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2013.02.21

 

 

  자유의지[명사] :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 라틴어로는 Liberum Arbitrium Voluntatis. 영어로는 Free Will.


  나는 사람들이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원제 : Free will)』에 대해서 어떤 다양한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저 상상만 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리스를 아예 ‘허풍쟁이’라고 예단하는 바람에 이 책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분노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화를 낼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은 대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혹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믿음’이 탐구하려는 자세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러니까 해리스가 ‘자유의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문제에 대해 평소 깊은 생각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독서취미나 글쓰기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그의 주장은 별로 생소하거나 놀라운 것이 아니다. 고대철학에서도 ‘나’에 대한 전복적 사고는 있었다. 예컨대 장자(莊子)가 있다. 다만 그런 철학자들이 오늘날 ‘전복적 사고’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그들의 대부분이 광인(狂人)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뛰어난 성찰과 획기적인 사고로 기존의 믿음을, 대륙처럼 큰 거인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위험했다.


  나는 적게나마 거인을 무너뜨리려는 시도, 혹은 그런 시도들로부터 여전히 저항하며 자신들을 지켜나가는 거인들의 시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활동하게 되는지를 읽어왔다. 물론 그것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에 직접 뛰어든 적이 없다는 한계는 앞서 고백해야겠다. 나는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이라든지, 리처드 도킨스가 근본주의적 종교세계와 전쟁을 선포한 역작들, 지적설계론들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반론, 니체, 진화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존 브록만의 등을 보면서 ‘확신’이라는 기둥이 무너져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계속 탐구하고 질문하다 보면 인문학은 어느 순간 과학적 진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종교처럼 과학과 아주 다른 대륙의 진리들에 접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인문학을 붙잡고 있으면 그 진실들을 피해갈 수가 없다. 과학은 증거를 통해 가설을 세우고, 입증이 되면 반박의 논거가 나오기 전까지 그것을 잠정적인 사실[fact]로 공인하는 공적 제도이다. 인문학이 과학적 진실들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아닌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논리는 현대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때론 ‘말놀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중한 현대인들은 유전자학, 진화론, 우주과학, 뇌과학, 지질학, 고고학 등 인류가 발견해온 증거들의 역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런 증거들에 기초한 논리가 아니라면,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조차 없다.


  그런 면에서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환상이다.”라는 주장은 확신에 대한 의심을 예전보다는, 적어도 근대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다지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항간에 이 책은 엄청난 문제작이라고 소개되는데, 아마 그 까닭은 현대인의 양자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매사를, 심지어는 모든 것, 아니 신까지 의심할 수 있으면서도 이것만큼은 의심하기 힘들고, 혹은 하기 싫을 때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 ‘이것’이란 바로 ‘나’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히 말해 장자는 사유놀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물증이 없다. 현학적이고, 해학적이고, 그래서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철학들은 어렵지만 그만큼 수용하는데도 별 무리가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은 지식 소비시장의 세계가 아닌가! 그런데 해리스는 막강한 증거를, 실제 실험들의 데이터들을 들고 우리에게 선언한다.


  “자유의지는 없다.”


  책에 소개된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은 생각에 앞서,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의지’라 부르기 좋아하는 어떤 과정에 앞서 뇌피질의 뉴런 256개가 활동하는데, 그것을 분석하면 우리가 내리는 의사결정의 무려 80% 정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도출해냈다. 쉽게 말해 ‘나’보다 뇌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를 해리스는 “나의 정신생활은 단지 우주에 의해 내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28쪽)”라고 표현했다. 그럼 자발적 행동과 비자발적 행동의 차이는 어떨까? 해리스는 이것을 그저 “뇌의 수준” 정도라고 여긴다.


