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색깔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부지불식중에 가슴속에 자리한 색. 나에게는 분홍이 그런 색이다. 신호대기의 차 안에서 바라본 분홍의 옷을 통해 그 시절을 헤아려본다. 짝사랑의 추억이 묻어있는 색,  분홍이다.

1.분홍색 파카

고향집은 여중과 여고 앞이었다. 학교 등교길은 매일 수백명의 여학생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가야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택한다면 5분 정도의 거리였으나 내가 택한 길은 여학생들의 등교길을 피하여 빙 둘러서 가야하는 15분 정도의 길이었다.그 당시만 하더라도 쑥쓰러움을 많이 탔나보다. 고3의 이른 봄날, 등교 시간이 늦어 어쩔수 없이 5분 거리의 길을 가방을 둘러메고 뛰어가는데 분홍색이 눈에 확 들어왔다. 누굴까? 교복위에 분홍색의 파카를 입은 저 여학생이 누굴까? 그런 호기심으로 다음날부터 그 길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인가 분홍은 단순한 분홍이 아닌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선명한 분홍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2. 리차드 클레이더만과 똥개

친구들과 몰래 하교길의 뒤를 밟아 집을 알아내었다. 어차피 어리숙하기는 마찬가지인 몇몇 녀석과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낸 것이 TAPE 선물이었다. 그 당시에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리차드와 몇몇 사람들의 경음악을 녹음하여 나름대로 포장을 하였는데 문제는 전해주는 방식이었다. 최종 선택은 새벽에 대문앞에 몰래 갖다 놓는 것이었다. 내가 떨려서 못하겠다고 하니 친구 한 녀석이 나섰다. 의기양양하게 언덕을 올라가 대문앞에 다다른 녀석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똥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자전거 세대는 새벽길을 똥개에게 쫓겨 달아났다. TAPE 물어뜯으면 보신탕을 만들어 버린다고 다짐하며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TAPE는 무사했고 똥개 또한 보신탕의 운명을 면했다.

3. 성당의 종소리

언덕에 위치한 천주교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뱃길의 좌표로 이용될 정도로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천주교 앞 언덕에서 보면 그 여학생의 집이 바로 보인다. 해가 지는 저녁이나 별이 총총한 밤에 가끔 올라 그리움의 눈으로 바라다 보곤 했다. 그러던 주말 어느 날, 언덕에 앉아있는데 말로 설명할수 없는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종소리, 난 지금도 가장 아름다웠던 소리를 물으면 그때의 성당 종소리를 말한다. 그 종소리에 이끌려 성당을 한달 정도 다녔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가끔 찾는 이곳은 성당의 종소리와 짝사랑했던 여학생의 모습으로 가끔 떠오른다.

4. 부치지 못한 편지

내 생애 최초의 연애편지이다. 그 당시는 알지도 못하는 조르주 무스타키의 방랑한 음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야말로 느끼함으로 포장한 유치찬란한 편지이다. 아마도 어디에서 인용했었는가 보다. 직접 전해주리라는 나의 오기로 그 편지는 지갑속에서 반년을 넘는 세월을 허리를 구부린채 지냈다. 우표와 함께 누군가에게 전해질 운명을 다하지 못한채 지금도 그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물함 속에서 잠자고 있다.

5. 그리고 피천득의 <인연>

우연찮게 만나게 된것은 대학교 1학년때였다. 아는 후배가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만나고 돌아서 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것이 피천득의 <인연>이다. [ 아사코를 세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처음의 만남이었지만 가끔은 그냥 이대로의 추억으로 남아야 하는 것도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만났다는 자체가 괜히 아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 추억은 가끔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꿈 하나 간직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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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7-26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에 저도 이런 비슷한 글을 썼고 잉크님이 댓글을 달아주셨죠.
그때 잉크님도 비슷한 사연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추억을 감춰놓고 계셨군요^^
분홍이라... 저도 분홍색 참 좋아합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이뻐보이기도 하구요.

