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13.07.31



  축구팬들 중 메시와 호날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축구팬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메시가 호날두보다 잘 한다는 이들, 호날두가 메시보다 잘 한다는 이들, 그리고 그런 건 비교할 가치가 없다는 이들.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이 위의 주제로 남긴 댓글들을 보는 것은 퍽 재미있다. 자칭 '전문가'라는 축구팬이 어디 한 둘일까. 그런데 이런 편견을 물리고 천천히 하나씩 읽어보면 하나같이 타당한 말들이다. 하지만 이 두 선수의 재능에 대한 경외와 감탄의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메시는 메시 나름대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하게끔 특화된 선수이고, 이는 호날두도 마찬가지이다. 알다시피 축구는 11명이 한 팀이다. 국제대회에서 교체 가능한 인원수는 3명이다. 따라서 많아 봤자 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선수는 양팀 합쳐서 총 28명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포지션'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메시와 호날두를 비교하는 건 축구팬들의 소일거리이다. 그건 그들의 주관에 맡기자. 어차피 결판이 나지 않을 논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메시와 호날두의 공통점이다. 이 둘은 적어도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대회에서는 절대로 골키퍼로 출전하지 않는다. 메시와 호날두를 골키퍼로 출전시키면, 그 둘은 더 이상 '메시'와 '호날두'가 아니다. 재능은 발휘될 수 있는 '제한된 환경'에서 드러난다. 대학생인 나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 (불특정의) 당신에게 메시와 호날두의 재능은 별 필요가 없다.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의 어떤 욕망 때문이다.


  지난 주, 경주로 가는 KTX 기차 안에서였다. 가족과 함께 떠나는 모처럼의 피서. 행신역에서 신경주역까지는 2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KTX 안의 분위기는 수학여행처럼 왁자지껄하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책 한 권을 가져갔다. 3시간 정도. 얇은 책 한 권이면 되겠다 싶어 나는 마이클 샌델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The Case Against Perfection)』을 들고 갔다. 이어폰에서는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이 반복해서 흐르고, 나는 비행기처럼 레일 위를 날아가는 KTX 안에서 샌델의 여러 사례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봤다. 내가 읽은 샌델의 네 번째 책이다. 그의 책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는 이미 알고 있던 터. 그는 우리가 사회에서 심각한 (그보다는 '근원적인') 문제로 회자될 것들에 대해 별다른 인식 없이 살고 있다는 경각심을 준다. 항상 그랬다.


  지금까지 (예컨대 피터 싱어와 같은 학자들의 동물윤리까지 포함해서) 여러 윤리와 관련된 사상들을 어깨 너머로나마 접하면서 내가 본 가장 강력한 윤리 법칙은 아무래도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간혹 자신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이들에게 칸트의 한 마디는 일면 감동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과연 '도구와 목적'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실타래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때때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리는 아무래도 가언명령의 세계에 있다. 사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세계에 살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도덕적 당위를 공부한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앞뒤가 잘 안 맞으면 웬만해서는 그걸 안 믿는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리라. 도덕은 필요에 따라 내가 꺼내서 쓰는 '도구'이다. 목적의 도구. '양면의 얼굴을 가졌다.' '가식적이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해봤다. 만약 대다수의 인류가 현재 '상용화'중인 도덕에 대해 어느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중요한 건 우리가 스스로를 야누스라고 비하할 것이 아니라 그 도덕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닐까. 도덕은 분명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과학의 발전을 통해 알아온 자연의 참모습은 도덕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였다. 인간이 도덕관념 없이 아프리카 한복판에 던져져 있던 그때, 전쟁의 참화 중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형편이 되었을 때, 인간에게는 '가치'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아름답게 숨겨준 것이 도덕이라는 사실은 굳이 미사여구로 숨길 '극비'가 더 이상 아니다. 모든 것이 그 근원에서부터 의심을 받아왔던 20세기가 지나 도덕의 외피를 쓰고 있던 인간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21세기이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다. 도덕은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의 몫은 앞으로 더욱 첨예해질 도덕의 미래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이다. 샌델이 수많은 사례로 (하지만 별로 길지 않은 책에서) 말하려는 건 바로 이거다. 우리에게 주어진 첨예한 논쟁은, 바로 우리를 '메시와 호날두'로 만들어주는 공학에 대한 것이다. 영화 《가타카(Gattaca, 1997)》에 비유하건대, 머지않아 우리는 누구나 '메시와 호날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와 호날두'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뜻이다.


  샌델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서두에서 축구 이야기를 꺼냈으니, 여기서도 한 번 비유해보자. 먼 미래의 당신이 축구 경기를 본다. 도구나 룰이 바뀌지 않은 정확히 오늘날과 꼭 같은 축구다. 경기가 시작됐다. 최고의 스타가 골을 넣었다. 1 대 0. 그러나 곧 상대편의 스타가 골을 넣어 경기는 1 대 1 동점. 그런데 선제골을 넣은 선수는 소위 '자연산(natural)'이지만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유전자가 강화된(gene-enhanced)' 사람이다. 둘의 실력은 거의 비등해서 축구팬들이 너도나도 누가 더 잘 한다는 식의 논쟁을 할 정도다. 바꿔 말하자면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공학의 힘을 빌려 선제골을 넣은 선수의 재능을 따라잡은 경우이다. 자, 우리는 둘 중 누구에게 더 환호하는가? 물론 이렇게 묻는다면 백이면 백 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쉬운 문제였으면 애당초 샌델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았다. 샌델은 손을 든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왜 그런가?" 과연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질문이 "쉽게 답할" 만한 문제일까? 공학은 우리의 윤리 '패러독스'를 어디까지 몰고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위에서 예로 든 시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샌델이 말한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뭔가가 있는(p.29)" 까닭이다. 그러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실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는데) '유전자가 강화된' 나의 모습을 즐겁게 상상하는 나 자신이 보인다. 정작 공학의 힘을 너도나도 빌리려는 세상에서는 평균의 수치가 지금보다는 더 많이 올라가겠지만 키가 180cm 정도 됐으면 좋겠고, 별로 운동하지 않아도 공학과 약물의 덕을 봐서 날씬하면서도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몸매를 갖게 되면 좋겠다. 기억력도 지금보다 2~3배 이상 강해지고, 인지능력도 향상 되서 지금이면 4~5일 읽을 책을 단 하루 만에 읽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혹시 또 모른다. 서양의 오랜 욕망 중 하나였던 '청춘의 샘(The Fountain of Youth)'을 인터넷 시장에서 단돈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날이 올는지.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의 반응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어차피 고통뿐인 인생이 길어서 뭐하겠냐는 세간의 비근한 반응도 있겠다. 그러나 공학이 우리에게 행복한 장생(長生)을 보장해준다면? 인간은 뭐든지 만들고, 뭐든지 판다. 그리고 이득을 위해서라면 거추장스러운 도덕의 장막 따윈 쉽게 걷어낸다.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바라보는 '루저'들이나 이런 생각을 한다고 여기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샌델의 책에 실린 수많은 사례들은 이미 우리가 공학의 힘을 빌려 얼마나 완벽한 인간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준다. 완벽한 인간이라. "키 175센티미터 이상, 튼튼하고 몸매가 날씬한 여성으로 가족의 병력에 문제가 없어야 하며,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점수도 1400점이 넘어야(p.28)"한다는 뜻일까? 배우자를 선별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벌써 우생학의 매캐한 냄새를 느끼게 된다. 배우자를 선별했으니, 이번에는 자녀를 '개량'할 차례일 것이다. 샌델의 사례들은 자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섬뜩한 사회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의 책에는 '과잉 양육'이라는 단어로 묘사되어 있다. 모두들 자녀를 스포츠스타로 키우려고 한다. 이는 흡사 자신의 자녀들을 사회적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각종 투자를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모습과 같다. 사실 둘은 공학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샌델은 이 차이점을 강조하기보다는 공통점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세태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만화로 다룬 인터넷 웹툰들이 여럿 있는데, 그 밑에 달린 댓글을 보면 가슴이 저리다. 모든 것이 막연하게만 보이는 사춘기의 그들이 그 막연한 시각으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회상이 댓글들에 붉은 피처럼 묻어 있는 까닭이다. 샌델은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이 시대의 과잉 양육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나타내며, 이는 선물로서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이다. 이것은 당혹스럽게도 우리를 우생학 가까이로 끌고 간다.(p.101)"


