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9



  진은영 시인은 문학을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이라 하였다. (진은영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내가 시를 썼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로 모여드는 중이라 생각했다. 조금 과장해서 어느 시에다가는 쏟아진다고도 표현했으나, 그건 거짓이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지만 내가 그것을 긁어모아놓은 뒤에 더럽고 아름답고 냉랭하고 찬란한, 만상의 것들을 정리하려 욕심을 부린 것,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길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나에게는 ‘우리’라는 단어는 없었다. 나는 홀로 길을 잃고 1초 앞을 두려워했다. 그런 막연한 것들 뒤로, 지금 나는 구체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길 아닌 곳에 정지해 있다.


  주변에는 문학 때문에 사춘기를 잘 보냈다고 옛 추억을 나름대로 회상해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시가 나를 구원해줬다는 것, 나는 알 수가 없다. 평범한 족적이라고 보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솔직한 마음으로 그때는 시를 통해 구원을 받고 싶은 마음도 컸었다. 그러니 지금 와서도 시와 구원을 구태여 종종 연결해보는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로부터 현재의 체증을 시원하게 (혹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풀어보려고 시도한 모든 이들은 나의 이 무모한 기대를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진학 이후로 오랜 시간 시를 쓰지 않아 인생이 이리도 꼬여버린 것이 아니냐고 간혹 의심을 하기도 하니, 이건 거의 병증이라 해야 옳겠다.


  진은영 시인은 문학을 분명한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중학생 시절 논과 가까운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때 한밤중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창문을 열면 시끄러울 정도였고, 더운 날에는 더욱 요란했다. 비온 뒤 물이 불으면 밤은 개구리의 세상이었다. 그만큼 분명하게 들린다. 더군다나 상황은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라고 했으니,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그리하여 인정은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때에 얼마나 개구리 울음이 더 잘 들렸을까. 절실하게 들렸으리라 생각해본다. 그 소리는 손으로 잡을 수 있다. 물론 그건 마음에 달린 손이요 도구이겠으나, 그렇다고 촉감이 없을까. 나도 그렇게 문학을 손에 쥐었던 듯하다. 놓아버리고 나니, 지금은 별로 손에 쥔 것이 없다. 내 손은 오래도록 손만 움켜쥐고 있어서 지금은 그냥 주먹이 되어버렸다.


  반년을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이번에는 시를 배우게 되었다. 어떤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으며 예술을 배운다는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다. 저녁을 알뜰히 먹고 나서는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 제 1장을 읽어 넘겼다. 시를 아는 사람이 시를 모르는 사람보다 무엇을 더 많이 알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 대략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으며 조금은 필사도 해봤는데, 마음이 심란했다.


  한편으로는 내 안의 시 세계를 다시 주무르기 위한 예비동작의 고통이 느껴졌고, 다른 한편에서는 타인의 시를 많이 탐닉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그렇지 않은가. 시를 읽는 것은 고된 일이다. 시인은 헛된 글을 쓰지 않는다. 언제나 가장 깊다.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머리가 물에 잠기고, 연이어 마음이 따라 들어간다. 돌이켜보니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은 다음에는 며칠을 그 장면만 생각해도 마음이 미어졌었다. 그 안에서는 ‘나’도 만나게 되니,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도 부려본다. ‘시인의 시선’이라는 것과 조우하면서 나도 그렇게 보기 위해 삶의 자세를 바꾸려는 욕심. 지금의 나는 감히 시인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눈을 감은 채 메말라 있는 시선으로는 무엇 하나 깨우쳐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게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반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는 조금 더 느리고, 바라보고, 자주 멈추고, 울고, 웃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된다. 오래도록 주먹으로 살아온 손아귀가 힘의 긴장을 서서히 풀고, 손의 자연스러운 자세로 돌아가 틈을 만들어간다. 개구리 울음이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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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7