비로그인 2004-07-2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빛바랜 흑백 영화 한 편 본 듯한 느낌입니다. ^^
다른 사람들에겐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것도 내게만은 설렘으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건 그렇고, 잉크 냄새 님이 쓰셨다는 그 최초의 연애 편지..살짝이 훔쳐 보고 싶은 맘, 간절하네요. ^^*

미네르바 2004-07-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누구나 가슴 속에 그런 추억 하나 품고 살고 있죠.
생각만으로도 왠지 풍요로워지는 푸근함, 설레임...
그러나 저도 그런 생각 들어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같은...

그런데 George moustaki 음악은 정말 감미롭지요. 지금도 샹송가수 중에 제일 좋아해요.
특히 Le facteur(우편 배달부)를 좋아해요. Ma solitude(나의 고독)도 좋고...

잉크냄새 2004-07-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나면 다 푸근하고 설레이는 추억으로 남는가 봅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결국 그런 인연의 산물이 인생이 아닌가도 싶고요...

ceylontea 2004-07-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은 잉크냄새님이 직접 겪으신 것이란 거죠??
너무 멋져요... 전... 고등학교때 다닐 때 친구들하고 우~~하고 몰려다닌 기억밖에는 없는데... 잉크냄새님은 참 낭만적이네요...
좋은 추억입니다..

icaru 2004-08-0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분홍색 파캅니까? 저는 파랑색 남방인데..하하..
님 휴가 떠나신겁니까?
저 휴가다녀오니...님은 안뵈시고....

좋은 휴가 되셨으면 좋겠다고... 코멘트 하고가유~~
 

중학교 시절 유난히 울음이 많으신 여선생님이 계셨다. 도덕 선생님, 막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을 받은 학교가 우리 중학교였다. 학생들의 짖궂은 장난에 눈물을 참 많이 흘리신 분이란 기억이 난다. 처음 매를 드신 날도 울었고 출입문에 올려논 세숫대의 물세례를 받았을때도 울었다. 수업 시간에 잠시 나가 눈물을 닦고 들어와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수업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도덕 선생님에게 흑기사가 한명 있었다. 기술 선생님, 그 당시 노총각 선생님으로 솔직한 행동과 유머감각으로 학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좋았다. 그 선생님의 T자를 이용한 종아리 치기 타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뼈속까지 깊은 울림을 남기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도덕 시간에 발생한 문제까지 연관하여 매를 드시니 불만이 있을수밖에, 지금의 우리라면 그 아련한 심정 십분 헤아려 흔쾌히 맞아주겠지만 그때는 정말 싫었다.

흑기사의 체벌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이 한겨울의 체벌이었다. 그 당시 중학교는 3층만 올라가도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라 한겨울 바다바람이 엄청나게 몰아치는 곳이었다. 한겨울의 바다바람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바람이다. 살을 벤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도덕 선생님이 울고간 어느 겨울날, 기술시간에 제도실 대신 옥상으로 집합했다. 그 혹독한 체벌이란 것이 눈 쌓인 옥상에서 팬티만 남기고 전부 벗은 후 양팔벌리기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물통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수업 내용 물어보고 얼굴이나 가슴에 물방울 튀기기였다. 이빨을 달그락거리며 부들부들 떠니 답인들 생각나겠는가. 거의 백전백패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부러움의 눈길을 받는 녀석이 바로 팬티 안입고 온 녀석이다. 꼭 한둘은 있었던것 같다. 인간의 기본 존엄성이 있는지라 어찌 홀라당 벗길수 있겠는가. 팬티 안 입은 애들은 바지입고 체벌을 받으니 의기양양(?)해 질수 밖에...대신 물 세례는 더 받았지만...