  우생학을 끔찍한 무언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주의 우생학'의 개념을 들려준다면 더러 솔깃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미래의 인류를 위해 결함을 예방한다는 주장은 꽤 논리적이고 합당한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 선 사람들의 말처럼 "그건 개인의 선택에 맡길 일이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생학적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공학적으로 강화할 '명분'을 얻게 되고 만다. 이 논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개인'이라는 주체 문제를 감성적으로 건드리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래, 내가 한다고 하는데 그걸 왜 문제 삼아야 하는 거야?"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윤리적 해이 현상(물론 이런 가치편향적인 단어 말고도 다른 용어가 있겠지만 샌델은 나와 비슷한 표현을 썼을 것이다.)'으로부터 우리의 도덕을 방어할 만한 논리는 없는 것일까? 샌델은 하버마스의 두 가지 개념을 든다. 하나는 우연성(contingency)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freedom)이다. 우리는 가공품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연하게 태어나며, 누군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공학은 둘을 '계획'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둔다. 우리는 누군가의 하위폴더가 된다. 자연을 원래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씩 정리해 사진과 문서로 '정복'하려는 인간의 야욕이 인간 자신에게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우연성과 자유가 우리의 전제조건이라면, 그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과연 무엇이 '도덕적 지평'이 될까? 샌델은 겸손(humility), 책임(responsibility), 그리고 연대(solidarity)을 든다. 왜 그럴까? 자연이 우연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어떤 현상이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통제하려는 충동을 자제(p.132)"하려고 한다. 인과는 '통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메시와 호날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위치에 합당한 재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위치에 다다를 수 없는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아무나 ○○을 하냐?"라는 비아냥거림의 의미는 재능에 대한 인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다다른 어떤 위치에 대한 자만을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는 노력으로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에 오르지 못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다. 천재지변으로 산에 오르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그건 '우연'이다. 만약 그것을 우연으로 돌리지 않으면 (삶의) 과정에 있어 발생한 수많은 일들의 태반은 우리의 탓이 된다. 책임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샌델은 이를 재치 있는 유머로 말한다. "농구 선수가 리바운드를 놓쳤을 때 코치가 야단치는 것은 제 위치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떨까. 유전자 치료 좀 받지, 키가 작아서 리바운드도 못 받는 거 아니냐고 야단치지 않을까(p.133)" 조금 웃기지만 이는 무서운 상황이다. 첫 번째 지평인 겸손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가난한 자보다 더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p.138)"이라는 능력주의적인 인식이 저변에 깔리게 된다. (그러나 이미 그런 사회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건 왜일까?) 가진 자는 겸손하지 않다. 우쭐거린다. 이러면 연대는 없다. 그래서 마지막 지평인 연대마저 파손된다. 이게 샌델의 주장이다. 그의 이 말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신은 성공에 부적격한 사람이니 유전적으로 부족한 면을 강화할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p.138)."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 이것은 우연성과 자유를 본성으로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는 도덕적 지평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반쯤 건넌 것도 같다. 인터넷의 소위 '낚시 기사'들 제목을 들여다보면 '우월한 유전자'라는 문구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몸매의 우리가 날 때부터 날씬하거나 근육질인 몸매의 연예인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우월한 유전자'라는 문구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논쟁은 뒤로 물리자. 우리는 대부분 부러워한다. 내심 말하진 못하지만 저런 몸매가 원래부터 주어진다면 그걸 꺼려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 때문에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그 자체를 강제의 힘을 빌려 스스로 '개량'하거나 혹은 내가 아닌 타인을 강제로 '개량'시키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본성을 바꾸는 것(p.144)"이다. 샌델은 이를 "자율권을 포기한 극단적 형태(p.144)"라고 못 박는다.


  우리는 태어났다.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태어나는 현상은 자동사가 아니라 피동사로 설명해야 옳다. 삶 또한 우리가 '갖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프런티어 정신, 벤처 정신 등등을 운운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은 적극적으로 바꾸고 개척해야 하는 특수한 환경의 총체 정도로 여겨진다. 신의 이름 아래에서 피동사의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과는 달리 현대인의 대부분은 누구나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신이 물러갔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어디까지나 순수한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우주의 비밀을 하나의 과학적 사실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우주의 정복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우리가 미래를 향해 걸어간 뒤, 훗날 그 발자국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위대한 정복의 길이라 느낄까? 아니면 무모한 위압의 뼈아픈 상처라 여기게 될까?


  샌델은 우리를 힘겨운 논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뒤, 의외로 아주 간단하면서도 원칙적인 답변을 쥐어준다. 어쩌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보다 샌델의 (이 용어는 조금 조심해서 다뤄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역자 강명신氏가 209~211쪽을 할애해 적어놓은 설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공동체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책이 바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이지 않을까 싶다.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 이것은 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칸트를 빌려 주장한 '옳음>좋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좋은 것보다는 우리에게 옳은 것을 해야 하며, 그 옳은 것이란 '목적의 도덕적 중요성'에 기초한다. 간단히 예로 들어보자면 이렇다. 의학의 목적은 치료이지 신체 개량이 아니다. 후자를 추구하면 의학의 목적이 훼손된다. 그렇게 훼손된 의학은 우리의 삶을 훼손시킨다. 어떻게?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가 파손되는 모습 그대로. 이런 가치들이 대체 왜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상상만 해봐도 충분하다.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의 가치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실 그런 것들이 극단적인 디스토피아 예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히 고갈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금방 꺼지지 않고 오래 타는 건물에서 더 많은 유독가스가 나는 법이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예전의 사람들이 감히 생각지도 않았던 근원적인 문제로 달려가고 있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시대적 책임이라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민감해야만 한다. 사유만으로 근원을 탐구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의 여러 도덕사상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겸손'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야말로 내가 우러르는 현자들의 마음가짐이라는 것도 여러 경전들을 통해 알게 됐다. 이미 우리가 탐구하던 근원에서도 도출됐던 '모범답안'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샌델 역시 현대의 여러 현상들을 파노라마로 보여주면서 우리가 평소 별 것 아니라고 여겼던 그 마음가짐을 상기시켜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에게 늘 중요하게 요구됐던 것들. 누군가는 겸손이 지나친 복종으로 이어진다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 사람은 일종의 '신(神)에의 복종'을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내가 아는 겸손은 그 어떤 자세보다도 열려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된 미덕이기도 하다. 강제를 통해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가둬버리려는 우리 자신에게.


(p.s 줄기세포 논쟁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이슈가 됐었다. 그와 관련된 샌델의 입장을 살펴보고 싶다면 '에필로그'를 참조하면 된다. 샌델은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찬성하지만 인간 복제는 반대한다. 이는 배아의 '지위'에 관한 논쟁과 '(생명)존중과 사용'의 양립 논쟁이라는 굉장히 첨예한 문제를 관통하면서 내놓은 샌델의 주장이다. 나 역시 샌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지만 샌델이 말하는 줄기세포 사용의 '선'이라는 것이 지켜질 수 있는 정확한 경계선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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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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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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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0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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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1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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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5 0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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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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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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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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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4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울력’이라는 말을 듣게 됐다. ‘울력이 뭐지?’ 나는 입안에서 이 단어를 굴리고 굴렸는데, 생각보다 발음이 예쁜 것 같아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두레나 품앗이와는 달리 무보수로 어떤 집안의 어렵거나 힘든 일을 도와주는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라고 했다. 대가가 없다는 뜻이다. 무보수의 도움이라. 생활의 거의 모든 것에, 심지어는 이렇게 타이핑을 두드리는 1분 1초에도 대가가 부여되는 세계의 나로서는 ‘형이상학적 도덕’처럼 들린다.


  나와 같은 현대인들은 즐비(櫛比)하다. 문자 그대로 “빗살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다. 도심은 그야말로 불확실성의, 복잡성의, 불투명의 공간이겠으나, 높은 곳에 올라 조망해보면 그야말로 즐비의 공간일 것이다. 그 즐비의 공간 사이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들이 설치되어 있다. 하루를 돈 안 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음, 너무 평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돈에 대한 강박증을 느끼는 건 확실하다. 돈이 곧 자연과도 같은 시대이니까. 그런 까닭에 돈 없이 할 수 있는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우리는 왠지 모르겠지만 바코드 하나쯤은 안 붙어 있나 확인하곤 한다. ‘순수’라는 - 물론 ‘순수’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 전무하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 호숫가에 돈을 내고 들어갈 수 있는 공원이 생기더니, 둘레길 주변으로 자판기가 들어온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울력할 수 있는 순간도 ‘즐비’하다. 어떤 건물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때, 혹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진 않나 쳐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문을 여는 아주 간단한 수고라도 덜어주고자 문을 잠시 잡아주는 것도 울력이다. (물론 냉방 중인 건물에서는 자제하는 것도 울력이겠다.) 초등학교에서는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께서 길을 건너실 때, 옆에서 안전하게 도와드리라고 배우는데, 그것도 울력이다. 백지장을 나눠드는 것도, 에티켓도, 매너도 다 그렇다.


  이렇게 살펴보니, 울력은 다름 아닌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다. 영웅의식이나 어떤 비장한 헌신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소위 “짬날 때” 잠깐 거들어주는 것 정도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을 ‘구원’해줄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동체’라는 단어로 울력을 생각할 때마다 유독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나사렛의 예수이다. 나는 그를 믿는 가톨릭의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견진성사’라는 것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 예수는 신이나 신의 아들, 현전(現前) 같은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가르침을 펼치고 그것을 아주 비범하게도 직접 실천한 ‘스승’이다.


  내가 ‘울력’이라는 단어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예수이다. 그가 이 단어를 들으면 무릎을 치면서 자신이 설파하려고 했던 모든 바가 그 단어 안에 들어있다고 말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그럼 나는 우리말이 이 정도로 알차고 예쁘다고 자랑을 했을 것이고. 예수의 시대에 서남아시아(중동)은 여느 지역과 비슷하게 못 살고, 관리들이 부패를 저지르며, 수많은 교파들로 나뉘어 신의 뜻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릇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었다. 예수가 돌연 나타나서 그 짧은 생애를 바치며 당대 잘못된 교회를 비판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헌신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성경』을 완독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리고 사실 『성경』이라는 것도 원전(原典)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표적인 텍스트이고, 그것이 정말 예수의 말이 맞는지도 꾸준히 의문거리였기 때문에, 내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 말할 수는 없다.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실 그를 따르는 무리에 섞이고 싶어 하겠지만 당시 예수를 비방하고 의심하던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마이크로 외치고 다니는 것이나, 왜 주말에 교회 안 다니냐고, 그 좋은 시간에 뭐하느냐고 비꼬는 것이나 매한가지로 흘려듣는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예수의 말이 아님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세계를 비판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예수가 재림한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를 알아볼까?


