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9
진은영 시인은 문학을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이라 하였다. (진은영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내가 시를 썼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로 모여드는 중이라 생각했다. 조금 과장해서 어느 시에다가는 쏟아진다고도 표현했으나, 그건 거짓이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지만 내가 그것을 긁어모아놓은 뒤에 더럽고 아름답고 냉랭하고 찬란한, 만상의 것들을 정리하려 욕심을 부린 것,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길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나에게는 ‘우리’라는 단어는 없었다. 나는 홀로 길을 잃고 1초 앞을 두려워했다. 그런 막연한 것들 뒤로, 지금 나는 구체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길 아닌 곳에 정지해 있다.
주변에는 문학 때문에 사춘기를 잘 보냈다고 옛 추억을 나름대로 회상해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시가 나를 구원해줬다는 것, 나는 알 수가 없다. 평범한 족적이라고 보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솔직한 마음으로 그때는 시를 통해 구원을 받고 싶은 마음도 컸었다. 그러니 지금 와서도 시와 구원을 구태여 종종 연결해보는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로부터 현재의 체증을 시원하게 (혹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풀어보려고 시도한 모든 이들은 나의 이 무모한 기대를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진학 이후로 오랜 시간 시를 쓰지 않아 인생이 이리도 꼬여버린 것이 아니냐고 간혹 의심을 하기도 하니, 이건 거의 병증이라 해야 옳겠다.
진은영 시인은 문학을 분명한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중학생 시절 논과 가까운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때 한밤중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창문을 열면 시끄러울 정도였고, 더운 날에는 더욱 요란했다. 비온 뒤 물이 불으면 밤은 개구리의 세상이었다. 그만큼 분명하게 들린다. 더군다나 상황은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라고 했으니,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그리하여 인정은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때에 얼마나 개구리 울음이 더 잘 들렸을까. 절실하게 들렸으리라 생각해본다. 그 소리는 손으로 잡을 수 있다. 물론 그건 마음에 달린 손이요 도구이겠으나, 그렇다고 촉감이 없을까. 나도 그렇게 문학을 손에 쥐었던 듯하다. 놓아버리고 나니, 지금은 별로 손에 쥔 것이 없다. 내 손은 오래도록 손만 움켜쥐고 있어서 지금은 그냥 주먹이 되어버렸다.
반년을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이번에는 시를 배우게 되었다. 어떤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으며 예술을 배운다는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다. 저녁을 알뜰히 먹고 나서는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 제 1장을 읽어 넘겼다. 시를 아는 사람이 시를 모르는 사람보다 무엇을 더 많이 알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 대략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으며 조금은 필사도 해봤는데, 마음이 심란했다.
한편으로는 내 안의 시 세계를 다시 주무르기 위한 예비동작의 고통이 느껴졌고, 다른 한편에서는 타인의 시를 많이 탐닉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그렇지 않은가. 시를 읽는 것은 고된 일이다. 시인은 헛된 글을 쓰지 않는다. 언제나 가장 깊다.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머리가 물에 잠기고, 연이어 마음이 따라 들어간다. 돌이켜보니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은 다음에는 며칠을 그 장면만 생각해도 마음이 미어졌었다. 그 안에서는 ‘나’도 만나게 되니,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도 부려본다. ‘시인의 시선’이라는 것과 조우하면서 나도 그렇게 보기 위해 삶의 자세를 바꾸려는 욕심. 지금의 나는 감히 시인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눈을 감은 채 메말라 있는 시선으로는 무엇 하나 깨우쳐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게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반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는 조금 더 느리고, 바라보고, 자주 멈추고, 울고, 웃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된다. 오래도록 주먹으로 살아온 손아귀가 힘의 긴장을 서서히 풀고, 손의 자연스러운 자세로 돌아가 틈을 만들어간다. 개구리 울음이 어딘가에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