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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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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고래]는 축복이자 멍에이다. 작품에 대한 끝없는 기대와 기다림 자체가 축복이자 그의 작품 세계를 한정 짓는 멍에다. 고래의 귀환을 바란 것은 독자뿐 아니라 작가도 마찬가지 였을 터. 하지만 그린 듯 생생한 인물도, 마법같은 이야기도 소설로 끌어오지 못했다.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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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탕이 끓는 동안


-정철훈-


감자탕은 끓을 기미도 없는데 

벌써 소주 한 병을 비워낸다 

털어놓을 것이 있다며 오랜만에 

감자탕집으로 불러낸 아내 

이쯤에서 고백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아직 견딜 만하다는 것인가 

갑자기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짜지직 허공을 찢는 보랏빛 줄번개

장대비는 쏟아지고 아내는 

익으려면 멀었다며 잔을 뺏는다 

감자와 돼지뼈가 삶아지는 동안 

빗방울은 출입구 문턱을 넘어 

무릎까지 튀어오르고 

한 번은 아내를 한 번은 창 밖을 쳐다보며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사내 

소주 한 병이 추가됐다 

아스팔트는 빗물로 찰랑거리고 

물은 흐르면서 세상을 비춘다 

버스도 행인도 가로수도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흐느적거리고 

소주 벌써 세 병째 

이쯤에서 털어놔야 하는데 

끝내 게워놓지 못한 나의 어둠 

금이 간 나의 실체 

번개에 천둥에 갈갈이 찟긴 

허공 같은 것!


아내의 자리에 애인이나 친구를 불러내어도 좋을 듯 싶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장식된 위생을 담보하는 색감의 가게면 안되리라. 먼저 직사각형의 유리가 세 개 끼워지고 맨 아래는 합판으로 가려진 미닫이 문이어야 한다. 여닫을 때도 너무 매끄러우면 돼지뼈가 안 익는다. 가게 이름은 굵은 페인트로 가게 주인의 필체로 적혀 있어야 한다. 그 밑에 약간 작은 크기의 안주가 줄줄이 적혀 있으면 좋다. 인쇄체의 글씨면 돼지뼛속 골수가 안 빠진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감자탕 김을 빼려고 열어 놓은 문 사이로 튀어 들어오던 빗방울, 답답함에 걷어 올린 정강이에 스며들던 빗방울의 한기, 시를 읽는 내내 바지 가랑이가 젖을 듯 하여 자꾸 만지작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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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10-22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로 관계는 없을듯 싶지만 왠지,
쇠주에 밥을 말아 잡숫다가는,
수화기 저편에서 ‘조오털입니돠~‘ 라고 답했다던,
조태일 선생이 떠오르는군요.

감자탕은 이제서 김이 올랐을 뿐인데,
쇠주가 벌써 세 병째라니...
끝내 털어놓지 못할 말을 삼키다가는
쇠주병만 늘어나더니
돼지뼈 골수가 다 빠지기도 전에
아내의 등에 업혀갈듯 한 이 느낌적인 느낌은
잘못된 느낌이었으면 싶습니다...



잉크냄새 2026-10-22 21:28   좋아요 1 | URL
술과 안주가 어울리는 장소가 있는데 감자탕은 시장 한 구석의 낡은 가게여야 멋과 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내의 등에 업혀간다면 축복받은 일이죠. 둥그런 탁자에 엎어져 방치되거나 새벽 문 닫을 때까지 돼지뼈 뒤적이는 서글픔에 비하면 말이죠. ㅎㅎ

차트랑 2026-10-23 07:51   좋아요 2 | URL
암요~
그렇고 말고요!

돼지뼈의 골수를 빼내야하는 판인데,
어디 인쇄체로 가당키나 하겠습니까요?

쥔장이 굵은 페인트 붓으로다가 꾹꾹 눌러 냅다 갈겨써야 골수를 빼낼 수 있습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신사골 감좌탕 교대점 만한 곳이 또 있나요...
가만보자.....
성수동 소문 안난 감좌탕집이요.
에이~그래도 교대점 감좌탕집 만은 못할듯요!