  이런 세상을 ‘눈먼 종교’라 아주 강하게, 적나라하게 비판한 인문학자 김경집이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이라는 책을 냈다. 마침 나는 서재에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A Devil's Chaplain)』, 샘 해리스의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The Moral Landscape)』,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Beyond Religion)』 등을 꽂아두고 어떤 책을 먼저 읽을지 가늠해보고 있는 차였다. 하지만 책의 첫 부분을 읽자마자 나는 김경집의 것을 택했다. 독자는 자신이 평소 비판하고 싶어 했던 대상을 저자가 대신 정확한 근거와 신랄한 묘사로 비판해주면 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런 건 어떨까?


  “성탄절이 되면 우리 모두는 잠시 착각하는 것 같다. 마치 자신들이 동방박사들이나 목동들과 함께 혹은 그 곁에 있는 것처럼. 혹은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의 진짜 모습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여관에 있었던, 방을 내주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여전히.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면서 정작 삶은 태연하게 예수를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성탄절을 맞아 잠시 아기 예수 탄생의 축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잊을 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p.34)


  “복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니 내가 사랑을 실천할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갖추고 있느냐는 물음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만 전도의 측면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폐 가운데 하나다. 핵심은 전도의 열정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라는 걸 망각했기 때문이다.(p.56)


  김경집은 『성경』의 여러 대목들을 요목조목 살펴보면서 신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속뜻을 인문학적인 견지에 맞춰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벗어나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참조하고, 얼핏 보면 좀 너무하다 싶을 예수의 행동을 다른 각도로 재조명하면서 예수가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를 짚어나가는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글을 지루하게 끌고 가거나 어려운 말을 쓰는 성격의 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과의 비교나 『성경』의 예시 사이에 여러 일침들을 적어놓았다. 단어나 맥락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심어놓은 각주도 넓은 시야를 키우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이 심심하면 펼치는 종교 용어 문제, 그러니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용어 ‘분쟁’도 이 책에서는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종교의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에게라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부류의 독자에 속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읽으면 이중의 반성을 하게 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첫 번째 반성은 기독교(가톨릭+프로테스탄트)계열의 신자가 아니더라도 예수의 뜻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부분 중요하며, 그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일 것이다.


  두 번째 반성은 무작정 종교에 대한 비판을 가하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다. 병폐로 만연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가 종교로부터 엄청난 손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경우는 많지 않다. 종교가 사회의 여러 현상들과 하나로 섞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비판할 수 있는 ‘거리’에 놓인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비판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수고를 우리 역시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처럼 『성경』을 여러 번 고쳐 읽고, 자기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보며, 어떻게 해야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우리도 마땅히 고민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그건 전문가들의 몫이지.”라고 둘러댈 뿐이었다. 왜 그것이 전문가들의 몫이 되어야 할까? 당위성이라도 있을까? 우리는 그 벽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높게 설정해놓은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교양으로 종교비교학에 대한 강의, 그리고 종교와 정치에 대한 강의를 인상 깊게 들은 후부터 여러 경전들을 나란히 놓고 그 오래된 뜻의 진의를 내가 한 번 오랜 시간을 들여서, 아마 평생을 읽어도 깨우치긴 어렵겠지만,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나의 서재에는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한 한 권짜리 간략한 입문서부터 시작해서 『성경』, 『꾸란』, 『우파니샤드』등 여러 경전,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책, 과학과 비교한 종교비판서(주로 도킨스와 비슷한 노선의 작가들), 작가가 쓴 종교 이야기(오정희의『이야기 성서』) 등이 꽂혀 있다. 그 외에도 종교는 주요 인문학 도서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비판할 거리를 찾았으면 그 쟁점을 이해하고, 경전 속의 진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적 제도나 (김경집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학적 프레임’ 같은 것은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방해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저자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을까.


  옛 사상들을 읽어보면, 큰 뜻은 깨우치기 어렵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건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 중에는 말이 너무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걸 도대체 어떻게 실천하며 살지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여러 번 읽어 외울 정도가 되고, 마치 어렸을 때부터 외웠던 기도문처럼 어디서든 암송할 수도 있으며, 머리로 완전히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건 불 보듯 뻔하다. 그건 예수를 따르던 12사도들도 그러했다. 오직 예수만이 실천을 할 수 있었다. 왜 그는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못했을까? 그는 어째서 욕심을 버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들을 버릴 수 있었을까?


  교회에 가서 목사와 함께 뛰며 노래를 부르거나 성당에 가서 신부가 주는 밀전병을 받아들고 예수의 몸이라 외우며 먹는 걸로 우리가 예수의 뜻을 따를 수는 없다. 그건 나쁘게 말하면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종교적 자위’일 것이고, 좋게 말하면 ‘정신적 위안’이다. 절차들이 우리를 어떤 신념 아래 참여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판의 견지를 갖고 있는 독자들의 생각처럼 저자 역시 종교의 병폐가 그런 곳에서부터 시작됐으며, “말뿐인 세상”으로는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라는 건 이룰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못 박는다.


  사실 실천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여러 경전들을 교차로 읽으며 할 수 있는 일은 생각이 여무는 시기라고들 하는 40~50대를 대비해 여러 큰 뜻들이 내 머리 안에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유연성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여러 종교에서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늘 강조해왔다. 그건 중국과 인도의 옛 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자꾸만 갇혀가고, 익숙한 것에 더욱 천착하기 때문에 신념도 신앙도, 혹은 좋은 뜻도 오래된 저수지의 고인 물처럼 썩어버리기 십상이다. 적어도 내가 여러 좋은 책들을 읽으며 알게 된 건 이런 것이다. 내가 물어볼 수만 있다면 예수도 내가 바라는 답을 들려줄 것이다. 예수에게 “저는 불경을 읽었습니다.”라든가, “저는 당신을 따르는 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저서들을 읽었는데, 아주 감명 깊더군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오늘날 일부 강경한 신자들이 펄쩍 뛰며 화를 내는 것처럼 반응할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할 것이다. 여러 뜻이 서로 통함을 그는 금방 간파했을 것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내가 본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문둥병에 걸린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나누고자 새로 임명된 이블린 백작(극중 올랜도 블룸)에게 “예루살렘은 만민을 환영하노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무슬림이든, 유대인이든, 가톨릭 신자이든 모두 와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왕은 백작에게 종교를 구분하지 않은 용어로 “무력한 자(helpless)들을 도우라.”라고 말한다. 그건 대가가 없는 일이다. 백작은 평민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하나의 큰 ‘울력’의 뜻으로 모아 정말 왕이 부탁한 일을 해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백작은 그렇게 했다. 마른 땅에 물을 내서(그는 기계에 능숙한 장인(匠人) 출신이다.) 사막을 개간하고, 기사의 뜻을 순수하게 지켜내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는 왕이 죽은 후,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는 새로운 왕의 왜곡된 뜻으로 인해 살라하딘과의 전쟁이 불가피해진 상황이 되자, 예루살렘의 백성을 지키고자 출신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이들을 기사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확실히 전쟁은 무자비했다. 양측은 협상에 들어갔고, 백작은 살라하딘과 서로 군사를 물리기로 결정(승리로만 따진다면 무슬림의 승리)한다. 서로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백작이 살라하딘에게 예루살렘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살라하딘은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기도 하지.”


  내 서재에는 사이먼 몬티피오리가 쓴 『예루살렘 전기』라는 제법 두꺼운 책이 있다. 아니, 사실 ‘엄청’ 두꺼워서 읽을 엄두를 지금까지도 못 내고 있는데, 목차를 보거나 빠르게 넘겨만 봐도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은 분쟁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그 역사가 아무리 왜곡하고 비틀려고 해도 지금까지 올곧게 전해지고 있는 한 사람의 큰 뜻이 더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 김경집이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거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건 아무래도 예수의 부활이다. 『성경』에는 예수 말고도 부활한 이가 몇 있지만 사실 급이 다르다. 그런데 예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이라든지 예수가 부활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거니와,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예수는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내 몸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 부끄럽고 탐욕적이며 사악한 나, 실천하지 못하고 공염불만 되뇌는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는 것은 참 어렵다.(p.295)


  실천은 개인의 몫이지 남한테 전가할 몫이 아니다. “왜 너는 안 하냐?” 이게 아니라, “왜 나는 못 하는가?”를 거듭 물어보면서 나를 자꾸 큰 뜻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려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매일 같이 우리는 변덕쟁이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막 망가지고 싶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마치 현자가 된 것처럼 엄숙해지기도 한다. 뒤돌아보면 어린 애 같아 쑥스럽고 민망하기도 하다. 가끔은 하느님이든 염라대왕이든 어쨌든 내가 죽은 뒤 어딘가에서 심판을 받는다면 얼굴이 얼마나 빨개질까 공상의 염려도 해본다. 그러나 실천은 행동에 초점을 둔다. 안 하는 것보다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게 실천의 미덕인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샌델이 ‘근육’에 비유했던 것처럼 이런 미덕은 계속 해봐야 계발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끄럽지만 계속 해보려고 하고, 그런 생각이라도 자주 갖기 위해 큰 뜻을 담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 아니면 직접 그런 행동을 실천에 옮긴 ‘천사’ 같은 사람들의 선행을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보는 것도 좋다.


