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5


  누군가가 왜 이 블로그에 오래도록 글이 올라오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 나도 그녀가 묻기 전까지는 사실 그렇게 오래도록 내가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몇 주는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제 곧 네 달째가 되어가니 그 도중에 아마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세를 가다듬고 글을 쓰는 버릇이 생긴 지 십 수 년이 되는 지금까지 이런 긴 '공백'은 꽤 있었던 것 같다.


  방학 때보다 책을 덜 읽긴 했지만 문장을 탐하고 세계를 경외하며 나의 '작음'을 생각하는 일상은 여전하다. 그러나 확실히 '내가 뱉어내는 나'는 줄었다. 아니, 없었다고 해야 옳다. 혀 끝까지 나와 발음을 하려던 말이 다물어버린 입에 막혀 버리는 것처럼, 나는 A4용지 몇 장이 되는 글을 쓰고 삭제하는 일을 반복했다. 예전에는 자만과 싸워 이겨야 하는 힘든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능히 할 수 있게 됐다. 글이 긴 만큼, 그리고 특히 자신이 생각해도 서두가 매력적인 만큼 글을 지우는 건 힘들다. 그러나 죽여야 할 글은 죽여야 한다. 정 살려두고 싶다면 (그리고 글로 뱉어진 '수많은 나'들의 왕성한 활동력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오직 자신만이 기억하는 은밀한 곳에 넣어둬야 하고.


  게으름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한 번에 많은 글을 읽거나 쓰는 작업을 오래도록 하지 않고 있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정력적으로 읽고 쓰기를 반복하던 무렵, 갑자기 작가와 글이 하는 말을 조용히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는 직감이 드는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은 일절 적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날이 더워 정 책이 읽히지 않는 때는 비밀 블로그에 그 책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하는 일을 했다. 이렇게 읽는 양이 줄고, 쓰는 양이 없어지면 아주 짧은 문장 하나에서도 놀라운 생명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생명을 나의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는 것이다. 그런 유희를 하다 보면 그 짧은 문장이 여태 읽은 책 몇 권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모습이 보인다. 그 문장이 어느 사상, 다른 문장, 그리고 짧은 단어에 부딪히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책들을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한다.


  책을 적게 읽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내뱉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물론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핫아이템'은 (아무래도 난 이 '아이템'을 좀 더 발랄하게 소개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버리기'이다. 서재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 숨 막히는 물 속에서, 책 '버리기'는 그 공간을 물이 아닌 '내 방'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자기암시이다. 요컨대, 책을 조금 읽다가 영 아니겠으면 바로 덮어버리는 행위는 책과 세계의 압박으로부터 나를 다시 책 읽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세계와 역사를 경외의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있지만 그런 인격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를 숨막히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장서가들도 이런 동병상련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압박은 의무감을 만든다.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결국 어려워도 다시금 펴든다. 오해가 생기고, 책의 의미가 내 안에서 심각하게 변질되기도 한다. 이런 게 물론 독서생활에 있어 피치 못할 실패이긴 하나, 그런 실패는 아무래도 줄이는 것이 좋다. 그래서 책을 버리는 것이다.


  강신주가 지승호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전략)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나의 삶과 어떻게 같이 갈 거냐 하는 문제예요. 짜장면 먹기로 했으면 짜장면만 먹어야죠. 괜히 스테이크도 같이 먹지 말고. 관조적으로 보면 다 먹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안 그래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실천은 어느 때가 가장 효과적일지 결정해야 해요."(강신주, 지승호,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中)


  예컨대, (일전에 밝힌 적이 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 시인을 꿈꾸며, 혹은 시인 겸 소설가를 꿈꾸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걸작들을 독파하겠다고 벼렸었다. 가장 참담한 실패는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읽다가 1권에서 포기한 것이었다. 내용이 길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고등학생의 '세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는 "세계는 더 넓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지만 이때의 "넓다."라는 형용사는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말 그대로 막연한, 그리고 뼈저린 경험일 뿐이다. 이것은 항간의 말처럼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는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대학생 때부터 드는 것이 보통일 것인데, 이때부터는 위와 같은 실패는 알아서 줄이는 것이 좋다. 강신주가 한 위의 말 뒤에는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여러 여자 만나는 것보다는 "아, 지금 이 여자다." 싶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으레들 그렇게 말하고, 특히 연예인들이 자신의 연애담을 밝히며 여러 이성을 만나야 결혼 잘 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실 강신주의 말은 아주 지당하다. 직감적으로 자신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여기는 때는 존재한다. 가능성이 낮을 뿐이다. 그러나 독서에 있어서 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아, 지금 이 책이다."라는 감을 항상 유지하는 법이다. 말인즉, 지금 자신이 어떤 분야, 사상, 감성 혹은 작가를 원하는지 수시로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신주가 말한, "나의 삶과 어떻게 같이 갈 거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독서 방법이라는 것은,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버리고, "이거다." 싶으면 펼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 마음대로 읽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상하관계로 세상을 이해할 때에, 그것은 나의 패배에 대한 뼈저린 증거품처럼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기적인 세상을 이해한 뒤부터 그 책은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실존한다. "내가 왜 세상을 다 이해해야만 하는가?"라며 시니컬하게, 또 버릇없이 물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듯 저것도 존재한다는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따금 책을 사기 위해 여러 블로거들의 리뷰를 산책하러 다니곤 하는데, 그들이 펼치는 지식싸움, 아니면 자신의 서지학 수준을 뽐내기라도 하듯 줄줄이 늘여놓는 '모를 말'들,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 그들이 자신들만의 자와 연필로 그어놓은 잣대들을 보게 된다. (옛날의 나는 그들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읽다 보면 분명 책을 한 두 번 가볍게 읽은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도 아니라는 것은 책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게 된다.