  오랜만에 일기들을 쭉 들쳐봤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글쓴이의 정체를 모르겠다. (바로 나잖아.) 대체 누가 이런 글을 썼을까? 그 날의 감정을 떠올려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며(혹은 불가능한 일이며), 글을 쓰던 과정을 기억해내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혹은 훨씬 더 불가능한 일)이다. 일기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성은 어쩌면 추억의 회상에서 느껴지는 아련함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한다. 행복하다는 거다.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일상에서 또 언제 찾을 수 있을까. 좋다. 참 못 쓴 글, 참 못 그린 그림 같은 것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나는 벗어버린 껍질, 혹은 지금의 껍질 안에 들어 있는 양분들을 바라본다. 든든한 토대 하나를 이리저리 손보는 느낌이다. 감촉도 좋고, 마음도 뿌듯하다.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일기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런 회상 이외의 의미를 갖는다. 굳이 그걸 ‘일기’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예전에 쓴 글을 모두 ‘일기’라 통칭해도 상관없다. 글 쓰는 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그렇듯 ‘예전에 쓴 글’이다. 글은 쓰자마자 사라지는, 아니, 쌓자마자 무너지는 해변의 모래성과 비슷하다. 이 비유가 적절한 까닭을 글쓴이들은 아마 모두 마음속으로 느낄 것이다. 방금 쓴 저 위의 문단을 하나씩 읽어보니 내가 쓴 글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듯하다. 분명 나에게서 나온 문단이지만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든든한 토대 하나를 손보다가 문득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잘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렇다. 글을 쓰기로 작정을 했다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글을 믿어야 한다. 처음에는 아주 잘 써진다. 술술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자신이 글을 아주 잘 쓴다는 착각도 하게 된다. 아니, 착각이라는 건 나중에 깨닫게 되고, 일단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글을 몹시 신뢰하게 된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꽤 오래 가는 편이다. 왜냐하면 우린 글로 풀어내야 하는 무궁무진한 소재, 즉 ‘나’라는 대상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풀어내든, 나를 거쳐서 해석을 내놓든, 정말 많은 글을 쓸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새로 알게 되면 글을 한 편 쓰고, 나중에 그 지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면 또 다시 쓰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토대 위에 높은 탑을 쌓아간다. 삐뚤어지게 쌓아도 쓰러질 염려가 없으니, 세계 유수의 마천루 부럽지 않게 높아진다. 정신의 세계이다. 중력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러다가 사건이 발생한다. 너무 뜻밖의 순간에 일어난 예상외의 사건이다. 우리의 탑이 무너진 것이다. 중력이 없으면 무너질 일이 없다. 건축전문가들에 따르면 잘 쌓은 건물은 좌우 진동, 쉽게 말해 지진이 나지 않는 이상 세월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의 세계에 쌓은 우리의 탑이 무너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원인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 자신이 정신의 세계에 중력을 들여온 것이다. 생각의 탑에 있는 재료들이 본래 무게를 되찾는 순간, 우리는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의 든든한 토대가 순식간에 제 머리 위에 놓인 모든 것들을 땅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약간의 비유였는데, 여기서 ‘중력’은 ‘의심’을 뜻한다. 글을 그냥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 글을 쓰는 존재, 글을 쓰고 난 후의 결과, 그것의 연쇄 등을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글에 대한 자신감, 혹은 글에게 갖고 있었던 신뢰, 심지어는 사랑마저도 서서히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걸 느끼게 된다. 이것은 분명 글쓰기의 삶에 있어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난 지금 이런 상태에 와 있다. 차려서 내놓은 것을 두고 누군가에게 “여기 내놓았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내가 쏟아낸 것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으면 그/그녀에게 “다시 담아야 할 것들도 많네요.”라고 말하게 된다. 글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 즉 어떤 매체나 기술이 아니라 옷을 홀랑 벗고 있는 나 자신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놓으면 창피하고, 쏟아내면 다시 담고 싶다. 그래서 내놓고 쏟아낸 채로 남겨둬야 하는 글의 피치 못할 ‘매체’적 특성이 늘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지 않다 보면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이 내 안에 생각보다 오래 남아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꺼내지 않거나, 읽지 않거나, 혹은 남기지 않으면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고, 혹은 내가 기억하지도 못할 것 같은 그 초조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풍부함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의문이 든다. 굳이 읽고 써야 하나?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읽고 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뜻하기 위해 통칭 겸 사용한 표현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읽고 써야 한다. 그 일을 참으로 부단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에 집착하거나, 자신(을 넘어서는 자만)을 하거나, 남들이 다 그러하듯 기뻐하거나 슬퍼할 일이 생각보다 많은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면 선뜻 “많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일단 글쓰기를 멈춘 상태에서, 그리고 읽기를 멈춘 상태에서 우리는 이 질문의 중요성을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지점에 서 있다. 한때의 글쓰기에 대한 광기, 한때의 읽기에 대한 광기. 집착이든 광기든 짝사랑이든. 뭐든 간에 이제는 조금 덜어버린 자세. 나는 책과 책 사이에, 문자와 문자 사이에 원래부터 있었던 그 원시적 공간에 대해서 예전보다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이것은 ‘멈춤’이라는 자세에서 내가 얻어낸 일종의 ‘특혜’다.


  우파니샤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들은 행위 자체만 알 뿐 행위에 얽매임으로써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 행위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통 속에 빠지리라. 다시 아래로 떨어져버리리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린 필시 질문 하나와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읽는가? 시작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글쓰기란, 읽기란, 혹은 둘이 결합된 삶이란 다 그렇다. ‘무엇’이 아닌 ‘왜’를 애당초 질문해놓고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 글쓰기와 읽기를 통해서 지난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자상(自傷)을 일삼았고, 그리하여 지금은 또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겉멋에서 시작한 글쓰기와 읽기는 남부럽지 않은 높이를 자랑하기 위해 수직으로 치솟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지렁이처럼 땅 위를 꿈틀꿈틀 느릿느릿 기어가는, 그 자체로 삶인 그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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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4-01-2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탕기님. 우연히 들러서 읽게 된 글인데 깜짝 놀랐어요. 저의 생각과 비슷한 지점이 너무 많네요.
반가운 마음에 인사부터 남깁니다. 저는 달사르 라고 합니다.