  김경집은 예수의 뜻을 고쳐 생각해보면서 ‘신’의 영역에 올라가 있어 우리가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만 같았던 그 뜻을 우리의 바로 옆으로 끌어내린다. 그 작업의 연속인 이 책에서 내가 유난히 자주 볼 수 있었던 표현은 “더불어.”였다. 바로 울력이다. 내가 인상 깊게 들은 종교 강의 중 하나에서 담당 교수(그녀는 여러 종교를 비교하는 개신교도였다.)가 재밌는 말을 해줬던 것이 지금 기억났다. ‘오병이어’는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교수가 하는 말이 정말 그랬겠냐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른이고 아이고 품안에 제 몫은 가지고 있었겠죠. 못 먹을 때였으니까. 먹고 살아야 하면 뭐든 못 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무리의 사람들에게 말했죠. 나눠야 한다. 함께 해야 한다. 베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렸겠지만 아마 예수가 앞장서서 자신의 품에서 먹을 것을 뜯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줬을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했겠죠. 저 사람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네. 그래서 품에 있는 걸 주섬주섬 꺼내 머뭇거리며 주변에게 나눠줬고, 그렇게 했더니 품에 아무 것도 없는 배고픈 사람들까지도 넉넉하게 다 먹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물론 그녀의 ‘새빨간 추측’이다. 하지만 나는 그 훈훈한 ‘울력’의 광경을 상상해봤다. 진짜 기적은 예수가 마법사처럼 음식을 부풀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울력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방점은 ‘기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먹었다는 것에 찍어야 한다. 사실 이 정도로 울력의 힘은 대단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말씀에 이런 게 있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의 뜻은 말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할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이 땅에 ‘재림’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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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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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마약과 알코올 등에 중독된 산모에게서 태어난 기형 신생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마가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들어간 모습, 항문이 없는 모습, 손가락이 하나 적거나 엄지 바깥으로 하나 더 나 있는 모습, 노안(老顔), 꼽추, 조산된 미숙아보다도 훨씬 작은 모습. 내가 그들을 본 것은 중학생 때였다. 지금도 매해 열리는지 모르겠는데, 《인체신비전》은 어렸을 때만 해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친구들과 나는 여학생들의 비위에 거슬리도록, 아니면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객기를 부리며 해부된 시체들과 피부가 벗겨진 시체들로 즐비한 《인체신비전》의 팸플릿을 펼쳐든 채 교실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 가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생긴 시체들을 보며 낄낄거리던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그 무렵 삶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에 이상하리만치 동요되고 있었다. 현장학습이 효과를 본 극명한 사례라고나 할까. 또 하나 마음속에 확실한 진리처럼 다가온 것은 "나는 기형이 아니다."라는 안도감 섞인 구분이었다.


  불쾌한 콘텐츠들을 필터링(걸러주기)해주는 'safesearch' 기능을 잠시 꺼놓고 구글로 'malformation(기형)'을 검색해보면 보기에도 끔찍한 사진들을 원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역겨움을 물리고 그러한 '운명'을 타고 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생명에 대한 연민을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꺼내기 시작하면 나는 얼마나 다행인 삶을 살고 있으며, 저들은 얼마나 불쌍하기 짝이 없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의 부모님이 지금의 부모님이 아니라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였을 가능성은 동일하다. 천문학적일 뿐이다. 삶의 시작은 어느 정도 결과론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불행한 운명을 짊어진 채 태어난 까닭에 빛조차 보지 못하고 죽을, 혹은 태어나긴 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아이의 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제도가 있다면 기꺼이 지지를 보내주고자 할지도 모른다. 바버라 해리스의 프로젝트프리벤션이 그러한 비영리단체이다. 나는 그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아래에 사이트 소개란을 대충 번역해 놨다.


  "프로젝트프리벤션은 마약과 알코올, 혹은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여성과 남성들을 장기간 혹은 영구적으로 피임시킬 목적으로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합니다. (……) 우리의 임무는 지속적으로 중독자들에게 연락을 취해 (우리의 제안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위탁을 제공하며, 그들이 임신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피임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탁 양육되는 아이들의 수를 낮추고 있으며, 매번 자신의 아이를 지우기만 할뿐인 출산으로 중독자들이 느낄 죄책감과 고통을 방지하고 있고, 의학적이거나 정서상의 문제없이 태어날 행운을 가진 아이라 할지라도 위탁 양육의 상황에 놓이면 종종 사랑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원하고 싶어 하는 평생의 갈망과 마주하는 까닭에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을 예방하고 있습니다.(Project Prevention offers cash incentives to women and men addicted to drugs and/or alcohol to use long term or permanent birth control. (……) Our mission is to continue to reach out to addicts offering referrals to drug treatment for those interested and to get them on birth control until they can care for the children they conceive. We are lowering the number of children added to foster care, preventing the addicts from the guilt and pain they feel each time they give birth only to have their child taken away, and preventing suffering of innocent children because even those fortunate enough to be born with no medical or emotional problems after placed in foster care face often a lifetime of longing to feel loved and wanted.)"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원제 : What Money Can't Buy)』에서 위의 사례를 언급한다. 우리의 감정적인 생각에 비추어 보자면 프로젝트프리벤션은 세계 각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위에 번역해놓은, 이 비영리단체의 취지만 읽어보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필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샌델에 따르면 프로젝트프리벤션은 여러 모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여성의 생식능력은 판매가능한가?"라는 매우 첨예한 질문이 놓여 있다. 종교적 의미, 혹은 도덕적 의미를 정치로부터 배제해서 미국 국민들의 개인적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지상주의가 지난 반세기동안 미국을 지배한 사상이었다. 그런 미국이 변화하고 있다는, 즉 새로운 사상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의 대표작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며, 자신이 아닌 누군가(혹은 무엇이)가 도움을 줬으면 한다. 될 수 있으면 그 누군가는 큰 단체, 그것도 아주 커서 공신력을 가진 단체여야 사람들의 성에 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샌델이 제시한 '공동체'라는 개념이었다. 그곳에서는 토론을 해야 한다. 계속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그로부터 의미를 도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시장논리에 너무나도 깊게 빠져 있기 때문에 '값'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고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하길 거부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샌델은 값[돈]으로 판단 할 수 없는[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권유한다. 이것이 내가 이 자리에서 리뷰하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가장 큰 틀이다. 기본 질문은 이렇다. "과연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시장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p.80)"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사람은 샌델이 공적 담론에 도덕적 신념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 중심적 사고의 영향력과 권위, 그리고 2008 금융위기 때에도 그러했듯이 정부의 대응능력 부재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증오와 공허감 같은 것들이 신념의 생명력을 깎는 중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자 한다면 우선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서문으로 시작해 제 1장부터 제 5장까지 샌델이 엄선한 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면면이 대부분 찬반의 극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문제점들을 담고 있다. 샌델은 보통 사회적 문제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사례들을 그 나름 판단한 강도의 순서대로 늘여놓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제 1장 '새치기(Jumping the Queue)'에서는 추가비용을 받고 빠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 즉 재화지불능력과 재화가치평가 정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성립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져본다. 암표를 예를 들어보면, 그레고리 맨큐는 "암표 거래가 바로 시장이 효율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예."라고 하고, 판매 반대의 입장에서는 공정성, 공공자원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 신성성 등을 근거로 든다. 재화가 공공성을 강하게 띠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시장의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지, 아니면 샌델이 제시한 도덕적 관념의 기준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훨씬 더 고민하게 된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샌델의 사례는 독자들에게 더 많은, 그리고 더 깊은 고찰을 요구한다. 제 2장은 인센티브에 관한 내용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앞서 이 졸문을 열며 내가 예로 든 불임시술 프로젝트이다. 해리스의 입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중독의 영향력을 타인(주로 곧 출산할 자녀나 성장 중인 자녀)에게 넘겨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불임시술 프로젝트를 보면 한편으로는 강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뇌물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선 '강압'이라는 개념에서 어떤 물리적인 뉘앙스를 지워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강압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의 조건을 의미한다. 근로자가 싼 값에 일하기로 회사 측과 정식적으로 계약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면 계약에서 유리한 쪽은 아무래도 회사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마약중독자들은 대체로 사회적 빈곤층에 해당한다. 때문에 불임시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가로 돈이 지불된다면 출산 여부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돈 때문에 '끌리는' 수가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강압'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의 유의사항은 '뇌물'에 대한 이해인데, 여기서 말하는 뇌물은 광범위한 개념의 부패행위로 (그것은 재화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어떤 대상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즉 도덕적으로 낮은 차원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임시술 프로젝트로 인해 떨어진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여성의 생식능력이다.


