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세는 천하를 뒤덮는데

때를 잘못 만나, 추여! 너마저 발걸음을 멈추는구나.

추여! 네가 가지 않으니 어찌 하리 어찌 하리

우야, 우야! 너를 또 어찌 하리"

자신의 목을 겨눈 칼끝도 의리로 용서한 장부, 독선적이나 대의명분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했던 남아, 한 여인과의 지고한 사랑을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순정, 항우

항우와 유방을 읽는 내내 항우의 외로움을 보아야했다. 자신의 그릇에 한신, 장양, 소하, 번쾌등의 인걸을 담아낸 유방과 달리 자신의 그릇을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충분히 채우고도 넘친 외로운 사나이 항우의 틈을 파고든 이는 범증과 우미인뿐이었다.

범증의 죽음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면 우미인의 죽음은 그를 오강에서의 자결로 이끈다. "우야, 우야! 너를 또 어찌 하리" 를 울부짓는 항우에게서 피끓는 눈물을 바라본 우미인은 노래와 춤으로 화답하며 목숨을 내어놓는다. [패왕별희]로 알려진 항우와 우미인의 이별이다.

그냥 가끔 이렇게 큰 사나이의 눈물이 가슴에 들어오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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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 입니다.

- 신영복 교수의 <더불어 숲>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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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004-07-0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정말 짜증민국입니다..... 국민들 가슴에 멍들이고 한숨만 나오게 하니... 이젠 서울시장까지 나서서... 용서하지말아야겠죠?

잉크냄새 2004-07-0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우리민족은 관대한 민족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관대함은 허울좋은 표현일뿐 단죄해야할 대상에 대해 쉽게 망각해버리고 마는 건망증 많은 민족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으면서 레테의 강은 왜 그다지 건너다니고 있는건지...

icaru 2004-07-0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더불어 숲>이네요...저는 언제 다 읽는다죠...ㅠ.ㅠ

호밀밭 2004-07-02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폐의 합의, 야합이겠지요. 사람들 마음은 하나로 가는 듯한데 윗선이라고 불리는 곳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네요. 7월, 참 살기가 팍팍한 느낌이 드네요. 지지부진한 하루하루, 갑자기 확 변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뭔가 꽉 막힌 곳이 많은 나날이네요.

잉크냄새 2004-07-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 정치인의 주특기가 야합이죠.
정당한 일에는 협력하는 일이 없으나 부당한 일에 야합하는 경우는 흔하죠.
 

술에 취해 있었다. 학교 주변에서 술을 먹고 근처에서 자취하는 과 동기 방에서 잠을 잤다. 새벽에 찾아오는 절망같은 갈증, 취기와 잠결에 두리번거리던 나의 눈에 책상위에 반짝이는 놋쇠 냉면 그릇에 담겨있는 물이 보였다. 벌컥벌컥 마시는 물의 시원함이란! 알수없는 대상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후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어수선함에 잠을 깨어보니 동기 녀석이 책상앞에 서서 머리를 빗고 있다. 양아치들이 들고 다니는 주황색의 커다란 도끼빗을 놋쇠 냉면 그릇에 담구어 머리를 빗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이 지저분한 녀석이 까치집 형성한 머리를 감을 생각은 않고 물만 묻힐 용도로 사용하는 세숫대 기능의 그릇이었다. 놋쇠그릇속에 담겨진 물위에 떠있는 비듬과 머리카락들. 순간 속에서 욱 하고 구토가 쏠렸다.