예전에 어떤 공간에서 제가 썼던 여러 글들을 읽고 댓글을 남기신 분이 계셨어요. 자신의 감성과 공감되는 지점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라 글을 남긴다구요. 그 분은 워낙에 글을 잘 쓰시는 분이어서 저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 만으로 영광이었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지요. 그런데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그 분이 공감을 했기에 그런 표현을 쓰셨나 늘 궁금했었거든요. 저 또한 그런 느낌을 알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구요.

그런데 오늘에사 그 느낌을 알 것 같애요. 탕기 님 글이 어투는 다르지만 내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제 생각과 흡사해서요. 저의 고민 지점도 늘 같은 지점이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몇 달이고 글 쓰기를 막무가내로 중단해버리는데요. 지금도 중단 지점에 있는 중인데 이제 슬슬 다시 글을 쓰려고 준비운동을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끄적여보는데 아직도 잘 안 되네요. 해서, 제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보고 있으려니 그때의 고민, 그때의 감정 등이 여전히 생생한데 그것이 활자로 쓰여진 글은 왜그렇게 어색한지요. 저것이 내 생각이란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구요.

...행위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통 속에 빠지리라..공감가는 문구입니다. 그 고통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글 쓰기를 중단한 지금, 그 고통이 어느 공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겁 먹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다시 나아가야겠어요. 지렁이가 되어서 말이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탕기 2014-01-30 22:4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달사르님. 지렁이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저는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는
멈춰 있는 것에 대해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것이겠군요.
전자는 어쩌면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달사르 2014-02-02 12:22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제가 견디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표현 말고 다른 단어를 쓰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워낙에 제가 견디는 행위를 오랜간 해오다 보니 다른 단어를 찾지를 못하겠더라구요.
생각은 이제 변하고 있는 와중인데 단어가 아직 변하지 않은 걸 보니, 아..내가 과정 중에 있구나, 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탕기 님의 의도하시는 말씀이 뭔지 이해가 되어 무척 기쁩니다.
멈춰 있는 것에 대해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 아직은 머리로만 겨우 이해되는 수준이지만 조만간 몸으로까지 이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 명절이 이제 끝나가네요. 푹 쉬셨는지요.

탕기 2014-02-03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달사르님께서 글과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추구하고 계신지 이해가 되어 기쁩니다.
또한 단어의 변화로 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글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계셔서 글과 삶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는 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설 연휴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갑오년이 시작되었는데, 뜻깊은 2월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1월 21일



  당신은 붉은빛과 푸른빛이 멀어지는 광경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당신은 누군가가 이별하는 모습을 보면 머릿속에 무엇이 그려지는가?



  그것이 둑 옆에서의 마지막 키스였소—

  지나간 일.

  Das war ein letzter Kuss am Kai -

  vorbei.


  강에서 떠나 바다로 당신은 가버렸군요.

  Stromabwärts und dem Meere zu fährst du.


  붉은빛과 푸른빛은

  멀어졌습니다……

  Ein rotes und ein grünes Licht

  entfernen sich.



  이것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이라는 시의 전문(번역 김주연)이다. 서로 다른 두 빛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멀어지는 빛 사이로 상상을 뛰어넘는, 그리하여 우리도 때론 감당하기 힘든 공허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별은 (그리고 상실은) 진실로 공허에 가까우리라. 그 안은 아무 것도 없어 어두컴컴하다. 그 안에는 빛이 가득해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도 있다. 또한 이상하리만치 수많은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상태가 어떻든 간에, 우린 그 어떤 것도 잡을 수가 없다.


  이별은 촉감의 상실이다. 맞잡은 손 사이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과 온기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이고, 상대의 입술을 느낄 수 없어 나의 입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다. 우릴 억울하게 만드는 건,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사라지지도, 멸망하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공허는 우리를 추억 속으로 몰아넣어 무형을 만지게 하며, 이윽고 우리에게 “네가 만진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이었다.”라고 선언한다. 우린 낮에도 갑자기 꿈에서 깨며, 그와 반대로 밤에는 한숨도 잘 수가 없다.


  그러나 이토록 강철로 된 바늘과 같은 나날의 감정들이 ‘붉은빛’과 ‘푸른빛’이라는 두 단어를 만나 아름다운 빛의 잔상을 만든다. 아름다움의 세계가 슬픔의 세계보다 훨씬 거대하기에 우리의 상실이 마치 여신과도 같은 저 바깥 세계의 자태 속에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형상이 된다. 당신이 여물은 상실을 한 입 베어 물어 막 울기 시작한 무렵부터 당신이 상실의 그림자 뒷면으로 건너가 조용히 앉을 때까지, 우리는 그 긴 파노라마를 앞뒤로 감아보며 함께 울고, 그리고 아름다움을 찾는다.


  상실을 상실에 그치게 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제 영역 안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 두 세계 사이의 세포막 사이로 감정의 입자들을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볼프강이 한 일이리라. 상실에서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움에서 상실로 이동하는 어떤 작용.