  이렇게 도덕적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며 반대를 해도 사실 어디까지가 강압이고, 뇌물에 해당하는 행동은 어느 선까지인가를 우리는 또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우리가 수요와 공급만으로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경제학에 기대어 고찰의 기회를 놓치는 건 뼈아픈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샌델이 우리에게 함께 떠맡자고 제안한 부담의 실체인 것이다. "비시장 규범의 지배를 받는 사회적 관행에 가격효과원칙이 적용될 때에는 신뢰성이 떨어진다.(p.130)"면서 샌델은 인센티브가 문자 그대로의 효율을 보장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학점 A를 받으면 돈을 주겠다는 인센티브에 대한 결과도 들쑥날쑥하고, 그가 이스라엘 어린이집을 예로 든 것도 그러하다. 내재적 장점이, 그러니까 우리가 주로 선(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장점이 인센티브 없이도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데도 인센티브가 특정 행동에 지급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샌델은 이런 식으로 자녀출산권, 탄소배출권, 탄소상쇄정책, 야생동물(검은코뿔소, 바다코끼리 등)사냥권 등을 사례로 소개한다. (인센티브에 관해 읽을 때에는 도덕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처벌인 벌금과 도덕이 배제된 가격인 요금을 구분한 샌델의 설명도 참조해야 한다.)


  샌델도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인데, 경제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 3장에 소개된 몇몇 사례들을 읽으면서 몇몇 경제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미덕'을 시장이 어떤 식으로 잠식해가고 있는지가 설명되는데, 사실 시장논리나 도덕적 관념을 배제한 채 우리는 미덕에 입각해서 과연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선물만 해도 그렇다. 마음이 진정한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추석 때만 되면 어떤 선물을 줘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안하게 그냥 돈을 봉투에 넣어 준다.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현금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는 부정하고 싶다는 사람(Alex Tabarrok)이 있지만 그 '사실'은 이미 우리의 생활이 된지 오래다. 샌델은 이렇게 미덕이 변형되어 우리가 미덕마저 구입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입한 미덕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까? 샌델은 돈을 주고 산 졸업장의 명예는 보트를 산 뒤 얻게 되는 만족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신랄하게 비꼰다.


  샌델은 시장논리에 대한 가치 '수호'의 입장에 서서 주로 공정성과 부패를 그 근거로 드는데, 내가 읽은 경험에서 보자면 샌델은 공정성보다는 부패 쪽의 입장인 것 같다. 그는 미덕, 공공재화 등의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되는 것을 강조하며, 그런 강조를 위해 반대의 사례들을 여러 개 언급한다. 재화가 시민의 미덕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스위스 핵폐기물 처리장 찬반 논란의 사례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샌델은 두 학자(Bruno S. Frey, Felix Oberholzer-Gee)의 말을 인용해 "재정적 인센티브를 도입하면 시민의 의무의식이 밀려나는 경향이 나타"난다면서 그 까닭을 "좋은 행동을 한 대가로 보상금을 주는 것이 그 행동의 특징을 바꾸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쉽게 말해 마음속의 동기와 돈이 주는 동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 중에서는 시장 논리로 미덕을 아낄 수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유명 인사들이 꽤 있나 보다. 샌델이 대표적인 예를 세 개 적어놨는데,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다.


  가령 한 학자(Kenneth Arrow)는 이타적 미덕이 희귀하기 때문에 많이 쓰면 고갈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Sir. Dennis H. Robertson)는 '사랑의 경제학(Economizing Love)'이라는 개념을 통해 경제학이 사랑의 고갈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으며, 다른 학자(Lawrence Summers)는 "이타심을 아껴둠으로써 보존하는 것이 훨씬 낫다.(p.179)"고 했는데, 이들은 모두 세계 경제학에 큰 영향을 끼친 명사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덕을 '갈고 닦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랑을 아끼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p.180)"라고 한 샌델의 말이 옳다.


  제 4장에는 '데스풀(Death Pools)'이라는 소제목을 달아도 괜찮을 것 같다.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시장 논리가 행한 여러 가지 사례들이 언급되는데, 도박과 보험 사이의 애매모호한 경계가 샌델이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쟁점이다. Death Pools는 문자 그대로 '죽음 도박'이다. 샌델의 어조는 이 장에서 더욱 단호해진다. 우리는 '생사의 갈림길'이라는 말을 쓰며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다. 죽음도 사고 팔 수 있다. 타인의 죽음을 시기적으로 예측해서 도박을 할 수 있고(이것이 바로 '데스풀'이라는 도박), 임직원의 죽음을 통해서 기업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으며(기업 소유의 생명보험. '청소부 보험(janitors insurance)'이라고 한다.), 말기환금에 투자했다가 상대방이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중개인을 고소할 수도 있다. "오늘날 삶과 죽음을 거래하는 시장은 한때 이를 억제했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목적을 앞질렀다.(p.206)" 박대성의 『미네르바의 경제전쟁(2011)』에 따르면 우리나라 생명보험 규모는 920억 달러로 세계 10위권에 해당한다. 도박과 보험의 거리는 의외로 가깝다. 도박은 누군가가 일찍 죽었으면 하는 거고, 보험은 보험가입자가 오래 살수록 이득인 것이다. 이 보험을 팔 수 있는 전매사업도 생명을 판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아니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장관행은 "윤리적 민감성이 무뎌질 가능성(p.196)"을 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마지막 장은 명명권(Naming Rights)에 대한 것으로 2~4장에서 뜨겁게 달궈졌던 고찰의 온도를 조금 식혀주는, 어찌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다. 야구팬인 자신의 이력을 설명해주는 부분부터도, 아마 야구팬이 많은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많은 어필을 할 것이다. 대신 나는 축구팬이기 때문에 예를 조금 바꿔서 명명권의 사례를 몇 가지 들어야겠다.


  우리나라의 이청용 선수가 뛰는 볼튼 원더러스는 1989년부터 작년까지 스포츠용품 회사인 리복(Reebok)의 후원을 받았다. (올 시즌부터는 아디다스의 후원을 받는다.) 리복은 볼튼 원더러스와 모범적인 후원 사례를 남겨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1997년에는 볼튼 경기장의 명명권을 사서 그 이름을 '리복 스타디움(Reebok Stadium)'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고 만 아스널은 과거의 영광을 옛 구장 하이버리에 남겨두고 신축 경기장을 2006년에 완공했다. 이 경기장을 산 회사는 에미레이트(Emirates) 항공. 그들은 서남아시아(중동)의 엄청난 자금(1억 파운드)을 투자해 2004년 10월 5일 명명권을 사는데 성공, 현재 아스널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Emirates Stadium)에서 홈경기를 갖는다. (하지만 이 명명권은 UEFA가 주최하는 국제대회에까지 효력을 미치지는 않는다.) 런던의 명소 테이트 모던을 건축한 헤르초그&드 뫼롱(Herzog & de Meuron) 건축사는 아마 건축도에게는 유명할 스위스 회사인데, 이 회사가 만든 또 하나의 랜드마크로 알리안츠 아레나(Alianz Arena)가 있다. 독일에서는 그 외양 때문에 '고무보트(Schlauchboot)'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 경기장은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를 꺾고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석권해 세계 축구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재고하게 한 바이에른 뮌헨과 그들의 (규모 상 상대가 되진 않겠지만) 라이벌인 1860 뮌헨이 같이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알리안츠 아레나는 건물을 둘러싼 외벽의 색깔이 빨간색(바이에른 뮌헨)과 하늘색(1860 뮌헨)으로 바뀌는 놀라운 건물이다. '알리안츠 아레나'는 물론 알리안츠 회사가 명명권을 사서 붙은 이름인데, 2005년 시즌부터 시작해서 30년을 쓰기로 계약했다. (비슷한 예로 박지성과 이영표가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몸담았던 PSV 아인트호벤은 필립스 스타디온(Philips Stadion)을 홈구장으로 쓴다. '필립스'라는 이름으로 명명권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사실 이 경기장은 애당초 네덜란드 회사 필립스가 노동자들을 위해 1910년에 건설한 것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요즘 재벌 회사들이 투자를 목적으로 명명권을 사고파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하겠다.)


  명명권과 머니볼, 스카이박스, 홈 슬라이딩 후원 등을 보면 구단주와 이사 등 구단의 수뇌부들이 점점 커가는 스포츠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비싼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하고, 홈팬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경기장 입장료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재벌들의 구단 운영 개입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미국의 스포츠 재벌 말콤 글레이저의 가문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했을 때 맨체스터 거리에서 일어난 엄청난 시위를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 중에서는 시민구단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FC 유나이티드 맨체스터'라는 팀이 하부리그에서부터 천천히 승격 중이라는 사실을 가슴 벅차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와 경기장이라는 가치는 시장논리 외에 우리의 사회적 결속, 시민적 감성 등에 호소하는바 역시 크다. 때문에 이 분야에 지나치게 상업의 개입이 커지면 그 가치는 손실되기 십상이다.


  이런 시장의 개입이 시(市)운영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때는 어떤 반응이 가능할까? 뉴욕의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스내플(Snapple)과 계약을 체결했을 때, "비판가들은 빅 애플(Big Apple - 뉴욕 애칭)이 '빅 스내플(Big Snapple)'이 되려고 도시를 팔아넘기고 있다고 말했다.(p.260)"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사례들을 하나로 묶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p.247)"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판단의 중간에 서서 양쪽 모두를 생각하라고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속뜻은 시장논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판단의 중간으로 움직이라는 호소와 다르지 않다.


