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7
오랜만에 일기들을 쭉 들쳐봤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글쓴이의 정체를 모르겠다. (바로 나잖아.) 대체 누가 이런 글을 썼을까? 그 날의 감정을 떠올려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며(혹은 불가능한 일이며), 글을 쓰던 과정을 기억해내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혹은 훨씬 더 불가능한 일)이다. 일기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성은 어쩌면 추억의 회상에서 느껴지는 아련함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한다. 행복하다는 거다.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일상에서 또 언제 찾을 수 있을까. 좋다. 참 못 쓴 글, 참 못 그린 그림 같은 것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나는 벗어버린 껍질, 혹은 지금의 껍질 안에 들어 있는 양분들을 바라본다. 든든한 토대 하나를 이리저리 손보는 느낌이다. 감촉도 좋고, 마음도 뿌듯하다.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일기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런 회상 이외의 의미를 갖는다. 굳이 그걸 ‘일기’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예전에 쓴 글을 모두 ‘일기’라 통칭해도 상관없다. 글 쓰는 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그렇듯 ‘예전에 쓴 글’이다. 글은 쓰자마자 사라지는, 아니, 쌓자마자 무너지는 해변의 모래성과 비슷하다. 이 비유가 적절한 까닭을 글쓴이들은 아마 모두 마음속으로 느낄 것이다. 방금 쓴 저 위의 문단을 하나씩 읽어보니 내가 쓴 글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듯하다. 분명 나에게서 나온 문단이지만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든든한 토대 하나를 손보다가 문득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잘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렇다. 글을 쓰기로 작정을 했다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글을 믿어야 한다. 처음에는 아주 잘 써진다. 술술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자신이 글을 아주 잘 쓴다는 착각도 하게 된다. 아니, 착각이라는 건 나중에 깨닫게 되고, 일단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글을 몹시 신뢰하게 된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꽤 오래 가는 편이다. 왜냐하면 우린 글로 풀어내야 하는 무궁무진한 소재, 즉 ‘나’라는 대상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풀어내든, 나를 거쳐서 해석을 내놓든, 정말 많은 글을 쓸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새로 알게 되면 글을 한 편 쓰고, 나중에 그 지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면 또 다시 쓰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토대 위에 높은 탑을 쌓아간다. 삐뚤어지게 쌓아도 쓰러질 염려가 없으니, 세계 유수의 마천루 부럽지 않게 높아진다. 정신의 세계이다. 중력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러다가 사건이 발생한다. 너무 뜻밖의 순간에 일어난 예상외의 사건이다. 우리의 탑이 무너진 것이다. 중력이 없으면 무너질 일이 없다. 건축전문가들에 따르면 잘 쌓은 건물은 좌우 진동, 쉽게 말해 지진이 나지 않는 이상 세월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의 세계에 쌓은 우리의 탑이 무너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원인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 자신이 정신의 세계에 중력을 들여온 것이다. 생각의 탑에 있는 재료들이 본래 무게를 되찾는 순간, 우리는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의 든든한 토대가 순식간에 제 머리 위에 놓인 모든 것들을 땅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약간의 비유였는데, 여기서 ‘중력’은 ‘의심’을 뜻한다. 글을 그냥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 글을 쓰는 존재, 글을 쓰고 난 후의 결과, 그것의 연쇄 등을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글에 대한 자신감, 혹은 글에게 갖고 있었던 신뢰, 심지어는 사랑마저도 서서히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걸 느끼게 된다. 이것은 분명 글쓰기의 삶에 있어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난 지금 이런 상태에 와 있다. 차려서 내놓은 것을 두고 누군가에게 “여기 내놓았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내가 쏟아낸 것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으면 그/그녀에게 “다시 담아야 할 것들도 많네요.”라고 말하게 된다. 글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 즉 어떤 매체나 기술이 아니라 옷을 홀랑 벗고 있는 나 자신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놓으면 창피하고, 쏟아내면 다시 담고 싶다. 그래서 내놓고 쏟아낸 채로 남겨둬야 하는 글의 피치 못할 ‘매체’적 특성이 늘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지 않다 보면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이 내 안에 생각보다 오래 남아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꺼내지 않거나, 읽지 않거나, 혹은 남기지 않으면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고, 혹은 내가 기억하지도 못할 것 같은 그 초조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풍부함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의문이 든다. 굳이 읽고 써야 하나?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읽고 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뜻하기 위해 통칭 겸 사용한 표현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읽고 써야 한다. 그 일을 참으로 부단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에 집착하거나, 자신(을 넘어서는 자만)을 하거나, 남들이 다 그러하듯 기뻐하거나 슬퍼할 일이 생각보다 많은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면 선뜻 “많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일단 글쓰기를 멈춘 상태에서, 그리고 읽기를 멈춘 상태에서 우리는 이 질문의 중요성을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지점에 서 있다. 한때의 글쓰기에 대한 광기, 한때의 읽기에 대한 광기. 집착이든 광기든 짝사랑이든. 뭐든 간에 이제는 조금 덜어버린 자세. 나는 책과 책 사이에, 문자와 문자 사이에 원래부터 있었던 그 원시적 공간에 대해서 예전보다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이것은 ‘멈춤’이라는 자세에서 내가 얻어낸 일종의 ‘특혜’다.
우파니샤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들은 행위 자체만 알 뿐 행위에 얽매임으로써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 행위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통 속에 빠지리라. 다시 아래로 떨어져버리리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린 필시 질문 하나와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읽는가? 시작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글쓰기란, 읽기란, 혹은 둘이 결합된 삶이란 다 그렇다. ‘무엇’이 아닌 ‘왜’를 애당초 질문해놓고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 글쓰기와 읽기를 통해서 지난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자상(自傷)을 일삼았고, 그리하여 지금은 또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겉멋에서 시작한 글쓰기와 읽기는 남부럽지 않은 높이를 자랑하기 위해 수직으로 치솟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지렁이처럼 땅 위를 꿈틀꿈틀 느릿느릿 기어가는, 그 자체로 삶인 그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