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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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8일



  짤막한 지식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때가 온다. 사람마다 시기는 다르리라. 나는 중학생 때였다. 지도를 좋아하던 나에게는 세계의 곳곳이 그리도 궁금할 수가 없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은 단어와 수식, 그리고 기호로 이뤄진 곳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야기가 살아 있는 곳이었다. 나는 왜 그 이야기들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과목을 세계 각지의 이야기 속에서 배울 수 있을 텐데.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야기를, 재미있는 세상을 알고 있는 선생님들도 그걸 가르치지 않는 교과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묶여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이시다. 이제 ‘학생’이라는 공식적인 꼬리표를 머지않아 뗄 나는 부모님과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푸념하는 시간이 요즘 부쩍 많아졌다. 국어교사이신 두 분은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중요한 건 국어‘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 그 말을 둘러싼 이야기라고.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딱딱한 책보다는 강물처럼 흐르는 이야기책을 더 좋아한다.


  고등학생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대학’이라는 걸 하고 보니 내가 공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됐다. 뼈가 저렸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는 대학의 과정에서 자주 빗나갔다. 수 십 개의 강의 중 단 몇 개만을 제외하면 나는 도무지 배운 것이 없었다. 차근차근 잘 따라가서 취업 준비 열심히 하는 학우들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 알고 있다. 그냥 하는 거란다. 젊음의 패기 같은 것으로. 집안의 기대도 있고, 비싼 학비를 미래에는 꼭 ‘플러스’로 만들어보겠노라는 야무진 다짐도 있었다. 분위기나 사정을 보면 대학생들은 아마 다 알 것이다. 인문학자, 철학자, 그리고 비평가들을 비롯한 세상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대학(大學)’의 의미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대학의 여정에서는 숫자의 의미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는 것. 미세먼지가 자욱한 곳에서는 마스크라도 일단 쓰고 봐야 하고, 불이 붙은 나무에는 빨리 물을 끼얹어야 나중에 재생할 기회라도 생긴다. 이런 심정인 것이다. 회계사 시험에 필요한 영어 점수가 5점 모자라 다시 시험을 봐야 했던 한 친구의 앞에서 나는 그가 마치 심장 속까지 빨아들였다가 뱉는 것 같은 담배 연기를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우고 익힌다. 공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단어. 무지하여 세상에 휩쓸리던 몽매한 백성들에게, 그리고 세상 판단을 잘못하여 백성들을 잘못 이끄는 통치자들에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오늘날 우리에게는 OMR 카드, 논술, 혹은 면접을 위한 필수 의례. 공자는 이 세상의 ‘학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이해할 것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라 외친 그가, 배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지식의 유포가 어느 때보다도 용이해 수많은 사람들이 상식을 붙들고 사는, 오늘날은 정말 풍족한 시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승’들의 비판을 받는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는 배우고 익히라는 당연한 말을, 우리가 늘 하는 행동에 대한 교정을 요구받는가.


  “인격적 자질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지적 능력은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 능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효과의 본질이 결정된다. 지성을 올바로 규제하려면 당연히 지성과는 다른 자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공부하는 삶』, 43~44쪽)


  100년도 더 전에 한 철학자가 적은 말이다. 그는 신학자였기에 그의 책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내용들은 ‘신’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지성을 올바로 규제”할 수 있는 자질을 신이 아닌 우리 내면으로 이어놓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종교의 틀에서 살며시 벗어나 바로 곁에 있는 ‘나’에 대해 스스로 논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세르티양주의 책을 읽어보면 사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자질이 대개 종교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단독적인 ‘신’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불교에서의 진리, 도교에서의 진리도 세르티양주가 말하는 지성을 통제하는 자질의 특징에 들어간다. 경건함, 전체성 같은 것들 말이다. 종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서 굳이 그 독자가 세르티양주의 설명에 거북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도 알고 있다. 단편적인 것들만을 배워서는 인생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 우리에게는 경험을 통한 ‘인생 공부’라는 것이 필요하고, 어른들은 이를 통해 보다 성숙해지고 삶을 깨닫게 된다고 조언한다. 세르티양주는 종교의 선상에서 말을 하지만 우리가 들어야 할 ‘현실적인 조언’들은 오늘날 항간에 널리 알려진 인생 조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성찰이 확연히 깊다는 차이만 있을 뿐. 나는 이왕이면 속 깊은 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은 공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 성찰과 실용을 오고 가는 그의 단호한 말투에서 독자들은 인생의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을 만났다는 안도를 느낄 수 있으리라. 누군가는 언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르티양주의 조언에서, 또 다른 이는 언행일치, 혹은 ‘독행(讀行)일치’를 강조하는 그의 따끔한 충고에서 각별한 감정을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워낙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에, 한낱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인 우리가 그 모든 비를 맞을 수는 없다. 비를 전부 맞으려는 욕심을 애당초 내려놓고, 나는 비처럼 내리는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한 바퀴 돌며 내가 유독 기억하게 된 빗방울의 촉감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사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던 내가 구태여 이 독서의 기록을 남기게 된 까닭은 그 ‘촉감’ 때문이었다.