  제대로 된 인문학은 판단을 각자의 몫으로 남기지 않는다. 그건 방기이다. 경제학의 부흥과 함께 대두된 자유지상주의나 그런 식으로 개인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존중할 뿐이다. 우리는 함께 질문을 던지고 공동의 절충안을 찾으며, 가치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때 판단은 토론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도출해낸 샌델의 궁극적인 교훈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시민적 역량'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점검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조언처럼 해결은 공통된 문제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은 뒷부분에 따로 마련된 각주가 많다. 그 뒤에 김선욱 교수의 해제가 실려 있는데, 샌델에 대한 여론의 오해를 갖고 있다면 그것도 풀 겸, 그리고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정확하게 짚어낼 겸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보다도, 사실 간단한 말이지만 'the good'을 선(善)으로도 재화(財貨)로도 번역할 수 있음을 지적해 독자들의 확장된 독서를 권장하는 김선욱 교수의 지적도 참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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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1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2





  작가는 책을 통해 세계를 말하며 독자와 만난다. 독자는 책을 통해 세계를 읽으며 작가와 만난다. 순수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작가의 고된 창작을 음미하며 세 가지를 얻는다. 책, 세계, 그리고 작가.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단계는 책을 액면 그대로 읽는 첫 번째 행위, 책에서 세계를 읽어내는 두 번째 행위, (상상 속의 장소에서) 작가와 만나 대화하는 세 번째 행위로 나뉜다. 물론 단계별로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나, 세 번째 행위로 갈수록 독서는 은밀해진다. 이 은밀함을 통해서만 '좋아하는 작가'라는 소중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나는 머지않아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전조를 느끼고 있다. 보물의 이름은 이탈로 칼비노이다.


  내가 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나는 책 읽기 계획을 세워놨다가 즉흥적으로 다시 목록을 만든는 일이 잦은 변덕쟁이이기도 하다. 별 고민 없이 생각해보면 책과 나의 만남은 정말이지 순전히 우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독자의 직감이라는 것도 있고, 일단 펼쳤을 때 초반이 재미있으면 지루해지는 부분까지는 일단 단숨에 읽어버리는 감각주의적(?) 습성 역시 한 몫 하는 것도 같다. 여하튼 칼비노는 어느 순간 나에게 들어와 있었다. '○○의 뇌 구조'라고 해서 누리꾼들이 패러디하기 좋아하는 뇌 단면으로 근래 나를 표현해보자면 분명 '칼비노'라는 부분이 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다섯 작품을 읽었다. 그간 이 공간에 리뷰들을 쭉 올려왔는데, 〈민음사〉에서 이현경氏가 번역한 '우리의 선조들(I Nostri Antenati)' 3부작과 『보이지 않는 도시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 이현경氏가 번역한 『우주 만화』이다. 주요 인터넷문고들, 국회도서관, 내가 다니는 대학교도서관을 검색해봤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소설은 여섯 개인 것으로 보인다. 남은 하나는 지금 읽고 있는 그의 첫 작품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Il sentiero dei nidi di ragno, 1947)』 이다. (그 외에 민음사에서 나온『왜 고전을 읽는가(이소연氏 번역)』도 그를 아는 국내 독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다. 직설적으로 밝히긴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타인의 평론을 먼저 읽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읽으며 부딪혀보자는 '주의'인 셈이다. 영어 번역본들은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어로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은 완역됐는데, 그걸 사보기에는 영어 실력도 모자라고, 직수입 도서가 워낙 비싸서 솔직히 읽을 엄두를 내기가 쉽진 않다.) 그의 젊은 시절(24세) 작품인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까지 읽으면 시기별 대표작들을 큰 범위로 훑어보면서 그의 작품론과 작가론에 대한 여러 대학논문들을 아마 어렵지 않게 공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일단 앞으로 번역될 그의 작품들까지 포함해서 여러 작품들을 반복해서 읽어 문학세계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칼비노와 만날 앞으로의 여정에 앞서 지금까지 그와 만났던 기억들을 졸문으로나마 회상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     *     *




1. 『반쪼가리 자작(Il Visconte Dimezzato, 1952)』


  내가 처음 읽은 건 『반쪼가리 자작』이다. '우리의 조상들' 3부작을 여는 작품이자, 개인적으로는 칼비노에게 단숨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도 이 작품과 만난 첫 순간을 기억한다. 간결하고 명확한 전개. 하지만 급작스럽고,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내용. 쉽게 말해 그 이후가 궁금해지는 전개 때문에 나는 책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이 작품은 선악(善惡)의 분명한 경계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구심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칼비노는 주인공 메다르도를 전쟁터에 내보내 대포 앞에서 두 동강을 내버린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난 그의 한 쪽은 의사가 살려 악한 메다르도가 됐고, 다른 한 쪽은 수행자가 살려 착한 메다르도가 됐다. 둘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소설에서도 명확하게 제시된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그러나 그런 행동을 보는 마을 사람들은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 위그노 교도들은 자신들의 안녕만을 기원하는 안이함으로, 마을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가 목 매달아놓은 시체들을 바라보며 악행의 결과가 그 장소에서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리고 그 시체들을 만든 기계의 장인 피에트로키오도는 자신의 안에 그런 기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사악함이 존재하진 않나 하는 불안감으로 선악 사이의 애매함을 드러낸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은 선하고 악한 행동 사이의 애매한 태도가 악함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어떻게 키우게 되는지, 도덕적으로 숙고해보게 하는 뼈아픈 역작이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주인공 메다르도를 둘러 싼 '일반적인' 인물들이 대변해준다. 우리는 맹목적인 선은 지나칠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때론 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둘은 사실 우리의 안에서 상당 부분 희석된 채 존재한다. 명확하지 않다. 마이클 샌델에 대한 지난 여론의 주목을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에게 제시된 과제는 '토론'이었으나, 우리는 희석된 선악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역량이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안타까운 사실만을 재확인했었다. 그 후, 그의 이름은 예상 외로 우리나라에서 빠르게 식어버렸다.


  나는 아직 이 '희석된 선악'의 관계에 대해 칼비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놀라운 의술로 두 메다르도를 다시 하나로 붙여버린 선의(船醫) 트렐로니의 행동과 말에 대한 의미를 더 생각해봐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필요는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나는 그에 대해 좀 더 집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을 들려주는 어린 '나'를 의무(善)와 도깨비불(惡)의 세상에 남겨두고 트렐로니가 다시 한 번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항해의 모험을 떠나버린 것, 그 '떠남'의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존재하지 않는 기사(Il Cavaliere Inesistente, 1959)』


  '우리의 조상들'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작품은 칼비노가 '존재'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통 우리는 존재를 단선적으로만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하거나, 혹은 '타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보통 둘을 종합해서 '거울'을 존재에 대한 사고의 매개체로 자주 사용하며,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칼비노는 훗날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p.70)"라며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상상을 통한 존재에 대한 사유 방법은 다양하다. 칼비노는 그 예를 몇 가지 보여주기 위해 다양하고 이상한 인물들을 만들었다.


  주인공이자 이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기사 아질울포는 갑옷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의지만 있다. 우리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나'라는 존재를 직접 상상하기는 힘들다. 분리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춥거나 더운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몸을 어쩔 수 없이 인식하게 된다. 플라톤처럼 정신의 이상적 상태를 아예 보이지 않는 하늘 위의 어떤 공간으로 상정하지 않는 이상(그것도 아니면 종교적 의미로 생각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둘의 분리를 직접적으로 상상하거나,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아질울포'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상상을 해본다. 가령, 이 기사는 육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 우리가 거의 매일 하는 행위, 즉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당연히 "삶의 끈들을 다시 엮는" 일상과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드는" 꿈 사이를 우리가 마음대로 왕래하는 사실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정규적이지 않은 것, 나태한 것,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 등의 행동도 용납할 수가 없다. 한 학자는 아질울포를 "거의 완벽한 무의식을 통해 관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자동화된' 인간의 상징(the symbol of the 'robotized' man, who performs bureaucratic acts with near-absolute unconsciousness)"이라고 평가했다.(「La seduzione del cavaliere inesistente」, 『Romansk Forum』, Margareth Hagen, 2002.02)


  두드리면 텅 빈 소리 밖에 나지 않는 갑옷이거나 그 안의 의지일 뿐인 아질울포도 이상한 존재인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 여러 존재들을 (우리가 보기에는) 흉내 내는 '구르둘루'도 칼비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굉장히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말 그대로 여러 존재가 된다. 따라서 자유롭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것은 분열증 같기도 하고, 동시적으로 여러 존재가 되고자 하는 현대인의 지나친 욕망 같은 것을 나타내는 듯도 하다. 그의 행동을 처음 봤을 때에는 속된 말로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그의 처지에 연민과 동정을 보내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구르둘루는 실존에 대한 위기이기도 하다.


  복수를 꿈꾸는 청년 랭보는 이해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수해야 될 대상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로 잰 것 같은 아질울포의 기사정신에 감명을 받는다. '롤모델' 같은 존재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아질울포로부터 랭보는 우리가 주로 하는 고민인 "나는 누구인가?"와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에 빠진다. 결국 그는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 앞에서 "나의 적이 맞는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한 번 실존의 문제 앞에 봉착하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쉽게 확신할 수가 없다. 해결책은 그냥 한 쪽을 믿어버리는 것뿐이다. 나는 그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한 흔적은 남기기 때문에 아질울포의 '의지'와는 다른 개념이다. 사랑은 실체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 말미에 가서는 아질울포가 사라지는 반면 랭보와 브라다만테, 토리스먼드와 소프로니아의 사랑은 남는다. 이 두 커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남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지는 건 순전히 아질울포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칼비노의 개입이 아닐까 하는 부분, 그러니까 글쓰기의 어려움을 '테오도라'라는 서술자의 입으로 호소하는 부분이 평소 글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글은 상상으로 쓴다." "영혼구원의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기록과 글쓰기는 다르다." 이 세 가지 호소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3. 『나무 위의 남작(Il Barone Rampante, 1957)』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분량 상 가장 많기 때문에 담고 있는 내용도 많다. 그러나 복잡한 소설은 아니다. 모든 것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상적으로 종합된다. 주인공 코지모가 하늘에서 나타난 기구를 타고 돌연 사라져버리는 장면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픽션들 중에서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엔딩컷'이었다. 문득 하늘을 쳐다볼 때, 이따금 코지모가 매달려 있을지도 모를 기구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는 나의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다.