에라이! 젠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쪼그려 앉아 토하려는 순간,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이가 원효이다. 그가 당나라 유학길에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 모든 사물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지 사물 그 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 라는 깨달음을 얻었지 않았는가! 구토가 사라졌다. [ 나도 어제밤 그 물을 그토록 시원하게 마시고 감사의 인사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원효가 마신 물은 물을 담은 그릇이 더러움의 대상이었지 물 자체는 깨끗함이었다. 내가 마신 물은 그릇이 깨끗함이요 물 자체는 더러움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깨달음이 더 깊고 심오한 것일수도 있다. 지금 만약 그 물을 본다면 다른 의미를 다가올 것이다 ] 라고 생각했다. 음하하하 순간 웃음이 나왔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머리에 물을 묻히고 서있다. 옆에 다가가서 물을 바라보니 더러움이 여전하다. 아니 더 더러웠다. 정녕 저 물이 내 속에 있는 물이던가 또 다시 구토가 쏠렸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동기 녀석 뒤통수를 한대 후려치고 깨달았다. 원효의 원대한 깨달음이 아닌 범인의 그저 그런 깨달음이었다.

 [ 남자 자취방 겨울앞에 놓여있는 그릇의 물은 왜곡된 용도로 사용될 확률이 100%이다 ]  

아, 물이 조금만 더 깨끗했더라면 아마 원효의 무애사상을 능가하는 또 다른 불교 종파의 탄생이 90년대 초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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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커피 마시다 갑자기 쏠리는 이유는...^^;;
자꾸 연상이 되고 제 앞에 있는 커피가 '그 물'과 겹쳐지는데요...ㅡ.ㅜ

갈대 2004-07-0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했는데도 쏠리네요. 모르는 게 약입니다.
그나저나 그 물 마셨다는 거 친구한테 얘기하셨나요? 그랬다면 20년 놀림거리인데..ㅋㅋㅋ

잉크냄새 2004-07-0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제목에 [식사중 접근금지] 라는 글을 첨부해야겠네요. 저도 쓰면서 키보드에 쏟을뻔 했네요.ㅎ
그나저나 지저분한 글 끝까지 읽으시는 분들께 깨달음이 있기를...ㅎ

stella.K 2004-07-0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만 안 드셨더라면...원효는 술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리 없던데...술이 병 아닙니까? 비할 걸 비하셔야죠. ㅎㅎ. 그래도 그 깨달음이 무익하진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그 이후 다신 그런 실수 안 하셨죠? ^^

ceylontea 2004-07-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호밀밭 2004-07-0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을 담가 두는 물그릇은 처음 들어요. 정말 원효가 마신 물과 정반대의 물이네요. 예전에 물에 넣어 둔 렌즈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는데.... 님 많이 깨닫고 가요. ^^

icaru 2004-07-0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비듬 따위도 굳이 영양을 따지자면...단백질 아닌가요..ㅋㅋㅋ 영양 섭취 잘 하셨네~!
호밀밭 님...커억...렌즈가 담긴...물을 먹다니...정말...비싼 물이죠!!

잉크냄새 2004-07-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은 혹시 식품영양학과?
 

요즘詩는 깊은 울림이 없다 / 신경림



농무’의 원로시인 신경림(申庚林·67)씨가 요즘 시들이 너무 부자연스럽고 경박하며, 지나치게 독자들에 영합해 깊은 ‘울림’이 없다고 매섭게 질책했다.

신씨는 신작시집 ‘뿔’(창작과비평사)의 말미에 붙인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최근 전문지·잡지·동인지 등을 통해 수많은 시가 발표되고 있지만, 대부분 “울림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는 “시를 억지로 만들기 때문”이며, “시를 억지로 만들다 보니까 오늘의 우리 시 중 많은 것들이 말장난으로 시종하고 있다”고 작금의 시작(詩作) 풍토를 비판했다. “삶과는 아무 관계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뿐”이라는 것이다.

