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있었다. 학교 주변에서 술을 먹고 근처에서 자취하는 과 동기 방에서 잠을 잤다. 새벽에 찾아오는 절망같은 갈증, 취기와 잠결에 두리번거리던 나의 눈에 책상위에 반짝이는 놋쇠 냉면 그릇에 담겨있는 물이 보였다. 벌컥벌컥 마시는 물의 시원함이란! 알수없는 대상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후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어수선함에 잠을 깨어보니 동기 녀석이 책상앞에 서서 머리를 빗고 있다. 양아치들이 들고 다니는 주황색의 커다란 도끼빗을 놋쇠 냉면 그릇에 담구어 머리를 빗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이 지저분한 녀석이 까치집 형성한 머리를 감을 생각은 않고 물만 묻힐 용도로 사용하는 세숫대 기능의 그릇이었다. 놋쇠그릇속에 담겨진 물위에 떠있는 비듬과 머리카락들. 순간 속에서 욱 하고 구토가 쏠렸다.

에라이! 젠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쪼그려 앉아 토하려는 순간,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이가 원효이다. 그가 당나라 유학길에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 모든 사물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지 사물 그 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 라는 깨달음을 얻었지 않았는가! 구토가 사라졌다. [ 나도 어제밤 그 물을 그토록 시원하게 마시고 감사의 인사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원효가 마신 물은 물을 담은 그릇이 더러움의 대상이었지 물 자체는 깨끗함이었다. 내가 마신 물은 그릇이 깨끗함이요 물 자체는 더러움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깨달음이 더 깊고 심오한 것일수도 있다. 지금 만약 그 물을 본다면 다른 의미를 다가올 것이다 ] 라고 생각했다. 음하하하 순간 웃음이 나왔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머리에 물을 묻히고 서있다. 옆에 다가가서 물을 바라보니 더러움이 여전하다. 아니 더 더러웠다. 정녕 저 물이 내 속에 있는 물이던가 또 다시 구토가 쏠렸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동기 녀석 뒤통수를 한대 후려치고 깨달았다. 원효의 원대한 깨달음이 아닌 범인의 그저 그런 깨달음이었다.

 [ 남자 자취방 겨울앞에 놓여있는 그릇의 물은 왜곡된 용도로 사용될 확률이 100%이다 ]  

아, 물이 조금만 더 깨끗했더라면 아마 원효의 무애사상을 능가하는 또 다른 불교 종파의 탄생이 90년대 초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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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커피 마시다 갑자기 쏠리는 이유는...^^;;
자꾸 연상이 되고 제 앞에 있는 커피가 '그 물'과 겹쳐지는데요...ㅡ.ㅜ

갈대 2004-07-0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했는데도 쏠리네요. 모르는 게 약입니다.
그나저나 그 물 마셨다는 거 친구한테 얘기하셨나요? 그랬다면 20년 놀림거리인데..ㅋㅋㅋ

잉크냄새 2004-07-0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제목에 [식사중 접근금지] 라는 글을 첨부해야겠네요. 저도 쓰면서 키보드에 쏟을뻔 했네요.ㅎ
그나저나 지저분한 글 끝까지 읽으시는 분들께 깨달음이 있기를...ㅎ

stella.K 2004-07-0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만 안 드셨더라면...원효는 술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리 없던데...술이 병 아닙니까? 비할 걸 비하셔야죠. ㅎㅎ. 그래도 그 깨달음이 무익하진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그 이후 다신 그런 실수 안 하셨죠? ^^

ceylontea 2004-07-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호밀밭 2004-07-0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을 담가 두는 물그릇은 처음 들어요. 정말 원효가 마신 물과 정반대의 물이네요. 예전에 물에 넣어 둔 렌즈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는데.... 님 많이 깨닫고 가요. ^^

icaru 2004-07-0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비듬 따위도 굳이 영양을 따지자면...단백질 아닌가요..ㅋㅋㅋ 영양 섭취 잘 하셨네~!
호밀밭 님...커억...렌즈가 담긴...물을 먹다니...정말...비싼 물이죠!!

잉크냄새 2004-07-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은 혹시 식품영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