  12세 때 '지상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는 동생이자 서술자인 비아조가 말했던 것처럼 은자(隱者)이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 살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땅으로 굽어 있어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책을 많이 읽으나 책에서만 생각을 그치지 않으며, 명사들과 편지로 교분을 쌓지만 명예에서만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식지 않는 계몽주의 열정은 당대 '프랑스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나란히 놓여 칼비오의 평가를 받는다. 아니, 평가를 받는 쪽은 실제 일어난 '형식주의적인 혁명'이다. 19세기는 "젊은이들의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은 모두 재가 되었다.(p.396)"고 묘사되며, 그 재가 된 시대에서 기인(奇人) 코지모마저 떠나자, 그의 마을 옴브로사에서는 외래종에 밀려 나무들이 사라진다. 그가 타고 다녔던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독자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각자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혹은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미지근한 절망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겠다.






4. 『우주 만화(Le cosmicomiche, 1965)』


  김칫국 잘 마시는 나는 벌써 '내년에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으로 두 권을 골라놨는데, 『우주 만화』가 그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시절 나를 좌절에 빠뜨렸던 가오싱젠(高行健)의『영혼의 산(靈山)』이다.) 이 픽션은 과학과 상상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크프우프크(QFWFQ)'라는 초시간적 존재(혹은 우주의 시간에 해당하는 존재)을 사유하게끔 한다. 때문에 『우주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과학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든 체계들, 예컨대 천문우주학이나 진화론 등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은 '제 2의 지구'가 발견될 것이라는 최근의 희망에 부풀어 여러 우주 사진들을 살펴보거나(그러나 '제 2의 지구'로 가장 근접할 것이라 예상됐던 행성 HD 189733b은 사실 항성과 너무 가까워 기온이 매우 높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풍이 부는 목성형 행성임으로 밝혀졌다. 이 행성은 지구로부터 63광년 떨어져 있으며, 허블 천체망원경의 데이터를 분석해 NASA가 어제(2013년 7월 11일) 위와 같은 공식 발표를 했다. 링크를 해둔다. http://www.nasa.gov/content/nasa-hubble-finds-a-true-blue-planet/#.Ud_ojzsqzgA),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과 나의 존재에 대해 가볍게나마 고민을 한 사람들을 위한 우주적 사유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 사실만으로 이뤄져 있진 않다. 최초의 존재들이 우주에서 놀이를 하거나, 달과 지구 사이를 장대 하나에 의지한 채 멋지게 점프해 이동하거나, 혹은 기중기가 달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과학과 픽션 사이에서 우리는 사유의 공간을 얻는다.


  내가 칼비노에게 빠져버린 결정적으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섬세함, 깊은 통찰력, 엄청난 규모를 다루는 상상력이었다. 문제에 대한 집착이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 이렇게 표현해놓긴 했지만 내가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뿐더러, 대체 통찰력이 깊다고 했는데 얼마나 깊은 것인지 가늠하지도 못할 정도로 『우주 만화』는 방대한 작품이다. '크프우프크'라는 가공의 존재로 여러 단편들을 연결시켜 우주의 다양한 시간대를 훑고 지나가는데, 각 시간대마다 깊은 의미들이 별도로 존재하는가 싶다가도 그 의미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모이는 것도 같다. 원시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진화의 근본(즉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의 '경계적 존재'들로부터 시작해서 공룡, 그리고 그 후의 존재들로 이어지는 사유)을, 천문학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시간과 공간의 근본(여기에는 '창조'나 '시원(時原)'에 대한 위트 있는 사유도 포함)을, 생물학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우리 몸속의 미시적 근본을 확인해볼 수 있다.






5.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 1972)』


  이 책은 이번 주 리뷰에서 여러 이야기로 다뤘기 때문에 길게 뒤돌아보진 않겠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유도 깊다. 시적(詩的)인 내용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단비와도 같을 것이다. 55개의 도시(이현경氏는 55개의 작품이라 했지만,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랄라제'라는 도시가 따로 묘사되므로 56개의 도시이다.)에서는 각 장(章)의 도시를 형용하는 표현들에 대한 사유들이 등장한다. 길어봤자 한글 번역으로 채 5~6페이지도 안 되는, 대부분은 1~2페이지에 그치는 사유들이지만 그만큼 압축적이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하루 1~2페이지만 읽어도 자신의 글로는 10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이니까. '55'은 결코 작은 수가 아니다. 나처럼 그 많은 도시들로 이뤄진 지도(나는 그것을 '삶의 지도'라 생각했는데)를 그리다가 처참하게 실패할 수도 있고, 애당초 지도 그리는 것을 포기하는 현명함을 발휘해 칼비노의 사유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도 있다.


  다 읽고 나면 "도시(이 '도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인생의 가치들을 무수히 많이 대치시킬 수도 있다.)는 무엇이 구성하는가?"에 대한 사유의 기억보다는 "무엇을 우리는 잊고, 무엇을 우리는 모르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의 시선을 안개 속으로 돌려놓는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비록 폴로가 황제에게 여러 형상들, 관계들, 그리고 의미들을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더라도 우리에게는 굳이 그것이 '도시'라는 한정된 기호에 그치지 않아도 된다.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 작품의 제목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보이지 않는(invisibili)'이 된다. 우리가 평생 추구하며 산다는 어떤 것들. 그 인생이 고되고 때론 지옥처럼 느껴지더라도 칼비노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빌어 힘 있는 어조로 "현실은 지옥이지만 당신은 지옥이기를 거부하라. 지옥이 아닌 부분을 찾으라."라고 말한다. 이 어조는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독자들은 그 많은 도시들이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다. 그 환상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방향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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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저는 이제서야, 이 글 읽고나서 이탈로칼비노 (사기) 시작했어요. (읽기가 아님) 일단 한 권 읽어보려고. 전에 추천한 게 3부작 먼저 시작하라고 했었는데.. 저 뭐샀게요? 이건 저도 다 읽으면 그때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탕기 2013-07-18 11:59   좋아요 0 | URL
음... 『반쪼가리 자작』인가요? :) 잘 모르겠네요.
저는 잠시 소설은 서재에 꽂아두고 인문학 책들에 빠져 있습니다.
아. 나중에 읽으려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도 사뒀고요.
칼비노 읽으시면 리뷰 써주세요. 읽으러 갈게요. ;)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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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0



  독자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짚어내는 육감이라고 할까. 아쉽게도 이 놀라운 능력으로도 작가의 깊은 생각을 정확히 꿰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책을 잡는 순간 손으로 느껴지는 표지의 재질, 번역되거나 번역되지 않은 제목, 서문의 첫 마디, 책의 두께,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프로필이나 작가의 사진 등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융화되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우리는 이렇게 돌려 말하곤 한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는가?" 둘은 결국 같은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의 관심사에서 빗겨나간 것 같은 책을 귀신 같이 솎아 내곤 하지 않는가.


  나와 같이 인문학(최근 국내에 『인문학의 미래(원제 : The Future of the Humanities)』로 소개된 영미권의 저명한 인문주의자 월터 카우프만의 분류에 따르면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이렇게 여섯 분야가 인문학에 포함된다.)에 발의 팔 할 이상을 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책을 고르는 직감은 꼭 필요한 능력임을 넘어서서 일종의 미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책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얻는지는 더 이상 이 직감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인문학은 직감(과 영감)의 영향을 상당히 받으면서도, 그 안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학과는 또 다른 예리함과 질서정연함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명확한 해결책 없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며 매 순간마다 대안을 제시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이 쉽게 다루기 어려운 분야로 남아 있다.


  하기야 인간과 인간사와 삶을, 그 자체로도 정의하기 힘든 그것들을 퍼즐 조각 맞추는 것처럼 딱딱 눈에 들어오게끔 파악하고자 하는 것, 그건 치기 어린 욕심일 뿐이다. 그런 욕심은 감상적으로 끝나곤 한다. 건설적인 인문학은 우리에게 여러 의미를 제시한다. 한 두 개로 끝나지 않는 의미의 열거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우리를 권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인문학적 고민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지는 호기, 뇌의 튼튼한 벽, 그리고 '오래 가는 건전지'를 장착한 감성이 필요하다. 우스갯소리였으나, 실제로 인문학은 우리의 정주(定住)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노마드(nomad, 유랑자, 유목민)'의 개념을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방랑, 유랑, 혹은 여행. 어쨌든 움직여야 하는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에 있어 우리는 지도를 그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예견하며, 기준과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지도가 정말이지 눈에 아주 잘 들어오도록 방에 걸어두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한 작가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도시들이 그려진, 그러니까 존재했는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전혀 없는 도시들로 이뤄진 지도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누가 그것을 들여다볼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하나 둘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 싶을 때 그 지도를 몰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지도에서 그들이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더 의미 있는 도시를 찾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눈에 보이는 도시와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 중 한 명인 나의 이야기를 이제 써보려고 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에 대한 사변이다.