  좋은 작가가 있듯, 좋은 독자가 있다. 좋은 작가가 갖춰야 하는 역량이 좋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요구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작가가 좋은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 역(逆)은, 즉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가 아니다."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이지 않아도 독자는 세계에 대한, 작가에 대한, 그리고 작품에 대한 마음가짐, 즉 태도의 변화로 수준 높은 인식과 건강한 인격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런 독자들은 타인의 추천, 화려한 인터넷 광고, 항간의 소문 따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건조된 거대한 배를 만들어 대양을 유랑할 수 있다. 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좌초시켜 어느 외딴 섬에서 다시 새로운 배를 건조할 수 있을 것이다.


  4개월 간 좌초됐던, 좌초됐는지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나의 배는 지금 이 글의 밑에 깔려 있고, 나는 새로운 배를 건조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은 이전을 추억하고 반성하는, 그리고 배를 만들 목재를 모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 그것들이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는지, 타인에게는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나의 서랍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다. 나의 잣대를 함부로 세상에 들이밀기 위해 휘두른 칼질로, 나의 서랍 벽 이곳저곳에 흠이 가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론 흠이 없는 때는 없다. 그것이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서랍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나'의 실존 그 자체이므로. 읽고 쓰고, 버리고 멈추는 나의 긴 호흡은 세계 위로 올라가려는 어린 나를 끌어내리는 힘겨운 작업이다. 아무 말 하지 않기에 더욱 힘들다. 침묵. 누군가가 나를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입다물게 하는 것. 피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중략)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中)


  이 글로 침묵은 깨졌다. 하고픈 말이 많을 때, 그때가 입 다물고 있는 시기라고 하더라도, 막상 깨진 침묵은 "너는 하고자 하는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라고 나를 깨우쳐 준다. 이건 매우 슬픈 순간이며, 동시에 매우 기쁜 순간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긴 침묵을 염두에 두며, 나는 침묵의 저편으로, 새로운 배의 밑으로 사라질 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타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이 순간이, 나에게는 선언이 된 것 같다. 누구든 그렇다. 스스로에게 외치는 때가 있다. 그 순간, 침묵은 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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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7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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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지금 내 옆에는 톨킨의 『실마릴리온』이라는 두꺼운 소장본이 한 권 있다. 이 책과 제목의 의미는 톨킨의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톨킨의 신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화’라 부르는 부류의 것도 아니다. 유수의 비평가들과 언론에서 극찬하는 바대로 톨킨은 하나의 민족이 수 세기에 걸쳐 만들기도 벅찰 만한 자신만의 신화를 만드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신화는 ‘인공(人工)신화’이다. 톨킨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의 모든 이야기는 순수한 인공물이다.


  우리 시대에 톨킨은 롤링, 루이스, 르귄 등과 함께 소위 ‘환상(판타지)’이라 불리는 문학 장르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정평이 나 있다. 서양에서는 이미 문학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사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근 10년 정도에 두 편의 영화 시리즈 『반지의 제왕』과 『호빗』으로 적잖은 팬이 형성되었다. 환상문학을 쫓는 우리나라의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그가 끼친 영향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환상의 역할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들과 환상문학 팬들의 대결은, 거칠게 묶자면 한 마디로 ‘리얼리즘 대 판타지’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논쟁하기 좋아하는 ‘문학의 효용’과 관련해서 이 대결은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더 넓게 보자면 이것은 인간의 사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치 있는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내가 칼비노를 근래 접하면서 한편으로 환상문학의 가능성을 나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톨킨과 롤링의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말하곤 하는 “심각할 필요 없잖아? 즐겨!”라는 (카르페디엠을 모방한) 시대적인 문구처럼 환상문학의 일면에는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환상의 비중 자체를 늘리는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든 간에 환상문학은 그 자체로의 순수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통주의’의 특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톨킨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반지의 제왕』의 서문에서 자신의 작품은 순수한 창작에서 기인한 것이라 선언했다. 당대 평론가들은 그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아 작품 속 전쟁 구도를 만들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톨킨은 “이야기가 경험의 토양을 사용하는 방식들은 매우 복잡하다(the ways in which a story-germ uses the soil of experience are extremely complex).”며 작품과 작가의 영향 사이에 단순한 구도를 연결하지 말 것을 넌지시 강조했다.