  둑 옆에서, 우리의 마지막 키스는 항상 그 장소를 명확하게 기억하도록 한다. 상실이 돌이킬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강에서 바다로 떠난 그/그녀는 그 넓디넓은 세계에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나의 것이, 너의 것이, 혹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있고(혹은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고), 우리에게 묶여 있던 존재의 탈출은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 속에(혹은 단 하나의 필연 속에) 놓이게 된다. 바다는 세계의 크기일 수도, 혹은 상실의 크기일 수도 있다.


  바다는 우주가 되고, 붉은빛(노을)과 푸른빛(바다)이 멀어지며 진짜 우주가 밤하늘로 내려온다. 상실과 밤, 밤과 상실. 이별과 별자리, 별자리와 이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러나 공허 속에서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에 대한 유일한 단서, 실마리. 그렇게 우리는 공허를 실체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무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볼프강의 저 짧은 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우리의 실체가 몇 안 되는 단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별한 자들에게 물어보라. ‘둑 옆’은 유일한 장소, ‘키스’는 유일한 감촉, ‘강’과 ‘바다’는 유일한 배경, ‘당신’은 유일한 존재, ‘붉은빛’은 유일한 해, ‘푸른빛’은 유일한 달, 그리고 ‘멀어짐’은 유일한 척도가 된다.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에, 우리는 위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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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1-2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고, 캬~ 해설은 더 좋네요. 탕기님 감성은 정말. 예나 지금이나 솔직하고 서정적이에요.
건강해요!

탕기 2014-01-27 20:07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 아이리님^^
늘 솔직하게 쓰고자 글 앞에서 분투합니다. 요즘은 예전보다 좀 더 어루만져주는 편이에요. 그래도 글이란 게 늘 드러냄이 부족하고, 지우거나 버리긴 아깝습니다. 다행이도 쓰고 지우는 글이 많아졌어요.
건강하세요!
 
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2013년 12월 15일



  가을을 맞아 가족과 길상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라 고풍스럽진 않았다. 아담한 수행공간들은 (모양으로 보든 배치로 보든) 현대적이었고, 대웅전은 마치 방금 머리를 깎은 동자승 같았다. 그러나 이 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나 사찰이 갖는 의미 이상으로 중요한 공간이 있다. 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마당의 구석에 단아하게 핀 예쁜 꽃 한 송이가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당기듯. 길상사에 핀 꽃은 사상의 꽃이다.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3년 전에 타계한 법정 스님의 꽃. 무언가를 갖거나 지갑을 열어야 존재의 생동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비우고 덜어내라 가르친 그의 ‘무소유’가, 별로 가진 것 없이 세상을 떠난 그의 영정에서부터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 들어가서 법정 스님이 임종을 맞이할 당시 갖고 있었던 유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눈으로 세어보았다. 몇 안 됐지만 그나마 있는 것들도 모두 헤진 채 그간 얼마나 만졌고 얼마나 스쳤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스님을 기린다는 이유로 사찰 측과 불자들이 정성들여 갖다 놓은 스님의 출간물이나 ‘스님의 삶’에 대한 설명문, CCTV 등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한 누군가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받는다. 지고지순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다면 그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법정 스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스님과 나의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나는 반복해서 물었다. 문자로 드러난 그의 사상은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법정’이라는 단어로 우상화된 이미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의 꽃은 유리창 건너편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된다. 무소유는 멋진 것으로, 하지만 우리의 소유는 불가피한 것으로 못을 박으면서.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재고하라고 해도 나는 확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우리에게 “너는 자꾸자꾸 가져도 돼. 안 갖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갖게 된다고. 남의 것을 빼앗아도 별 상관은 없어. 그렇고 그런 세상이니까.”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건 매한가지이다. 예수는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사랑’이라 표현했고, 그보다 앞서 싯다르타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열반을 찾았다.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위대한 선인(先人)들을 모티프로 삼는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했으면서도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나간 이들이었다. 도대체 “갖는다.”라는 것이, ‘소유’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지녔기에 우리에게는 때때로 금기로까지 지목되는가. 소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 속 현대에서 아주 강력한 테제로 주목을 받아왔다. 무소유도 그런 외침 중 하나이다. 우리의 의지박약이, 혹은 문제의식의 부재가 고질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늘 같은 패턴이기에 일각에서는 개인의 변화로 사회의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변화의 중심을 개인에게 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얼마나 거대하며, 대부분 나와 얼마나 무관한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굉장히 멀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이 갖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무소유를 비롯한 변화의 테제들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그 거리를 서로 좁혀 공감이나 일체감 같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통된 인식은 항간에 얼마든지 떠돌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력이 없다. 인식은 하는데, 다들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말이다. 나는 실천을 개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요구하지 않는 사상가의 주장에 그간 목이 말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뜬구름처럼 존재하는 사회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과 사회의 조합으로 (실패 여부는 차치하고 일단 발화의 단계에서만 보자면 수많은 역사적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간단명료하고 별로 길지 않은 이 책에서 프롬의 주장을 잡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듯 프롬 역시 산업사회에서 출발한 근대를 실패작으로 본다. 근대의 출범과 함께 당대 사람들이 꿈꿨던 욕망의 삶은 결코 ‘완전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유의 마력은 너무나 강했고, 오늘날의 우리도 그것을 주식으로 삼는다. 프롬은 현대인의 모순을 지적한다. 고통당하면서도 낭비한다. 우리는 한사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24쪽)