어쨌든 그해 겨울, 팬티 안 입은 애들 빼고는 상당히 추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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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옆반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던 생각이 나네요. 하지만 국어 선생님이 어느 날 결혼을 하시더라고요. 괜히 생물 선생님이 안 되어서 마음이 짠했었는데.
그 기술 선생님 체벌 방법 독특하시네요. 그리고 바지 입고 체벌 받은 학생들도 참 그렇네요. 그래서 흑기사 기술 선생님은 좋은 결과를 얻으셨는지도 궁금하고요.

stella.K 2004-07-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 팬티 안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남?
바다가 보이는 학교라...생각만으로는 정말 낭만적일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잘못 걸리면 그런 일도 당하는구랴. 그 모진 칼바람 잘 견디고 이제까지 잘 살아오셨수. 기특하구랴! ^^

Laika 2004-07-2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첫 눈이 오는구나
은유법도 문장성분도 잠시 덮어두고
저 넉넉한 평등의 나라로 가자
오늘은 첫눈 오는 날
산과 마을과 바다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백색의 화해와 평등이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매운 손찌검의
너희들 가슴에 칼금을 그은 편애를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구나

 

노총각 선생님의 사랑 얘기와 상관없이 바다가 보이는 학교라는 말에 "정일근"의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생각나네요.. 그때의 체벌이 많이 힘드셨겠는데, 이런 더운날 들으니 좀 시원해지도하네요....ㅎㅎ 잉크님의 학창시절 얘기는 들을때마다 재밌어요..^^ 그나저나 정말 팬티 안입고 다니는 애들은 뭐랍니까? ^^

 


잉크냄새 2004-07-2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촌구석 남학교여서 그런 모양입니다.^^ 특히 소금강 자락에 살던 아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죠. 체육 시간에 늦게 나오는 사람, 한번쯤 의심해볼만 합니다.가끔 불시에 신체검사 비슷하게 하면 꼭 한두명 걸려들었거든요.^^;

미네르바 2004-07-2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이야기 보따리는 여전히 웃음을 자아내는군요.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겠어요. 그 여선생님과 노총각 선생님의 후일담은 없나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정말 부러워요.
 

<가을에 우는 매미 / 그 목소리에 /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 - 소세키-
<너무 울어 / 텅 비어 버렸는가, / 이 매미 허물은 > - 바쇼-
<여름 매미 / 나무를 꼭 껴안으며 / 마지막 울음을 운다 > - 이싸 -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쓰라려,쓰라려 > - 이싸 -

하이쿠 시인들은 대부분 방랑자였다고 한다. 평생을 소유하지 않고 걸식하며 걸어다니며 자연의 풍경과 하찮은 미물에 숨어있는 삶의 본질에 대하여 많은 하이쿠를 남겼다. 인생의 유한함, 어찌할수 없는 숙명, 바닥에 다다른 외로움과 허무...

그들이 다룬 많은 소재에서 그들의 방랑생활을 엿볼수 있다. 이, 벼룩, 귀뚜라미, 허수아비, 나비, 거미, 매미...이 사물들이 그들의 심정에 따라 때론 서글픈 모습으로 때론 해학적인 요소로 처리되곤 한다.

그런데, 유독 매미만큼은 모든 하이쿠에서 서글픈 운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왜? 짧은 생의 허무함 때문일까?  한 세상 살고가면서 구차하게 허물을 남겨서일까? 우리도 매미소리를 울음소리로 표현하지 노래소리로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왜 매미만 유독 서글픈가?

올 여름 찌는듯한 더위속에 들리는 매미소리. 인생이 짧고 쓰라려 울음 우는 소리가 아닌 인생이 즐거워 어찌할줄 모르는 노래소리로 듣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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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25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년을 땅속에 있다 세상에 나와 일주일을 살다 가는 삶이라 그런 것 아닐까요...

stella.K 2004-07-25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근사하네요.^^

잉크냄새 2004-07-2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미는 매워서 우는군요.^^
삼땡은 33 이고 3333은 대통령이 아닌지요?
 