  나는 열렬한 톨킨의 팬이고, 환상문학의 창조성과 상상력을 지지하며, 나름의 방식대로 그러한 것을 추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강조하는 순수성 이외의 무언가를 더 찾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다. 실제 신화나 역사, 종교, 철학 등에 기반을 둬서 철저하게 과거와 지금의 우리들에게 호소력 있는 가치를 전달하는 세계적인 작품들을 읽을 때면 한편으로는 환상문학이 왜 그리도 초라하게 보이는지 주눅이 들곤 했었다. 환상문학이 상업화되기 용이한 까닭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고, 세계 문학의 대세 중 하나로도 서구에서는 일찍이 자리 잡았지만 솔직히 나는 ‘실제에 기반을 둔 거짓말’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아 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길게 에둘렀는데, 아마 지난 방학 때부터 내가 한동안 칼비노에게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갈등을 그가 해소시켜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니, 그런 확신을 갖고 있다. 근래 접한 그의 네 번째 작품 『우주만화(원제 : Le cosmicomiche)』는 팩트, 즉 과학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 현실에의 고민이 빚어낸 그야말로 ‘최고의 거짓말’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에 빠지다보면 어느새 “어떻게 이렇게 이어붙일 수 있지?”라는 감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작품은 칼비노의 정수이다.


  사실 우주과학과 생물학적 지식을 거의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작품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칼비노의 글쓰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의 중간마다 독자들을 화자에게 집중시키고 동시에 작품의 몰입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독자를 ‘소환’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서술전략이기도 한데, 이런 방식은 (독자마다 성향적인 차이는 있겠으나) 독자들을 어려운 이야기로부터 구원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어려운 지식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탓에 곧잘 지쳐버릴 독자들도 몇 쪽마다 한 번은 각성하게 된다. 이 각성은 지식들 사이에 칼비노가 숨겨놓은, 혹은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보편적인 가치들과 인간 심리의 묘사를 놓치지 않게끔 도와준다. 따라서 칼비노에게 익숙지 않은 독자들은 우선 상대적으로 덜 어려운 지식들이 있는 제 1부를 차근차근 읽어가는 것이 좋다. 마치 고산적응을 하는 것처럼.


  많은 비평가들과 문인들도 동의하는 것이지만 문학의 전략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시선이다. 우리가 흔히 ‘시점’이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여기서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1인칭’, ‘3인칭’ 이런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화자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화자를 내세우느냐에 따라 작품의 전체가 좌우된다. 그런 면에서 칼비노는 독특한 화자들을 사용하는 걸 좋아했고, 그것이 그의 특이한 문학세계를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서 ‘우리의 선조들’ 3부작 리뷰들에서도 재차 말했으나,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러나 “비범하다”고 하면 너무 평범하기 들릴 것도 같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특이한” 화자들을 통해 보편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다. 젊은 시절 ‘네오리얼리즘’이라 불린 사조에서 벗어나면서 그가 찾은 문학적 ‘생존전략’은 독특한 화자를 무기로 삼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 3부작보다 특이한 화자가 『우주만화』에 등장한다. 수많은 단편들이 문자 그대로 ‘우주적’으로 엮여 있는 와중에 단 한 존재만 그 모든 것들을 꿰뚫어가며 우리에게 우주를 보여준다. 그의 이름은 QFWFQ이다. 읽으려면 ‘크프우프크’로 해야 한다. 그나마 이 이름은 쉬운 편이다. ‘프(이)느크0’라는 한 부인의 이름을 컴퓨터로 타이핑하려면 ‘0’을 아래첨자로 써야 한다. 앞서 이 소설이 일부 과학적 지식을 요구한다고 했는데, 이름은 하나의 기호처럼 기능할 뿐, 그것 나름의 별다른 의미는 없는 듯하다. (혹시 알레고리가 있을까 나름 나열해서 분석해봤지만 허사였다.)


  이 존재들이 어떤 모습인지는 우리가 감히 상상해볼 수가 없다. 처음에는 공룡이라고 아예 제시가 되지만 제 2부로 넘어가면서부터 소설의 규모는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비약한다. 우주의 물질을 갖고 은하와 함께 이동하거나, 60억년이라는 시간을 무슨 젊은 시절 추억처럼 생각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거나, 지구와 달이 맞닿았던 시기에 두 표면을 장대 하나로 오고 가는 흥미로운 이야기, 까마득한 성운의 형성 등이 주를 이룬다. 제 3부로 가면 규모는 축소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더욱 근본적인 곳으로 깊게 들어간다. 안팎이 나뉜 세계, 죽음, 열망, 욕정 등 종교와 철학이 그동안 심오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인류에게 제시하려고 했던 의미들이 등장한다.


  칼비노는 이 모든 의미들을 과학과 문학의 연결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주는데, 일단 그 의미들이 무엇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방법 자체가 독자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미 여러 평론들이 나왔겠지만 그의 소설은 ‘열린 소설’이다. 단편 하나가 하나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여러 이야기가 굳이 단일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어떤 의미들을 나름대로 발견했노라고 주구장창 이야기를 해봐야 이 책을 읽은, 그리고 앞으로 읽을 독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갈래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접하면서 특정 해석의 고집을 떨쳐내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 배워 왔으나, 사실 대부분의 해석들이 일치하는 지점은 늘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읽으면 무릎을 치며 공감하는 평론은 늘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우주만화』도 그것들과 같은 소설에 속할 수 있을까? 칼비노가 직접 가치를 제시한 문장들을 차치하고도 독자들은 수많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투른 독자가 아닌 이상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커다란 의미를 뽑아내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때 문제가 발생한다. 소설은 가히 우주적인 규모로 진행이 된다. (단, 한 가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지금 발견된 과학적 사실과 당시 1960년대의 사실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 규모의 의미들이 세부적으로 제시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것을 하나로 묶을 좋은 방법을 갖고 있을까?