  프롬이 보기에 우리는 꽃을 꺾는 사람들이다. 그가 하나의 꽃을 두고 꺾어버리겠다는 서양의 의지와 멀리서 바라보겠다는 동양의 의지를 이 책의 들머리에서 사례로 든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의식 차이를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마 어느 정도는 두 세계의 의식적 차이가 존재하리라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그보다 프롬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의식 간격이었다. “우유병을 달라고 울고 있는 영원한 젖먹이(위의 책 51쪽)”인 현대인은 꽃을 꺾는 테니슨 시의 화자가 된다. 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바쇼가 쓴 하이쿠의 화자가 된다.


  이 책에서 저자 프롬의 사유는 일상을 반드시 거쳐 간다.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권력), 지식, 신념,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 (상당부분 겹치기도 하지만) 우리의 소유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예로 든 구절들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학생의 입장인 나는 그가 지식의 소유 방식에 대해 쓴 비판이 어떤 지적보다도 눈에 밟혔다. 독서를 통해 막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도 알맞은 통찰이리라.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게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ㅡ학교는 통상 학생들을 인간정신의 최고의 위업에 접하게 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특히 이러한 환상을 기르는 데 솜씨가 뛰어나다.” (위의 책 69쪽)


  종교에 대해 거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역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또 부득이한 충고(아닌 충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의 제 3장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분석을 위해 할애되어 있다. 종교에 대한 중립적인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그 궁극이 어찌 됐든 간에 우리의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소유를 절제하라는 일종의 금욕을 제시한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다.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이 중요하고, 물질보다는 (그리스도에서는 ‘말씀’으로 풀이되는) 정신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파한 사상의 골자이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해야 어디로 간다는 것 등은 차치한다. 그래도 우리는 능동적으로 현세의 “자아 속박과 갈망을 극복(위의 책 100쪽)”하는 형태의 삶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살아가는 것에만 중점을 둔다면 소유하면서 살아가든 아니면 소유 이면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든 별 문제될 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프롬의 주장, 법정 스님의 주장, 혹은 수많은 종교에서 실천하라는 삶의 형태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스스로 날카롭게 긁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그런 주장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가져도, 혹은 (갖지 못하더라도) 아무리 추구해도 도무지 마음이 달래지지 않기에 수많은 밤을 불면증에 시달린, 우리와 갖은 정신적 ‘환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잠을 푹 자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갖고 프롬이 이 책에서 말한 ‘소유양식’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존재양식’으로 눈길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면증에 비유하긴 했으나, 우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즉 무언가를 재산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 재산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걸 의미하는 까닭이다.


  우리 스스로를 물건의 형태로 바꿔버리는 일. 내적인 강력한 동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존재’, 혹은 ‘자아’가 우리 안에서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우리의 존재 위에 가면을 씌워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일들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우리의 비근한 삶이다. 나는 그런 삶을 듣고 보고 느낀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가면을 쓰면서 타인과 경쟁하고,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타인에게서 공포를 느낀다. 혹은 이 모든 것을 십분 발휘하면서 안도한다. 소유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을 거대한 환상으로 만든다. 뜬구름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 구름을 걷어내 주겠다고, 삶의 진경을 보여주겠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말’들이 우리에게 그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진짜와 가짜가 완벽하게 전도(顚倒)된 삶. 이것이 이 책의 제 5~6장에 실린 내용이다.


  개인이 환상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실천에 있어서는 개인보다 더 큰 규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찌그러져 있고, 눌려 있고, 깨져 있는 우리에게 흡사 극복해내라는 영웅의식을 요구하는 것 같은 그 ‘실천’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이상적이란 말인가. 프롬도 한계를 느꼈다.


  “순전한 정신적인 변혁은 항상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거나 작은 오아시스에 한정되어 왔으며, 또 정신적인 가치의 설교와 그 반대되는 가치의 실천이 결합할 때에는 그것은 더욱 무력했다.” (위의 책 183쪽)


  프롬은 여기서 ‘사회적 성격’이라는 말을 쓴다. 이건 사회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거나 혹은 때려 부수는 일을 한다. 그는 이것을 집단의 차원에서 공유되는 사상과 행위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집단이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체계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프롬이 일례로 든 건 바로 ‘종교’다. 우리가 종교에게 헌신하는 태도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동력을 인식할 까닭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종교인가가 문제되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범종교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발달과 특히 인간적인 힘의 결실을 촉진하는 종교냐, 아니면 인간의 성장을 마비시키는 종교냐(위의 책 184쪽)”가 유일한 문제가 된다.