  글 쓰는 이들은 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읽은 만큼 쓰지 못한다는 것, 읽기만 하고 쓰지 않아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 수 십 페이지의 글을 써놓고 다음날 그걸 몽땅 지워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 그렇게 욕심을 호되게 꾸짖고 홀로 가슴 아파하면서도 묵묵하게 타인의 문장을 읽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젊어서 누가 물어보겠냐만) 내게 글쓰기가 왜 힘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글은 정말 쓰기 쉽다. 수식어만 조금 붙여줘도 꽃 피는 것이 문장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하고, 그 대화를 곱씹고, 시일이 지난 후에 또 생각해보고, 엄청난 생각이 쏟아져 나와 봄날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그려놓고도 그 꽃이 질 때가 되면 스스로 지워야 하는, 이런 모든 과정은 고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는 알 수 없는 대상이다. 어떤 ‘나’를 만나는가, 이것도 글쓰기의 소위 ‘포트 X’, 모든 판도를 바꿔놓는 변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할 때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치솟기 때문이다. 욕심은 주인을 기만한다. “지금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네가 쓸 수 있는 생애 최고의 문장을 날려버리고 말 거야.” 그것은 달콤하나, 입에 넣는 순간 사라진다.


  “성찰할 수 있을 때는 절대 읽지 마라. 휴식 시간 이외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와 관련이 있는 것만 읽어라. 그리고 내면의 고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적게 읽어라.” (위의 책, 215쪽)


  세르티양주는 읽는 것도 조심하라고 말한다. 나는 평소 작문과 독서의 관계를 논밭의 고랑과 이랑으로 그려왔었다. 독서가 몸을 낮추면 작문이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고, 그 반대는 그 반대다. 경험으로도 대략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았다. 많이 읽을 때에는 ‘나’에 대한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온통 책에 대한 생각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서는 일단 ‘나’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시시각각 ‘나’와 연결시키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독서를 통해 ‘나’와 가까워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한 번 다시 생각해보시길. 우리는 ‘읽음’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외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가?) 타인의 글은 타인의 글이다. 그걸 읽고 재고하여 ‘나’의 어떤 고리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작 ‘나’와 관련된 중요한 생각들은 아주 나중에야 불현듯 찾아온다. 그 순간 글을 쓰다보면 ‘예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의 발단에 고이 꽂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는 ‘집중’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세르티양주는 독서에 집중할 때와 성찰에 집중할 때를 나눴다. 독서, 성찰, 그리고 작문의 관계가 그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명료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금욕이다. 어쩌면 이것은 종교와 철학에서 말한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담배와 술을 끊으려는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모로 보나 중요한 것이다.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헤르멘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특히 더욱 궁금해진 것인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위대한 현자나 뛰어난 지성들은 죽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계속 깨닫고 탐구하고자 했을 것인데, 과연 무엇을 그리도 구하고자 했던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모나리자」의 진실을, 혹은 리만에게 가서 미제에 대한 답을 들어보고 싶은 심정. 스스로 구해보지도 않고 미리 답을 듣고자 하는 심보는 아니지만, 돌려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그들을 바라본다는 뜻이리라. 못된 심보, 들쑥날쑥한 체력, 더군다나 세속을 탓하는 소심함, 이렇듯 떨쳐버리고 나가야 하는 것들은 내 마음을 숙주로 삼아 연명한다. 일상의 것들에 아파한다는 것은 참 억울하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위대한 책을 읽고, 속 깊은 생각을 하고,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지우고, 반복되는 담금질에도 나의 조각은 도무지 깎일 기미가 없는 것 같은 때가 많다. 이런 군소리 접고 너도 대접 잘 받으며 살 수 있게 저 ‘물’에 뛰어들라는 비근한 조언을 듣고 있으면 그 말들은 마치 굴원(屈原)의 죽음을 만류한 늙은 어부의 말처럼 늘 귓가에서 제 소리를 낸다. 고독하게 살지 말고, 세상의 흐름 위에 배를 띄워 흘러가라며.


  그러나 나 같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들 역시 나처럼 시선이 다른 길로 흘낏흘낏 넘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책을, 세르티양주의 조언과 같은 ‘스승’의 말을 또 펴고 다시 펴들어 읽을 것이다. 위안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아프지 말라고 토닥거리는 말이 아니라, 네가 아픈 것과 네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어깨를 나란히 한 친구와도 같다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말이 우리에게는 위안이다.


  “공부의 고통과 공부하는 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공부다.” (위의 책, 350쪽)


  역설이다. 아픔은 아픔으로 치유되며,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아픔을 낳는다. 그러나 이는 삶이 아픔으로만 꾸며진 집일뿐이라는 비관론이 아니다. 비관론은 “그만 두자.”라는 말이다. 세르티양주는 그만 두지 말라고 한다. 그는 고통보다 치유에 방점을 뒀다. 계속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굴러 떨어진 돌을 다시 어깨에 이고 올라가는 것을, 누군가는 인간 비극의 근원이자, 존재의 한계라 말했다. 카뮈를 뛰어넘어야 궁극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의 글을 읽었고, 그런 강의도 들어봤다. 하지만 아픔을 빼자면,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해될 수도, 우리를 설득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프다! 왜 아픈지 들어보고,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삶이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공자의 물음을 “기쁘도다.”라는 우리만의 느낌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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