  이 소설이 소재로 삼은 것들을 하나의 축으로 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순환구도를 그릴 수 있다. 칼비노가 어디서부터 소설을 시작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도 잘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편의상 ‘현실직시’라는 축을 기준점으로 삼자면 왼쪽으로 이 순환구도는 회전하기 시작하는데, 그곳에서는 과학적 상상력과 지식을 만나게 된다. 칼비노가 ‘환상’이라는 장르에서 힘을 발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해석 가능한 지평을 거의 무한정 확장시킨다. 이 힘이 순환구도를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크게 회전시켜서 ‘근본적 질문’이라는 곳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칼비노가 얼마나 섬세한 철학자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 질문이 다시 우리를 ‘현실직시’의 축으로 돌려놓는다. 이렇게 이 소설은 계속 독자들을 뱅뱅 돌린다.


  칼비노가 단편 몇 개를 나란히 놓고 고민했을 것으로 보이는, 때문에 소재별로 약간 주제들이 중첩되는 것처럼도 보이는 것들을 중심으로 살펴봤을 때, 독자들은 대략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변화의 두려움, 가능성, 기호란 무엇인가, 내부 폭발, 진정한 보편적인 사랑, 글쓰기, 생물의 출현, 욕망, 내부와 외부의 차이, 열망, 눈(目), 죽음. 그 외에도 각 문단마다 마치 아포리아처럼 뽑아낼 수 있는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이 책은 곁에 끼고 두고두고 읽으면서 칼비노의 고민을 나의 것으로 연장시키기에도 ‘용이’하다. 내가 방금 ‘용이’라는 단어에 작은따옴표 두 개를 붙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위에서부터 이 글을 쭉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것이 ‘칼비노식 환상’이 나에게 준 위안이며, 커다란 확신이었음을 결코 부인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화자 크프우프크를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그는 시대를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공룡이기도 했고, 선장이기도 했고, 오늘날 인류의 문명 이전에 있었던 문명의 사람이기도 했으며, 지구의 내부에서 살던 존재이기도 했다. 어린 우주에서 원자를 갖고 놀기도 했다. 25편의 단편이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사려 깊은 화자 덕분이다.


  빅뱅에서부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크프우프크는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크프우프크는 모든 것을 탐구하고 성찰하고 내다보는 인간에 대한 칼비노의 희망, 그가 ‘우리의 선조들’에서 보여준 인간 유형의 ‘총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크프우프크는 독자에게 “여러분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라며 한계를 정해준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상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코 허황되지 않은 의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칼비노와 크프우프크가 알려준 환상문학의 가능성은 바로 그런 까닭에 나에게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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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저도 칼비노 읽어볼게요. 뭐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탕기 2013-03-24 00:23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는 <나무 위의 남작>이 지금까지는 가장 재미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은 한 번 읽어보세요. <우주만화>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쉽거든요.
일단 그렇게 칼비노에 맛 들리면(?) 다른 것들도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제 막 칼비노의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읽기 시작했습니다. ^^

2013-03-29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4-26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이 지났는데, 할 일이 많은가 봐요 :)
그 3부작은 늘 읽어볼까말까 했는데, 탕기님 집중력 끝내준다, 한번에 몰아치기.
저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어요!
 

2013.03.04

 

 

  학기가 시작되었다. 강의 하나 들으러 갔으나, 교수가 함흥차사였다. 첫날부터 휴강. 간만에 캠퍼스 소요나 하다 돌아왔다. 신입생들이 ‘애기’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나를 보며 “그 때가 좋은 거야.”라고 하고, 나는 앳된 새내기들을 보며 “정말 좋은 때야.”한다. 이른 방황을 후회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봄이다. 모든 것이 용서되는 봄이다.


  봄이 얼굴을 보인 때라지만 건물 밖 구석진 곳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다. 지난 겨우내 높다랗게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하얀 겨울이었다. 눈에 대한 예찬, 눈에 대한 사랑, 눈에 대한 짜증, 눈에 대한 분노 등이 있었다. 생동할 앞으로의 세상을 잠시 물리고, 지난 추위에 나는 무엇을 꿈꿨는지 돌아본다. 정리와 출발을 다짐하기에, 사실 신정은 너무 춥다. 꽃샘추위 물러간 지금이 제격이다.


  분에 넘치지 않게, 소박하게 꾸리는 것. 곁에는 조금씩 두고, 욕심 줄이는 것. 한 해 여러 목표들이 있지만 가지를 쳐내 내가 진정으로 닿고 싶은 도시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나도 이제 어른들의 현명함을 자연스레 따라할 무언가가 마치 ‘내공’처럼 쌓여가는 것 같다. 부족하다고 채근하면서도 폭식은 삼가는 것. 날마다 쌓여가는 것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덜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잡다하면 별로 건강하지도 못하다. 무거우면 오래 걷지도 못한다. 알았으니, 이제 다짐한데로 한 번 가보는 거다.