  그는 오늘날의 종교가 어떤 모습인지를 반추한다. 아무래도 그는 유대인이고 서구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통찰했으나, 우리는 다른 종교들도 모두 갖다 붙일 수 있다. 오늘날 그 어떤 종교가 프롬이 말한 ‘산업종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서재에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과 김근수의 『슬픈 예수』라는 책이 꽂혀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굳이 그 실태를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진 않겠다. 현대의 종교들을 겨냥한 프롬의 날카로운 통찰은 독자들이 자연스레 옛 가르침의 의미와 종교의 올바른 태도를 생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프롬을 비롯한 이런 주장들의 끝에 이르러 언제나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어떤 사상이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구제(救濟)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태도나 행위에 대한 모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프롬의 글을 읽으며 동감하면서도 그가 책의 말미에 제시할 우리의 길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반쯤은 기대도 하고 반쯤은 우려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성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가 그렇듯 프롬은 대규모의 변혁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프롬은 아주 당연한 네 가지의 조건을 들며 그것이 충족되면 대변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변혁은 ‘새로운 인간’의 등장, 그리고 기존의 생활습관 포기 등을 조건으로 한다. 그가 정의한 ‘새로운 인간’은 무려 21개의 항목에 걸쳐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나는 ‘뜬구름’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명저를 만났는가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늘 실패의 연속을 두려워하는 소시민적인 성격 탓일 것이고, 실제로 그런 책들을 많이 만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문제는 그의 주장이 아닌 나의 태도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이다. 다음 해에 치러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H조 4개국 중 3위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혹 누군가가 “2002년의 4강 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 거야!”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걸 낙관이 아닌 공상으로 취급할 것이다. 심할 경우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을 포기시키고자 이것저것의 경우를 따져서 알려주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그녀의 주장, 혹은 ‘꿈’을 포기시켜야 할까? 다시 말해, 우리는 높은 꿈을 꾸기 위해 확률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가? 계산은 경쟁적 요소이다. 확률은 상인의 진리이다. 프롬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인생은 확률 놀이도 아니려니와 상거래도 아니다.” (위의 책 258쪽)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책의 도입부를 읽으며 가졌던 거의 모든 희망을 책의 말미에 이르러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그가 대안으로 언급한 대부분의 것들은 그 이외의 학자들도, 혹은 비평가들도 사회를 진단하며 내릴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대안을 언급하는 방식도 문제인식과 비판이 대안 제시보다 분량 상 훨씬 많아 글 자체가 가분수로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면, 그건 다 옳은 말이었다. 프롬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또 한 번 세상을 뒤틀어서 본 것이었다. 걷어차 버린 희망의 빈자리에는 독서 내내 내가 쏟아 부었던 정신적 정력과 노력의 양에 비례하는 허무가 찾아온다. 내가 인문학을 접하면서 늘 신경 쓰는 부분도 “그 허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 나는 프롬의 조언을 허무의 발판으로 삼지 않으려고 그의 말미를 붙잡아 읽고 또 읽었다.


  희망이 실낱이라면,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결승 진출과 같은 것이라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여 때론 법정 스님의 까마득한 무소유의 경지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면, 그리고 그 대안의 실천이 너무나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비전의 매력에 의한 격려에 있다.(위의 책 264쪽)”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모여 아주 큰 꽃을 피우기 전까지 꾸준히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별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수개월 전, 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을 읽다가 엄청난 상실감에 완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하며 그녀의 신간을 읽은 탓도 있었고, 책의 대부분이 도무지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을 단호하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흡사 리프킨의 『엔트로피』에서 말하는 ‘작은 것으로의 귀환’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말하는 핵심 주장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프롬의 말미에서 그 상실을 보장받는 힘을 얻었다. 여전히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생각의 양이 적을 탓일 것이다. 받아들인 비판보다는 실망 속에 튕겨낸 조언들이 더 많은 탓이리라.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리뷰는 늘 이런 일기로 끝나게 된다. 구차한 패턴인 것 같아 비근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많으나, 질문을 잠시 바꿔본다. 과연 나는 몇 차례나 다짐을 이행했는가.


  프롬의 글은 나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나의 ‘사회’가 쓴 일기에 대한 선생님의 따끔한 답장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이 답장을 읽느냐가 우리가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따져야 하는 유일한 문제다. 너무나도 유일하므로,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건,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는 뜻밖의 희망이기도 하다. 하나를 두고 절망하느냐, 그 하나를 두고 희망을 갖느냐. 올바른 말을 따르자면 우리의 선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희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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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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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8일



  짤막한 지식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때가 온다. 사람마다 시기는 다르리라. 나는 중학생 때였다. 지도를 좋아하던 나에게는 세계의 곳곳이 그리도 궁금할 수가 없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은 단어와 수식, 그리고 기호로 이뤄진 곳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야기가 살아 있는 곳이었다. 나는 왜 그 이야기들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과목을 세계 각지의 이야기 속에서 배울 수 있을 텐데.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야기를, 재미있는 세상을 알고 있는 선생님들도 그걸 가르치지 않는 교과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묶여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이시다. 이제 ‘학생’이라는 공식적인 꼬리표를 머지않아 뗄 나는 부모님과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푸념하는 시간이 요즘 부쩍 많아졌다. 국어교사이신 두 분은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중요한 건 국어‘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 그 말을 둘러싼 이야기라고.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딱딱한 책보다는 강물처럼 흐르는 이야기책을 더 좋아한다.