잉크냄새 2026-10-23 20: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너무 세련된 식당이면 왠지 감자탕 앞에 두고 포크와 나이프로 먹어야 할 듯한 부조화가 느껴집니다.
시장 구석 후미진 곳, 모퉁이를 돌면 지린내도 살짝 풍기는 그런 곳이어야 골수가 쏙쏙 빠집니다. ㅎㅎ

차트랑 2026-10-23 23:12   좋아요 2 | URL
포크와 감좌탕,
혹은 나이프와 감좌탕!

현대 미술 작품의 이름같은 느낌을 주는 이 느낌적인 느낌은
왠지 좋은 느낌 팍 주는걸요~

굴비 죄소응~~~!!

후다닥~~!

잉크냄새 2026-10-25 10:25   좋아요 1 | URL
오! 이런 굴비 오랫만이군요. ㅎㅎ

포크와 나이프와 감자탕이 있는 풍경은 아마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정도 되지 않을까요? ㅎㅎ

감은빛 2026-10-29 0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지만, 잉크냄새님의 감성도 너무 좋네요.
샷시가 살짝 어긋나 여닫을 때마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낡고 허름한 식당.
식탁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 있고, 의자는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여야 어울리겠지요.

맞은 편에 앉은 이가 아내라는 것이 인상적이네요.
과연 아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지? 화자가 털어놓지 못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전처가 채식을 해서 한번도 함께 감자탕 집에 가 본적이 없네요.
이혼한 후에 아이들과는 가끔 갔었습니다만.

잉크냄새 2026-10-31 09:54   좋아요 1 | URL
궁합이라는 말은 사람 사이에만 쓰는 단어가 아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레스토랑처럼 세련되고 밝은 탁자 아래에서는 돼지뼈도 좌불안석 부끄러워 익어갈 수가 없죠. 냄비도 좀 타 있고, 의자도 좀 삐걱거리고, 미닫이도 비명을 지르고, 젓가락도 짝이 맞지 않고.... 뭐 그런 부자연스럽고 조화롭지 않은 곳에서야 돼지뼈도 편안히 익어갑니다.

그러게요. 아내를 불러내어 돼지뼈를 앞에 두고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마힐 2026-10-29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감자탕에 소주 한병을 시작으로 제가 한국 가면 같이 한번 하시죠. ㅎㅎ 차트랑님께서 추천하신 교대점에서 하는 걸로 미리 선약 걸겠습니다. ㅎㅎ

잉크냄새 2026-10-31 09:56   좋아요 2 | URL
시장통 깊숙히 또아리를 튼 감자탕 집으로 가야 합니다. 골목 구석에서 지린내도 좀 나고, 발 밑에 토한 토사물도 좀 있고 ㅎㅎㅎ 너무 나갔네요.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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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죽기 살기로 읽어주세요' 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한다. 부모에 의해 저질러진 지옥 같은 가정 폭력의 피해 생존자로, 극심한 우울증으로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 울부짖는 엄마의 감정 배출 쓰레기통으로, 엄마가 뱉어낸 가래통을 비우러 안방으로 향하던 불안한 눈동자의 소녀로, 집안의 대를 자기 선에서 끊어버리자 다짐하는 삼남매의 둘째로, 책으로 맞으면서 자라 책을 쓴다고 자조하는 작가로...작가는 고통의 기억을 담담하게 끄집어내어 건조한 글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스스로 PTSD와 해리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내용이 일인칭이면서 관찰자 입장처럼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작가가 해리 상태로 그의 내면을 바라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추천의 글에는 '손끝을 뜨겁게 하는 사랑일까' 혹은 '결국 사랑의 자리를 남겨놓았더라' 는 글귀들이 눈에 띈다. 책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개인의 영역이니 왈가불가할 사항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만큼은 사랑이란 단어가 왠지 좀 불편하다. 읽는 내내 속 깊은 울음을 표출하지 못하는 불안한 눈동자의 작고 어린 소녀만이 보였다. 베란다에 쌓여있는 책더미 속 웅크린 몸 하나 들어갈 공간이 유일한 햇살이었던 작은 소녀, 언니의 자살을 너무 지쳐서, 기운이 없어서, 기운을 다 써서 죽어간 소진사 라고 불러야만 하는 낙심한 소녀만이 보였다. 얼마 전 뉴스에 세월호 생존 학생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학생이 생전 가장 힘들어한 부분이 '죽은 아이들의 몫까지 살아라'는 위로의 말이었다고 한다. 어설픈 선의의 위로가 섬뜩한 고통의 칼날이 된 경우이다. 왜 우리는 모든 감정의 앞에 긍정만을 두려는 것일까. 울분과 분노와 치욕은 드러내서는 안되는 감정일까. 고통과 슬픔만이 가질 수 있는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은 왜 쉽게 무시될까. 긍정만 표출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몸속에서 지방처럼 태워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는 꺼내고 말려야 아문다.  