  그래도 막연한 욕심이, 마치 아직 녹지 않은 눈처럼 뭉텅이로 남아 있다. 책이다. 많이 읽고 싶은 욕심은 많이 읽지 못했다고 느끼는 결핍감 때문에 쉽사리 떨쳐내기가 어렵다. 생각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확연하게 체감하는 까닭도 있다. 넓어진 세계에서는 예전에 완독하지 못했던 책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얻곤 하지 않은가. 빈곤했던 나의 나라는 떠들썩한 백성들로 가득한 여러 도시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 도시의 이름만 들어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 알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미시(微示)의 세계는 직접 발을 담가봐야 또 알 일이다. 큰 눈과 작은 눈을 동시에 갖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것도 욕심의 또 다른 까닭이겠다.


  약간 고봉(高峰)으로, 생각보다는 조금 더 푸짐하게 올해 2013년의 책 스물여덟 권을 골라봤다. (고르고 보니, 우연히 내 나이와 같다.) 학기 중에는 한 달에 픽션과 논픽션을 각각 한 권씩, 방학 중에는 매월 각각 두 권씩 꾸준히 읽으면 이 욕심도 하나의 도시가 되리라 생각해본다. 따지고 보면 2주에 한 권인데, 그게 실상 바빠지기 시작하면 고민이 많아 잘 잡히지 않기도 하고, 쉬운 책만 골라 읽는 것도, 대충 읽는 것도 아니니, 넉넉잡아 십 보 정도 양보한다면 많아야 스무 권에서 스물다섯 권 정도 읽지 않겠나 싶지만. 보다 넓은 지평을 기대한다.

 

 

픽션 14선

1.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2.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3. 친기즈 아이뜨마또프, 『백년보다 긴 하루』
4. 보후밀 흐라발, 『영국왕을 모셨지』
5. 임레 케르테스, 『운명』
6.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7.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8. 카렐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
9. 알베르 카뮈, 『페스트』
10. 오르한 파묵, 『하얀 성』
11.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2. 모옌, 『열세 걸음』
13. 조지 오웰, 『1984』
14.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논픽션 14선
1. 로렌 아이슬리, 『광대한 여행』
2.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행복의 경제학』
3. 알리스터 맥그래스, 『과학과 종교 과연 무엇이 다른가?』
4.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
5. 주디스 리치 해리스, 『개성의 탄생』
6.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7.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8. 백영경 外,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9. 에릭 홉스봄, 『폭력의 시대』
10. 월터 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11. 레오 카츠, 『법은 왜 부조리한가』
12. 토마스 프랭크,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13.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14. 제프리. K. 올릭, 『기억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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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6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1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3-2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하는 의미로 추천!

탕기 2013-03-24 00:21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아이리님 ^^
 
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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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우리에게는 한 가지 슬픔이 있다. 기계에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는, 즉 불가항력의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라는 태생적 슬픔이다. 그러나 이 슬픔은 하루도 빠짐없이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배반이다. 우리가 슬픔의 편에 서 있을 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낄 때, 슬픔과 행복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너는 위선자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어 라다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라다크 사람들은 우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들도 맥도날드를 먹고, 나이키를 입는다. 우리 중 일부가 “그래봤자 소용없어요!”라고 외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 중 나이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옛 삶을, 당신들은 그토록 그리워하는 거지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얻어진 셈인데, 중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도 그거다. 우리는 북적거리는 커피숍에 앉아 소로의 『월든』을 읽는 현대인이다. 커피숍에 앉아있기만 하면 『월든』쪽으로, 그리하여 중간으로 걸어가 서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건 반대편에 있다. 한 쪽 사이드에서만 공을 돌리다보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축구팬들은 알 것이다. 이때, 시야가 넓은 선수[현명한 저자]는 반대편에 있는 동료[독자]에게 정확한 롱패스[저서]를 보내준다. 또 다른 수[진리]가 생기고, 상대편[우리의 폐습]은 다시 수비전형을 갖춰야 하는 번거로움에 빠진다. 골[삶의 목표]을 넣으려면 되도록 경기장을 크게[여러 저자들의 비판을 수렴해] 써야 한다.


  읽는 이에게는 미안할 정도로 식상한 비유였나?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긴장하고, 시야가 좁아지며,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결국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 때 즈음 되면 골을 넣는 것, 이기는 것, 페어플레이 하는 것, 어느 것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아주 고통스럽다는 것만 느낀다. 누구든 이런 삶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반대편을 바라보는 책은, 그래서 읽어야 한다.


  반대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추천한다. 앞만 보고 달리거나, 개인기술을 남발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이다.