  해리스는 우리의 이해를 (종교적 의미가 배제된) 결정론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과는 다르다. 운명론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문제시되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되어 있어서 Pricrime 시스템에 따라 적색경고볼에 내 이름이 새겨진다고 하자.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톰 크루즈(극중 앤더튼)과는 달리 그저 내 방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만을 기다린다고 하자.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해리스의 말처럼 운명론을 믿고 그저 관망하는 태도는 단순한 결과 딱 하나만 만들어낼 뿐이다. 내가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영화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즉 운명은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해리스에 따르면 이 선택에 대해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생성’하는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리는 다음 번 선택은 선행 원인이라는 암흑 속에서 출현하기 마련인데, 그 원인들은 당신 경험의 의식적 목격자로서 당신 스스로 생성한 것이 아니다.(45쪽) [중략] 당신은 이번에 왜 상황이 달라졌는지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후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48쪽)


  해리스는 우리에게 계속 “우리는 왜 그런 선택을 했지?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지?” 등을 심리적 원인을 찾는 방식대로 추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자욱한 안개”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남는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통제를 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도 이 우려에 대해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그는 바꿔 생각할 줄 알았다. 실제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의 실종은 “희망과 두려움, 노이로제가 덜 사사롭고 덜 부담스러워(58쪽)”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여기서 훌륭하며 재치 넘치는, 생화학적인 비유를 하나든다.


  “본인의 인격에 필요한 건 다름 아닌 한 끼 식사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59쪽).”


  자유의지는 죄(원죄:sin)와 도덕관념과 당연히 연관된다. 근대철학이 그것을 부추겼다. 따라서 해리스처럼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우리 사회의 윤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해리스는 윤리제도를 존중하는 뉘앙스 속에서도 일단 그것을 의심해본다. 선악과 진위 같은 것은 인간의 복잡한 패턴 속에서 “일관적으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의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63~64쪽에 다섯 개의 사례를 수록했다. 아마 이 책을 읽을 용의가 있는 많은 독자들이 이 대목에서 상당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실제 윤리제도는 다섯 가지의 사례에 동일한 형량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분노부터 하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쨌든 피해자는 죽었고, 가해자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뇌의 상태, 가해자의 유년시절 등을 고려했을 때, 그다지 합당하지 않은 편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과관계를 더 넓은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을 없애야 하며,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증오의 논리”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종교가 그들의 신자들에게 부여하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논리도 부정할 수 있다.


  이 책은 해리스의 전략에 따라 짧고 간결하게, 때로는 반대 인용문이 많이, 그리고 재치 있는 표현과 질문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들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멈춤 구간’이 많은 책이다. 문제 자체도 첨예하거니와 “과연 우리는 해리스에게 어떤 반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를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감이 아닌 증거를 기초로 한 논리적 반론을 우리가 얼마나 제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기대하지 못할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해리스의 주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효용의 문제를 늘 인문학에게 물어보듯, 우리는 “그래, 그렇다면 자유의지 없는 나의 삶에 대해서 나는 어떤 기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지?”라고 물어볼 수 있다. 해리스는 변화의 순간에, 혹은 개선의 순간에 우리가 보다 넓은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해자를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예로 들며 - 내 생각에 이 예 말고도 더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 생각할 여지 한 가지를 남겨둔다.


  “상황을 이해하는 태도의 변화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깊고 더 지속적이고 더 동정적으로 진보한 것이다.(69쪽)


  자유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넓게 보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서 그가 ‘정치’라는 짧은 장(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변화할 수 있는 지점에서는 그렇게 하고, 혹 변화할 여지가 없거나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 지점에서는 무작정 밀어붙이지 않는 대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꼼꼼하게 따져보는 태도이고, 현대인들의 특징인 ‘유용성’에도 맞는 자세이다.


  “우리가 자유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꼼꼼히 따져보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81쪽)


  따라서 이 책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충격을 준다. 하나는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선언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를 맹종하면서도 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이다. 이것이 시대가 기억할 만한 양심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까?


  해리스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늘 그러했듯이 수많은 종교적 믿음, 철학적 노선, 혹은 과학적 반증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고, 그것들에 대응하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와 같은 학자들의 충격적인 소수 의견,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잠시 인용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그 ‘소수 의견(minority report)’이 오늘날에는 쉽게 폐기되지 못하며, 충격적이고 신선한 것일수록 우리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선까지 우리는 이것을 수용할 수 있을까? 전복적 사고에 대해 우리들이 지닌 저항심리, 은연중에 발동하는 경고 사이렌의 소리를 과연 해리스의 주장이 침묵시킬 수 있을까? 우선 나부터 그의 주장을 꼼꼼하게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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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1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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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1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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