*     *     *



  이 소설은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만 이뤄져 있다. (사실 이따금 칼비노의 목소리가 끼어들기도 하나, 매우 드물다.) 대륙을 다스린 쿠빌라이 칸과 대륙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 황제는 이 베네치아의 젊은이보다 어림잡아도 마흔 해를 더 산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이 저물어가는 시기, 그리고 그의 제국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에 젊은 베네치아인은 (연대상으로도 뒤죽박죽인) 이상하고도 기이한 도시들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게 된다. 그의 보고는 일반 사신들이 황제를 알현하며 쏟아놓는 사무적이고 원칙적인 보고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말해 그의 보고는 문학적이며,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감상적이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도시의 실존 여부를 차치하고 오로지 폴로가 소개하는 도시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든다. 칼비노는 폴로의 입을 빌려 총 55개의 도시(여기에 각 장(章)을 열고 닫는 황제와 폴로의 대화록들에 등장하는 유일한 도시, 즉 달이 쉬어가는 도시 '랄라제'를 포함하면 56개)들을 그려낸다. 이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섬세함', '교환', '눈', '이름', '사자(死者)', '하늘', '지속', '숨겨짐'이라는 큰 의미망에 각각 속해 있다. 도시의 이름이 너무 많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책을 덮었을 때 남는 것은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로, 혹은 전체로 뒤섞여 의미가 희뿌옇게 남은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도를 그려보고자 했다. 도시의 이름을 적고, 그 도시를 설명하는 폴로의 말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다 생각된 것들을 밑에 길게 적었다. 칼비노가 특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유난히 길게 썼거나, 어떤 의미에 대해 반복적으로 묘사(집착)하고 있다고 느껴진 것들은 '※'로 따로 적어두었다. 이렇게 A4용지 8장의 짤막한 정리본을 만들고, 그 위에 펜으로 이것저것을 연결하거나 덧붙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지도 그리기'의 끝을 보려고 했다. 나는 이 책을 완독했을 때, 결코 "완독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았고,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읽었다고도 할 수 있고, 읽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삶을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는 것과 그 무엇이 같지 않단 말일까.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한글로 번역해도 본문이 200페이지가 겨우 넘을 정도의 짧은 소설이다. 하지만 칼비노가 그의 문학적 성숙기에 일기처럼, 그리고 시처럼 남긴 단편들을 조합해 펴낸 책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을, 수많은 나의 오만들 앞에서 선언해야 했다. 동의하겠지만, 마음이 아픈 와중에 실패를 시인한다는 건 적잖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아픔으로부터 나는 또 한 번 '인문학적 치유'를 실감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칼비노가 이 책을 쓰고 난 뒤, 그렇게 희뿌연 연기처럼 남아버린 이 작품의 수많은 의미들을 과연 하나로 꿰찼을까? "유레카!"를 외쳤을까? 알았다면 그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에는 분리된 채 그 문장, 혹은 문장 몇 개만으로도 충분히 아포리아로 기능할 수 있는, 두 번 세 번 고쳐 읽어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문장들이 널려 있다. 몇 개 예를 들어볼까? 이런 것들은 어떤가?


  "모든 도시들은 그것이 마주 보고 있는 사막으로부터 자신의 형태를 부여받습니다.(p.27)"

  "여행자는 나무와 돌들뿐인 길을 따라 며칠을 걷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물에 시선이 머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시선이 머무는 경우는 그 사물을 다른 사물의 기호로 인식했을 때뿐입니다.(p.21)"

  "거짓은 말이 아니라 사물 속에 있습니다.(p.79)"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p.70)"

  "사람들이 말하는 도시는 존재에 필요한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도시 자리에 존재하는 도시는 존재감이 그다지 없습니다.(p.87)"

  "살다 보면 자기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 가운데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날이 찾아오게 돼. 그러면 마음은 다른 얼굴, 다른 표정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거기에 옛 형상을 새기고 각 얼굴에 가장 적당한 가면을 찾게 되지.(p.122)"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p.40)"

  "제국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이 자신의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 탐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아직은 언뜻언뜻 보이는 행복의 흔적들을 자세히 찾아나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측정해 보는 겁니다. 폐하의 주위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으시다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셔야 합니다.(p.76)"


  이렇게 진리로 구성된 예시들을 독서 노트의 구석에 깨알 같이 적어놓으면 밥 한 술 덜 먹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냐며 포만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포만감은 가짜다. 우리의 (정신적) 위(胃)에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소화될 수 있을까? 위액이 식도로 역류할 정도로 굶주린 상태에서, 그것이 일종의 끓어오르는 열정 따위가 아닐까 착각하며 자신의 주린 배를 도도하게 쓰다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도대체 칼비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폴로와 칸의 의미심장한 대화들, 컴퓨터 바탕화면이나 스마트폰 배경에 넣어 매일 확인하고 싶은 매력적인 아포리아들 사이로 나 있는 단 하나의 뾰족한 바늘을, 나는 진심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에 찔려 나의 공복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려줄 한 줄기의 피가 나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흘러나왔으면 했다. 이 출혈의 아픔이 나를 진리의 숲 속에서 탈출시켜 숲 바깥의 냉정한 응시자로 만들어줬으면 했다. 나는 A4용지 여러 장에 문자로 적어놓은 내 지도를 바라보다가 그 바늘 하나를 발견했다. 발견의 기쁨이 우선 찾아왔다. 그러나 발견한 것은 나를 이 책을 읽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놨다. 나는 지도를 한 바퀴 돈 셈이었다. 유랑과 방랑과 여행과, 여하튼 그런 '이동'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하듯. 조금 긴 칼비노의 문장이다. 나처럼 천천히 곱씹어보길 바란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기억 속의 안개나 건조하고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도시의 상처에 딱지를 앉게 하는,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에 의해 부풀어 오른 스펀지, 움직이고 있다는 환영 속에 빠진 화석화된 존재들을 가로막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다. 당신이 여행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p.129)"


  칸과 폴로의 대화가 전부인 줄 알았을 독자들은 '당신'이라는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충격을 느끼게 된다. 칼비노가 각 장(章)을 열고 닫기 위해 마련한 앞뒤 공간의 글에서 유일하게 '당신'이라며 독자들을 겨냥한 부분이 이곳이다. 아, 그리고 그 앞 문장의 이 단어, '뒤범벅'이 갖고 있는 혼탁함, 무질서, 무기력, 불가피 등등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져버리는가 말이다. 결국에는 '불완전'이었다. 그리고 '지옥'이었다. 내가 칼비노에게 직감적으로 묻고자 했던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완전의 추구, 유토피아의 바람과 같은 오만방자한 요구를 현명한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직시하도록 한다. 안개이다. 지옥이다. 뒤범벅이다. 혼탁함이다.


  남은 것은 두 가지 선택뿐이다. 칼비노는 말한다. 지옥의 일부분이 되어라. 그렇게 하기 싫다면, 조금의 용기를 더 내어서 "지옥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p.208)"하라. 그렇다면 그 눈은, 지옥이 아닌 것을 감별해낼 수 있는 눈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제목도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데, 도대체 폴로는 그것들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칸은 폴로에게 이상향으로 가는 항로를 아느냐고 묻는다. 폴로는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있다며 세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나머지 것들과 뒤섞인 단편들,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는 순간들, 누군가 보내지만 그걸 받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호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도시를 한 조각 한 조각 맞춰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부적절한 풍경의 한가운데로 나 있는 지름길, 안개 속에서 반짝이는 햇빛, 오가다 만난 두 나그네의 대화면 충분합니다.(p.207)"


  무엇 하나 '완벽'이라는 꼬리표를 단 것이 없다. 의심스러울 만치 불완전한 것들이며, 별로 신뢰를 주기 힘든 것들이다. 지름길이 항상 대로(大路)와 대로 사이로 나 있어 우리를 빨리 이동시킬 거라는 믿음은 위험하다. 지름길은 또 다른 샛길과 연결되어 있기 십상이므로 우리는 목적지를 잃고 지름길들의 거미줄 속에서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안개 속의 햇빛은 어떤가? 광자(光子)를 분산시키는 안개의 작은 입자들은 빛에 대한 불확실성, 혹은 빛을 내거나 빛이 비추고 있는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심어주기 충분하다. "오가다 만난 두 나그네의 대화"는 전문성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거면 충분하다고 칼비노는 말한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끝에 가서 만나게 될 것"이 바로 뒤범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결국 불완전을 주시하고, 불완전을 상기하며, 그것을 바라보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가 야기하고 겪게 될 수많은 문제들을 방지하는 것이다. 한 편의 인생이 연극된 극장에서 막이 내려갈 즈음, 우리가 서글퍼 울지 않고 연극의 주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세상을 한 바퀴 돌았다고, 지도의 모든 도시를 알 것 같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여정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을 때, 생각해보니 나는 아주 슬펐던 것 같다. 오후 내내 그랬다. 하지만 한창 감정이 고조될 이 새벽에, 나는 얼핏 보면 칠흑 같으나 실은 완전히 어둡진 않은 밤의 미숙한 암흑을 보며 불완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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