  고등학생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대학’이라는 걸 하고 보니 내가 공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됐다. 뼈가 저렸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는 대학의 과정에서 자주 빗나갔다. 수 십 개의 강의 중 단 몇 개만을 제외하면 나는 도무지 배운 것이 없었다. 차근차근 잘 따라가서 취업 준비 열심히 하는 학우들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 알고 있다. 그냥 하는 거란다. 젊음의 패기 같은 것으로. 집안의 기대도 있고, 비싼 학비를 미래에는 꼭 ‘플러스’로 만들어보겠노라는 야무진 다짐도 있었다. 분위기나 사정을 보면 대학생들은 아마 다 알 것이다. 인문학자, 철학자, 그리고 비평가들을 비롯한 세상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대학(大學)’의 의미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대학의 여정에서는 숫자의 의미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는 것. 미세먼지가 자욱한 곳에서는 마스크라도 일단 쓰고 봐야 하고, 불이 붙은 나무에는 빨리 물을 끼얹어야 나중에 재생할 기회라도 생긴다. 이런 심정인 것이다. 회계사 시험에 필요한 영어 점수가 5점 모자라 다시 시험을 봐야 했던 한 친구의 앞에서 나는 그가 마치 심장 속까지 빨아들였다가 뱉는 것 같은 담배 연기를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우고 익힌다. 공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단어. 무지하여 세상에 휩쓸리던 몽매한 백성들에게, 그리고 세상 판단을 잘못하여 백성들을 잘못 이끄는 통치자들에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오늘날 우리에게는 OMR 카드, 논술, 혹은 면접을 위한 필수 의례. 공자는 이 세상의 ‘학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이해할 것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라 외친 그가, 배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지식의 유포가 어느 때보다도 용이해 수많은 사람들이 상식을 붙들고 사는, 오늘날은 정말 풍족한 시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승’들의 비판을 받는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는 배우고 익히라는 당연한 말을, 우리가 늘 하는 행동에 대한 교정을 요구받는가.


  “인격적 자질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지적 능력은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 능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효과의 본질이 결정된다. 지성을 올바로 규제하려면 당연히 지성과는 다른 자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공부하는 삶』, 43~44쪽)


  100년도 더 전에 한 철학자가 적은 말이다. 그는 신학자였기에 그의 책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내용들은 ‘신’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지성을 올바로 규제”할 수 있는 자질을 신이 아닌 우리 내면으로 이어놓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종교의 틀에서 살며시 벗어나 바로 곁에 있는 ‘나’에 대해 스스로 논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세르티양주의 책을 읽어보면 사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자질이 대개 종교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단독적인 ‘신’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불교에서의 진리, 도교에서의 진리도 세르티양주가 말하는 지성을 통제하는 자질의 특징에 들어간다. 경건함, 전체성 같은 것들 말이다. 종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서 굳이 그 독자가 세르티양주의 설명에 거북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도 알고 있다. 단편적인 것들만을 배워서는 인생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 우리에게는 경험을 통한 ‘인생 공부’라는 것이 필요하고, 어른들은 이를 통해 보다 성숙해지고 삶을 깨닫게 된다고 조언한다. 세르티양주는 종교의 선상에서 말을 하지만 우리가 들어야 할 ‘현실적인 조언’들은 오늘날 항간에 널리 알려진 인생 조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성찰이 확연히 깊다는 차이만 있을 뿐. 나는 이왕이면 속 깊은 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은 공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 성찰과 실용을 오고 가는 그의 단호한 말투에서 독자들은 인생의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을 만났다는 안도를 느낄 수 있으리라. 누군가는 언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르티양주의 조언에서, 또 다른 이는 언행일치, 혹은 ‘독행(讀行)일치’를 강조하는 그의 따끔한 충고에서 각별한 감정을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워낙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에, 한낱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인 우리가 그 모든 비를 맞을 수는 없다. 비를 전부 맞으려는 욕심을 애당초 내려놓고, 나는 비처럼 내리는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한 바퀴 돌며 내가 유독 기억하게 된 빗방울의 촉감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사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던 내가 구태여 이 독서의 기록을 남기게 된 까닭은 그 ‘촉감’ 때문이었다.


