사상적으로 움직이려는 시도가 빈번해지긴 했었다. 아마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예술이 이처럼 격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미술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의 우리가 그 시대를 회고하거나 추정하면서 정의(혹은 고착화)하는 작업은, 어쩌면 학문적 차원에서만 효용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는 언제나 해석의 언어들 사이로 도망쳐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위의 책, 125쪽) 그리하여 가오싱젠은 예술이 한없이 주관화된 세계에서 ‘예술의 언어’를 통해 표출되는 오묘한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예술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가의 창조자로서의 본성은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집단의 의지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 어떤 공인된 진리를 따르지도 않는다. 권력이나 관념에서 비롯된 그 어떤 강제나 구속도, 예술가의 창조적 본성을 압살하지 못한다. 예술가 개인의 미학만이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며 윤리다.” (위의 책, 195쪽) 이 문장을 읽으면 대단한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오싱젠 자신도 자본주의 속의 예술을 (특히 문학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며 드러낸 것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의 세상에 조응하고 있다. 특히 예술이 향유되는 방식에서 가장 그러하다. 예술이 하나의 문화생활 속에서 소통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특성이 그 한계일 것이다. 이 소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시장(market)’이라는 말을 붙여야만 한다. 벤야민의 ‘복제’, 혹은 ‘아우라’라는 용어 역시 이 시대에는, 그리고 이 시대 이후 언제까지나 유의미하다.


  예술시장 속의 대중은 유행과 기호, 그리고 (가장 중요할 테지만) 가치를 따른다. 조금 씁쓸한 표현이지만 이건 다 ‘값’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볼 수 있는 이들만 알아서 찾아오라는 식의 고가 전시회는 예술시장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술상품의 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후 발견된 거장의 작품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는 누가 무엇을 주고 얻는가? 이런 전체적인 현상을 살펴보고 나면 ‘자유’와 ‘주관’과 ‘무한’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의 영역은 창작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엄청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지 말 것을 농담 삼아 조언했던 한 교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때 창작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었기에, 솔직히 이 책을 사들고 처음으로 했던 기대는 ‘나의 창작’에 대한 회고였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두려워지는 수많은 세상 중에 ‘창작’이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예술의 자유’라는 확고한 하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강화하는 작업은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원칙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마저도 일반의 마음으로는 해낼 수가 없다. 나는 학교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의 겉을, 문자를 훑고 지나갔지만 예술은 분명 어딘가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위안이 된다.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어디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예술가가 되는가. 흥행여부를 떠나 100년이 지나도 기억될 이는 누구인가. 독자인 우리는 이런 질문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언제나 예술에 기대어 우리의 긴 삶과 작은 세상에 얼마든지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예술이 그러한 수단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유일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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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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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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