 

 

 

 

*    *    *

 

 

 

  시끄러운 세계의 반대편에는 침묵의 세계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다 건너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나와 우리, 그리고 세계의 깊은 곳까지 침전하려는 노력과 탁월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막스는 문학과 에세이, 인문학적 진단, 철학, 종교(그리스도교), 신화, 역사의 경계를 ‘침묵’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붕괴시켜버린다. 막스에게 유일한 경계가 있다면, 그건 침묵의 세계와 시끄러운 세계(‘잡음어’와 ‘라디오’, ‘소음’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세계)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이다. 우리는 그가 말한 침묵의 세계에서 이미 한참을 벗어난 우리 조상들의 후손이다. “좁힐 수 없다.”는 건 우리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막스의 글에 적응하는 어려운 과정을 잘 치렀다면 독자들은 한없이 슬퍼지는 독서의 연속을 견뎌야만 한다. 침묵의 세계는 막스의 뛰어난 비유와 문학적 묘사로도 도무지 손에 잡힐 듯 확실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우리를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허상을 보는 것일까? 침묵의 세계의 실존을 추적하겠다고 책의 문두에서 막스는 선언했지만 도대체 어떤 모습이 우리 앞에 그려지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의 우리와 비교되면서 부재, 결핍, 상실 등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것이 실존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쓰레기통에 아무렇지 않게 버렸고, 혹은 강탈당했으며, 그리하여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설명이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갖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걸. 때문에 막스가 우리를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방법 자체가 실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나는 과학을 존중하고, 과학적 이론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실존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굳이 실증적 자료들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는 걸, ‘비과학의 영역’에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한 권의 경전과도 감히 비교할 수 있다.


  종교 경전들의 특징은 자세한 설명을 피한다는 것에 있다. 막스가 ‘고대의 언어’라고 해서 특별히 고찰한 부분에서도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말 자체가 자세하지 않아 그 자체로 말 이면의 세계와 아주 면밀하게 닿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에게 그 말들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가리킴, 즉 지칭의 명백한 능력은 사물 자체를 말 안의 개념 속에 종속시켜버린다. 이러한 말에는 무한의 가능성도, 충분한 공간도, 포괄성도 없다. 현대인들이 에둘러 말하는 걸, 뭉뚱그려 묘사하는 걸 옛날의 유행이나 고리타분한 것 따위로 대부분 치부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서 무한의 가능성, 충분한 공간, 그리고 포괄성이 추방당했다는 것을 정확히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 사실 막스도 이 단어를 쓰는데 있어 상황마다 차이가 있다는 걸 굳이 주지시킨 적은 없는데 - ‘말’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부정적 이미지를 갖진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막스에게 하나의 경계가 있다고 했었다. 시끄러운 세계와 침묵의 세계. 그렇다면 말 역시 각각의 세계에서 존재할 것이다. 막스가 사용하는 ‘말’이라는 단어는 어떤 때에는 시끄러움 속에서 나와 기계적이며 수평적인, 그래서 틀에 박힌 “고아의 말(waisensprache)”인 경우가 있고, 반대의 경우에 ‘말’은 아기, 노인, 시인, 농부 등이 사용하는 “침묵으로부터 출발한 말”, 그래서 야성적인 침묵을 인간 안의 침묵으로 ‘능동적’으로 바꿔주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전자, 즉 ‘고아의 말’이다. 그러나 시원(始原)에는 말이 침묵으로부터 나왔다. 막스는 그것을 수직적 관계로 설명한다. 침묵에서 거침없이 뛰어 올랐으나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 태양의 홍염(prominence)과도 같다. 거대한 백열가스인 홍염은 태양의 표면에서 솟아올랐으나 다시 표면으로 둥글게 내려오는 고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지구가 여러 개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크다. 옛 침묵과 말의 관계는 이러했을 것이다. 크고, 넓었을 것이다. 막스에 따르면 침묵에서 떠오른 말은 삶과 부활을, 다시 침묵으로 떨어지는 말은 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천체의 운행과 진리 사이에는 어떤 겉보기의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성스러움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도, 동시에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를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도 막스가 들려주는 침묵의 모호한 정체는 신적인 것과 닮아 있다. 실제로 막스는 침묵이 말로 변환되는 과정에는 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그렇게 변환된 말 중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소음에서 태어난 말”과는 다른 말의 예로 ‘복음’을 든다. 종교에 적(籍)을 뒀으나 무신론자인 나에게 침묵의 세계를 ‘신’과 몇 차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막스의 시도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했을까? (나는 “종교적 해석?”이라고 이면지에 수차례 적어놨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과학적 반박을 포기한 상태였다. 막스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현대문명, “잡음어”와 “라디오”로 묘사된 우리의 삶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옛 사람들은 말을 통해 막스가 ‘짐승의 단계’라 했던 형상과 상징에서 벗어나 그것의 지배자가 된다. 여기서 나는 괴테의 인용문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음의 저 낮은 곳까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구절을 여기에 옮겨본다.


  “인간의 외면(인간의 형상)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것은 실은 그 내부를 위해서 비상하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124쪽)


  물질에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은 말과 마주 선 채 형상으로부터 독립하여 풍요한 침묵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것이 막스의 해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얼굴에는 자연의 침묵이 새겨져 있다. 흔히 산사람은 산처럼 생겼고, 어부는 바다처럼 생겼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그렇다. “풍경은 인간의 얼굴 속에 자기 자신의 유적을 가지고 있고(121쪽)”라는 막스의 기막힌 문장은 인간의 얼굴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옛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얼굴을 고치면서 외면의 성장을 도모하기도 하고,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자리 잡아 볼품없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차라리 응고되어 있는 동물들의 고독한 침묵보다도 못하다. 이것의 모든 원인은 잡음어에 있다. 막스가 ‘잡음어’에 어떤 묘사들을 붙여놨는지 열거해보면 그 정체가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세포분열, 양적증가, 말의 망령들이 주고받는 말, 사이비 말, 죽은 말, 허술한, 구멍이 뚫린, 악마적인, 불확실한, 무책임한, 말의 파괴, 동물적, 배설, 비현실적, 위험한, 무절제의.