  글 쓰는 이들은 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읽은 만큼 쓰지 못한다는 것, 읽기만 하고 쓰지 않아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 수 십 페이지의 글을 써놓고 다음날 그걸 몽땅 지워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 그렇게 욕심을 호되게 꾸짖고 홀로 가슴 아파하면서도 묵묵하게 타인의 문장을 읽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젊어서 누가 물어보겠냐만) 내게 글쓰기가 왜 힘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글은 정말 쓰기 쉽다. 수식어만 조금 붙여줘도 꽃 피는 것이 문장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하고, 그 대화를 곱씹고, 시일이 지난 후에 또 생각해보고, 엄청난 생각이 쏟아져 나와 봄날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그려놓고도 그 꽃이 질 때가 되면 스스로 지워야 하는, 이런 모든 과정은 고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는 알 수 없는 대상이다. 어떤 ‘나’를 만나는가, 이것도 글쓰기의 소위 ‘포트 X’, 모든 판도를 바꿔놓는 변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할 때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치솟기 때문이다. 욕심은 주인을 기만한다. “지금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네가 쓸 수 있는 생애 최고의 문장을 날려버리고 말 거야.” 그것은 달콤하나, 입에 넣는 순간 사라진다.


  “성찰할 수 있을 때는 절대 읽지 마라. 휴식 시간 이외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와 관련이 있는 것만 읽어라. 그리고 내면의 고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적게 읽어라.” (위의 책, 215쪽)


  세르티양주는 읽는 것도 조심하라고 말한다. 나는 평소 작문과 독서의 관계를 논밭의 고랑과 이랑으로 그려왔었다. 독서가 몸을 낮추면 작문이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고, 그 반대는 그 반대다. 경험으로도 대략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았다. 많이 읽을 때에는 ‘나’에 대한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온통 책에 대한 생각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서는 일단 ‘나’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시시각각 ‘나’와 연결시키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독서를 통해 ‘나’와 가까워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한 번 다시 생각해보시길. 우리는 ‘읽음’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외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가?) 타인의 글은 타인의 글이다. 그걸 읽고 재고하여 ‘나’의 어떤 고리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작 ‘나’와 관련된 중요한 생각들은 아주 나중에야 불현듯 찾아온다. 그 순간 글을 쓰다보면 ‘예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의 발단에 고이 꽂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는 ‘집중’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세르티양주는 독서에 집중할 때와 성찰에 집중할 때를 나눴다. 독서, 성찰, 그리고 작문의 관계가 그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명료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금욕이다. 어쩌면 이것은 종교와 철학에서 말한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담배와 술을 끊으려는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모로 보나 중요한 것이다.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헤르멘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특히 더욱 궁금해진 것인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위대한 현자나 뛰어난 지성들은 죽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계속 깨닫고 탐구하고자 했을 것인데, 과연 무엇을 그리도 구하고자 했던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모나리자」의 진실을, 혹은 리만에게 가서 미제에 대한 답을 들어보고 싶은 심정. 스스로 구해보지도 않고 미리 답을 듣고자 하는 심보는 아니지만, 돌려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그들을 바라본다는 뜻이리라. 못된 심보, 들쑥날쑥한 체력, 더군다나 세속을 탓하는 소심함, 이렇듯 떨쳐버리고 나가야 하는 것들은 내 마음을 숙주로 삼아 연명한다. 일상의 것들에 아파한다는 것은 참 억울하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위대한 책을 읽고, 속 깊은 생각을 하고,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지우고, 반복되는 담금질에도 나의 조각은 도무지 깎일 기미가 없는 것 같은 때가 많다. 이런 군소리 접고 너도 대접 잘 받으며 살 수 있게 저 ‘물’에 뛰어들라는 비근한 조언을 듣고 있으면 그 말들은 마치 굴원(屈原)의 죽음을 만류한 늙은 어부의 말처럼 늘 귓가에서 제 소리를 낸다. 고독하게 살지 말고, 세상의 흐름 위에 배를 띄워 흘러가라며.


  그러나 나 같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들 역시 나처럼 시선이 다른 길로 흘낏흘낏 넘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책을, 세르티양주의 조언과 같은 ‘스승’의 말을 또 펴고 다시 펴들어 읽을 것이다. 위안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아프지 말라고 토닥거리는 말이 아니라, 네가 아픈 것과 네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어깨를 나란히 한 친구와도 같다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말이 우리에게는 위안이다.


  “공부의 고통과 공부하는 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공부다.” (위의 책, 350쪽)


  역설이다. 아픔은 아픔으로 치유되며,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아픔을 낳는다. 그러나 이는 삶이 아픔으로만 꾸며진 집일뿐이라는 비관론이 아니다. 비관론은 “그만 두자.”라는 말이다. 세르티양주는 그만 두지 말라고 한다. 그는 고통보다 치유에 방점을 뒀다. 계속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굴러 떨어진 돌을 다시 어깨에 이고 올라가는 것을, 누군가는 인간 비극의 근원이자, 존재의 한계라 말했다. 카뮈를 뛰어넘어야 궁극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의 글을 읽었고, 그런 강의도 들어봤다. 하지만 아픔을 빼자면,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해될 수도, 우리를 설득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프다! 왜 아픈지 들어보고,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삶이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공자의 물음을 “기쁘도다.”라는 우리만의 느낌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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