한 줄도 너무 길다 -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옮겨엮음 / 이레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종 위에 졸고 있는 나비, 허수아비 뱃속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 바위 뚫어져라 울어제끼는 매미, 잉어 머리에 내리는 여름비. 이 책에 소개된 하이쿠의 소재이다. 하이쿠 시인들은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삶을 살았고 끝없이 방랑한 방랑자요, 나그네요, 구도자이다. 그들은 자신이 방랑하던 삶속에서 바라본 풍경과 하찮은 미물의 존재속에 감추어진 삶의 본질인 유한함과 허무와 숙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모습을 먼저 보이고 마음을 뒤로 감추라] 이싸, 부손과 함께 3대 하이쿠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바쇼는 말한다. 사물을 설명하지 말고 묘사하라. 그들이 사물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귀기울이는 모습만으로 나머지 삶의 여백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고 있다.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가끔은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작은 여백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한줄도 너무 긴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 - 이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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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하이쿠를 본 적이 있어요. 그 글의 출처도 이 책이었던 것 같은데 짧은 글 속에 인생이 담겨 있는 듯해서 좋아요. 글은 짧지만 길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글들이 마음에 남더라고요. 어딘가에 적어 둔 하이쿠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내 앞에 있는 사람들 /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 얼굴들일세 (바쇼)>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 파리가 있고 / 부처가 있다 (이싸)>
이 책에 있는 듯하기도 한데 가끔 생각나는 글이에요.
한 줄이 너무 길다는 생각, 한 줄 속에 인생을 거뜬히 살아갈 지혜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네르바 2004-07-2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줄도 너무 길다... 인생을 한 줄 속에 너끈히 담을 지혜의 글은 어떤 글인가요?
이 책 속에 있나 봐요.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 - 이싸 ->
전 어제 융건릉에서 친구와 매미 소리를 들으며 참 행복해 했는데...^^



잉크냄새 2004-07-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님이 기억하시는 하이쿠도 이 책에 있는것 같아요. 한줄로 인생을 담을 지혜의 글은 우리 삶의 흔적이 아닐까 합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내 삶의 흔적들...
사물의 본질은 사물 자체가 아닌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 사물은 대하는 이에 따라 비치는 모습이 다를 겁니다. 그런데 유독 매미만큼은 하이쿠에서 서글프게 다루어지고 있네요.
<가을에 우는 매미 / 그 목소리에 /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 - 소세키-
<너무 울어 / 텅 비어 버렸는가, / 이 매미 허물은 > - 바쇼-
<여름 매미 / 나무를 꼭 껴안으며 / 마지막 울음을 운다 > - 이싸 -
 

혼자 서 있어도 외롭지 않아야 한다


- 노여심 -


꽃이 피어 아름다운
뜨락을 서성일 때
그때만 그리움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빈들에서 허수아비처럼 혼자 서 있어도
그리움은 아름다워야 한다.

시원한 산꼭대기
달과 별이 예쁜 마을에서
거기서만 쓸쓸함이 낭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의 조각 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드문드문 숨어 있는 별을 찾을 때도
쓸쓸함은 낭만인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것에
의미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따지지 아니하듯
어느 별로 갈 지에 대하여도
물음표를 그리지 말아야 한다.

===========================================

피가 맺히고 몸서리 치도록 외롭던 날들,
그리움에 가슴 한웅큼 베어 먹힌듯 그립던 날들,
가슴에 쏟아지는 햇살만으로도 희희낙낙하던 날들.

돌아보면 돌아보면
삶아! 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치않는 너의 의미를 만들고 있구나
내가 널 그렇게 덧칠하며 살아왔구나

담배 한개비로 돌아서 나온 회의실 한구석...
넌 오늘도 너의 자리에서 늘 한결같은 눈으로 바라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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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4-07-2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삶이면... 삶을 초월한 것일까요? 달관한 것일까요?
가끔 그렇게 생각해요.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그래서 또 삶이라고...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래야 가끔 비오는 날의 햇빛처럼 반짝이는 행복도 느낄 수 있다고... 그게 요즘 제 생각이랍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따지지 아니하듯
어느 별로 갈 지에 대하여도
물음표를 그리지 말아야 한다>
다만,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호밀밭 2004-07-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자꾸 읽게 되네요. 어디에 있든 그리움은 아름다워야하고, 쓸쓸함은 낭만이 되어야 하겠지요. 가끔 그런 감정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감정이야말로 초라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인생이 어디가 끝일지 모르겠지만 잘 살자는 생각 시 한 편으로 다시 하게 되네요.

잉크냄새 2004-07-2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삶은 언제나 거기에 있는데 우리가 가지는 마음에 따라 그 빛깔을 달리 하는 것 같아요. 돌아돌아오면 결국 같은 자리이거늘, 그래서 삶이 여행에 비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