  그 위에 터를 잡은 라디오의 세계는 - 이걸 인터넷, TV 등 타매체의 총제적인 상징으로 봐도 무관하다 -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변조시키고, 인간의 현존성을 완전히 강탈해버리는 중이다. 세상은 이제 순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짧은 템포를 지니게 되었다. 잡음어가 수평적인 말을 통해 개별성을 죽이고 모두를 똑같이 만들어버렸다. 소리 큰 이가 이기는 세계가 되었다. 평등의 군중과 목소리 큰 독재가가 교묘한 짝을 이뤘다. 제 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일어났다.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정치는 쇠퇴하고, 사건은 망각된다. 창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정신병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윽고 절망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저절로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이비 연속성 속에서 인간은 모든 본질적인 것이 어떤 특별한 한정된 행위에 대해서, 어떤 창조적인 행위에 의해서 생긴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유 의지적인 요소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것이 바로 라디오의 구제불능적인 점이다.(239쪽)


  이런 세계는 데카르트의 선언으로부터도 이탈되었다. 막스는 “나는 생각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침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수도원의 밀실에만 존재한다는 비유로 마지막 비판의 일격을 가한다.


  나는 얼마 전 한 글에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임을 그리다 돌이 될 정도의 지극정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향수를 잊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도 일종의 순환이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막스에게서 어떤 희망을, 그 수많은 비판 속에서 어떠한 긍정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대목은 짧으나 강렬하다. 침묵이 죽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얻거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확신이다. 소음이 제 뿔에 지쳐 터져버릴 것이라는 예상. 그래서 막스는 그 빈 공간에 침묵이 깃들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멸망 후 찾아오는 ‘인간 없는 세상’의 원초적 침묵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책 커버에는 유명한 릴케가 막스를 소개한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다. “피카르트는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의 고뇌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사변이 단순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개똥철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의 깊이를 체험해볼 것을 권한다. 항간의 대중들이 자기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 물론 그들은 그들의 생리대로 부인하겠지만 - 궁극의 가치와 의미들은 막스와 같은 ‘고뇌하고 쓰는 자’들이 보존한다. 우리는 우주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대중문화 상에서만 통한다. 우리가 찾는 우주는 그곳에 없다.

 

 

 

p.s 이번 방학의 마지막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작년 12월 말이었다. 오래토록 나를 괴롭혔던 책이니만큼 훗날 여러 번 읽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나 세계를 이해했는가를 가늠할 척도로 나는 이 책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 없는 이들은 읽지 말고, 주저하는 이들은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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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방학의 마지막 주이다. 조용히 빈둥거린 시간 위로 열일곱 권의 선명한 자국이 보인다. 조금 더 부지런했어야 했다. 여성작가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것, 돌이켜보며 많이 반성하고 있다. 내심 서른 권은 읽지 않겠나 싶었는데, 절반만 겨우 넘겼다. 양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평소 주장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여분과 여력이 느껴진 탓일 것이다.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새삼 질투와 경외심 섞인 감탄을 보낸다.

 

 


1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성향은 ‘근본적’인 것으로 굳어가는 듯하다. 지금의 나, 혹은 우리의 삶을 비판할 수 있는 거리까지 책이 나를 밀어낸다. 그것은 강제적인 힘이다. 그래서 밀려나는 나는 아파할 수밖에,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슬퍼할 수밖에 없다.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 적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거리까지 밀려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덜 밀려난 것 같은 허무에 빠지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런 책들을 읽고 소위 ‘힐링’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더 아파졌다고 숨기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한 저항력도 없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제시하여 그곳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저 궁극의 노스탤지어들이 정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까? 치유가 ‘일시적인 완화’나 ‘순간적인 무통증’을 일컫는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걸 ‘완쾌’를 뜻하는 말로 사용하진 않는가?


  여기, 나를 더 아프게 한 세 권의 책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읽었으나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한 작품인데)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셋 모두 상실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나와 같은 부류의 독자들이라면 이 책들 앞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도 견디기 힘들다. 그것은 중력의 원리에 대해 말해준다. 우리가 있는 힘껏 지상으로부터 뛰어 올랐을 때, 그 때가 나는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무렵부터 우리는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도 ‘상실된 세계’가 온전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오랜 시간을 재구성해보면 지금의 우리가 확실히 떨어지는 중이라는 걸,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걸 입증할 진리들이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발견되었다.