신씨는 이어 “요즘 시인들이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 시를 쓴다”지적했다. 이는 “70, 80년대의 이른바 민중시의 무거움에 대한 반동의 측면이 강하다”면서, 당시의 일부 민중시인들이 분단현실이나 노동문제 같은 주제만 다루면 다 시가 된다는 잘못된 잣대에 따라 불량품을 대량생산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요즘 시인들이 독자들에 지나치게 영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시가 경박해지는 것도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70, 80년대의 사회성의 시들”도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독자와의 영합이었다는 혐의를 둘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신씨는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영국시인 워즈워스와 코울리지의 정의를 시인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명언이라고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요약했다.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번 시도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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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7-0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무나 다...시나 글을 쓴다고 아우성이라 그런듯합니다...
그러고 보니...저도 그 '아무나' 쪽이네요...ㅠ.ㅠ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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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내적인 문제를 외적인 부분에서 찾고자 한다. 자기 가슴속에서 솟아나오는 길로 나아갈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좌절한다. 설령 다른 부분에서 가시적인 답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또 다시 자기 내면의 문제로 방향전환하는 문제의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한다. 자기 내면의 길로 나아가는 것 또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삶속으로 녹아드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자기성찰과 동반되는 고독과 방황의 오랜 시간속에서 쟁취되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부모라는 안정된 세상속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불안한 세상으로의 첫 나아감은 프란츠 크리머를 통해서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존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느끼는 불안이 그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런 시기에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데미안은 때론 구원자의 모습으로 때론 유혹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결국 데미안은 그가 나아간 길에서 만나게 된 완성된 자기 내면의 길과 동일시되지만 기존의 삶의 틀을 벗어나려는 부분에서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그에 동반되는 안정된 틀에의 불안함에는 세상의 유혹자로 그려지고 있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는 방향에 존재하는 신, [압락사스]는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카인과 아벨 등으로 묘사되는 우리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이중적인 모습의 상징이다. 그러나 [압락사스]는 이중성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자아의 삶속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직면하게 되는 인정하고 받아들여 삶속으로 고스란히 녹여들여야할 사고의 한 단면이다.

싱클레어가 최초로 접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데미안을 만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열망과 현재의 안정된 삶으로의 복귀, 홀로 맞이하게 되는 처절한 방황과 고독의 시간, 그런 과정을 거친후 결국 바라보게 되는 자기 내면의 길. 자기 가슴속에 솟아나오는 길을 따라 사는 것이 그토록 처절하고 어려운 과정에 있음을 데미안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자기 내면의 길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말하고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기존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는 번역과는 다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에바부인을 사랑할때 그녀는 [당신에게 다가가지는 않겠습니다. 쟁취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새가 알을 깨는 행위, 새로운 세계로의 나아감은 당연한 수순처럼 지나게 되는 그런 과정은 아니다. 투쟁과 쟁취라는 표현처럼 현재의 자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받아들인 준비가 된 자에게만 그 길은 열리는 것이다. 이 구절은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버릴 수 있을만큼 날기를 원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데미안>은 10대에 선생님의 권유로 한번, 20대에 먼지 폴폴나던 세로줄의 낡고 두꺼운 책으로 한번, 그리고 30대에 다시 집어들었다. 전쟁에서 부상한 싱클레어에게 가벼운 입맞춤으로 떠난 데미안과 그의 모습과 사상이 이제는 남이 아닌 내안의 완전한 그가 되었음을 말하는 마지막 장면처럼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데미안과 하나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마 10대,20대,30대에 느끼는 데미안은 모습을 달리하며 내 속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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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6-3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장기에 읽었던 고전을 현재에 다시 읽는 일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하는 것' 만큼이나...쉽지 않은 일이지요... 잉크 냄새 님은 내면 성찰을 끊임없이 하시는 듯 합니다...저도 예전에 읽었던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어볼까...예적지부터..별렀는데...안되누만요....ㅋ

꼬마요정 2004-06-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도 많아요... 하지만 선뜻 손이 안 가는 이유는 뭘까요...

잉크냄새 2004-07-0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깨고 나오는 알이 시지프스의 바위와 동일한 것인지도 모르죠. 알을 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알에 의해 겹겹히 쌓여있어서 항상 그렇게 보일뿐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