  문제는 그걸 거부한다는 것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추진력을 덧대어주는 것들은 많다. 떨어지는 우리들에게 다시 ‘상승감’을 느끼게 해줘서 실존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 같은 여러 도구적 대상들은 많다. 그걸 쓸 것인지, 안 쓸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지만 어쩌면 몫은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의무인 것도 같다. 우리는 어디까지 날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 세 권의 책 모두 이러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2

 

  칼비노를 알게 된 것으로 나는 “정신적 고향을 찾았다.”고 선언해도 될까? 아직 구비하지 못한 그의 책들이 있으니, 예전도 그렇게 말했었지만 아직은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를 읽으면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건설해가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여러 면에서 그를 내 안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작품도, 글도, 인물도.


  앞으로 그의 책들을 더 찾아 읽을 것이지만 우선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완독했다는 나름의 자부심으로 그를 정의해보자면, 칼비노는 나에게 “위대한 스토리텔러”가 갖추고 있는 여러 장점들에 대해 알려준 작가이다.


  그는 거의 뜸들이지 않고 독자들을 자신의 환상적인 세계에 끌고 들어간다. 그런 면에서 그의 ‘판타지’에는 터프한 면이 있다. 그러나 터프한 사람들에게 으레 가질 수 있는 편견과는 달리 칼비노는 매우 섬세하다. 유년 시절 자연과 함께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묘사력은 그가 풍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 물론 인물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그려낼 때에도 그의 위력은 여전히 실감할 수 있다. 때문에 나에게 칼비노는 일종의 ‘양성적인 작가’로 기억된다. 아니면 창과 방패를 고루 잘 쓰는 소위 ‘밸런스 잡힌’ 라틴계 글래디에이터의 느낌이랄까?

 

 

 


 

 

 

 

 

 

 

 

 

 

 

 

 

 

  재밌기만 했으면 그는 세계적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에서, 그러니까 그가 20대 후반부터 30대를 보내며 연이어 쓴 세 개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다. 칼비노는 줄곧 ‘인간성’에 질문을 던진다. 선악(善惡), 자연과의 조화, 사랑, 실존, 생의 열정 등.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모든 작가들이 이런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고 그들 나름대로 펜을 들었겠지만 칼비노는 무게감 있는 내용을 품었으면서도 독자들을 끝내 자신의 환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고, 유독 특이한 작가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일상으로 돌아와도 질문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저력을 한 번 더 느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주 거짓말 같은 이야기.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그의 세계가 우리를 현실과 더 먼 곳까지 데려다주면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 것이다.


  몇 년 안에 나는 그의 전작을 다 섭렵할 생각이다. 다시 한 번 읽으면서는 나름 그를 분석도 해볼 것이고, 그의 세계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입체적으로 해부해보면서 내가 그의 전략을 나의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도 고민해볼 것이다. 이 모든 작업에 한참 앞서, 나는 설렌다. 그만큼 그를 나의 서재 맨 앞에 모셔둘 생각이다.

 

 


3

 

  최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고 있다. ‘종교경전 읽기’라는 나만의 장기 프로젝트이다. 바가바드기타, 꾸란, 성경 등을 마련해 읽을 것인데, 대략 10년을 잡고 있다. 30대가 저물어가는 즈음에는 하나의 큰 이해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진화론과 SETI를 지지하는 무신론자인 나에게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남다르다. 신앙인들과 과학지상주의자들은 나의 목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몇 주 지나지도 않았는데 생채기와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예컨대 우파니샤드는 첫 대목부터 나에게 충격을 줬다.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한다는 아뜨만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면지에 “과학적으로 풀어 쓰자면 ‘모든 곳에서의 동시적 존재성’이 될 것인데, 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장자를 배운 기억이 있어 무문무독(無門無毒)과, 그러니까 무경계의 경지와 동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내가 실로 아뜨만과 무문무독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했다.)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집요한 탐구 속에 들어있는 고통의 입자들에게만 화학적 결합을 허용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나 행동으로는 저들의 경지를 보다 쉽게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욕심도 사실 있다. 진리는 책에 없다는 ‘불교식 진리’가 맞는 것도 같은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경전이라는 것이 대중들을 위해 일찍이 편찬된 것이기도 할 테고.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자에 새겨진 진리가 이미 달아난 후라고들 하지 않는가. 장기 프로젝트의 끝에 가면 “이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독서의 본질이 백이면 백 다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  본다. 주머니에 넣은 것보다 못 넣은 것이 더 많은 행위가 바로 독서이다. 그래서 더 많이 넣어보려고 욕심도 부려보고, 실패를 통해 한계를 알고, 경계를 확장시키고, 그렇게 세계의 전체와, 혹은 근원과 계속 닿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이 독서이다.

 

 


4

 

  이번 학기의 독서목록도 나름 정해봤다. 늘 그렇듯 이런 목록도 ‘지켜지지 못할 계획’ 정도가 되겠지만 시작은 기세 좋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사실 벌써 조금씩 읽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 작가로는 처음 만난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다시 읽게 된 보흐밀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그리고 에세이인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 이렇게 다섯 작품을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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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2-2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된 세계를 재구성'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도 인간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열입곱 발자국, 아주 선명히 찍으신 것 같은데요. 권수가 중요한게 아니니까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우선 담아갑니다.

탕기 2013-02-26 12:05   좋아요 0 | URL
hnine님께서 읽고 계신다는 책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바우만의 책은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고 쓰신 글, 나중에 읽으러 가겠습니다 :)

2013-02-2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