작가가 기르던 노령묘 준이치의 죽음으로 책은 마친다. 물리적인 시간은 지나가고 기억만이 남았다. 작가가 맞이한 두 번의 죽음. 장녀형 인간의 의무감으로 소진사한 언니, 19년의 묘생을 자연스럽게 마친 준이치. 무지개 다리 너머 그 곳에서 언니 이슬과 준이치가 만난다. 힘들게 뱉어낸 그녀의 아픈 기억들이 잘 말라서 곱게 아문 상처가 되길 바래본다.


언니가 준이치를 만나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눌 것 같다.

"준이치, 나 랑이 언니 슬이야!"

"알아, 나는 랑이 짝궁 준이치야."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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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6-10-29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감정의 앞에 긍정만을 두려는 이유는 희망을 갖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어설픈 위로와 희망은 어쩌면 가장 안 좋은 감정만을 남길 수도 있었네요. 그러니 삶은 고통이 맞네요. 어떻게 살든 쉽지 않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벗어나기 위해 일어나야 하네요. 슬프면 슬픈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잉크냄새 2026-10-31 10:00   좋아요 1 | URL
희망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내가 스스로 느끼는 주체적인 희망과 누군가가 건넨 피동적인 희망, 그 희망의 방향이 삶일수도 때론 죽음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르챠는 일몰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쟌시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는 늦은 밤 11시 경이었다. 며칠 머물던 오르챠에서 쟌시로 떠난 것은 해가 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8시경 이었다. 당시 오르챠는 인도에서 꽤나 오지로 통하던 곳이었고 몇 대 되지 않는 택시는 이미 역으로 떠난 후였다. 오르챠에서 일행이 된 대학생 커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머물게 되었고 마칠 즈음에는 이미 한 대의 택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꽤나 난감한 시간을 보내고 식당 주인과 숙소 주인까지 발벗고 나서고서야 젊은 청년이 끄는 지붕이 없는 오토릭샤 한 대를 대절할 수 있었다. 18킬로 정도의 산길로 대략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작은 동네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니 검은 도화지를 하얀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거친 붓으로 몇 번 휙~휙~ 훒어 버린 듯 하늘은 온통 별들의 향연이었고 계곡 사이의 하늘은 붓의 뒷길을 쫓아가는 여정과도 같았다. 흥에 겨워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데, 릭샤 청년이 샛길로 빠져 들어갔다. 친구를 같이 태워가고 싶다길래 흔쾌히 허락하고 다시 콧노래에 빠져들었다. 친구를 태운 릭샤는 다시 길을 에돌아 나와 산길을 달려갔다.


삼십 분 내내 불빛 하나 없는 길을 오직 오토릭샤의 불빛에 의지해 달렸다. 근데 어느 순간 앞자리에 동승한 릭샤 청년과 그의 친구가 자꾸 속닥거리며 어깨 너머로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그 동작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고 마음 속에 의심의 덩어리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는 남미와 더불어 최악의 여행 난코스로 여겨졌다. 남자는 강도를 당했고 여자는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인도 여행 코스의 특성상 그런 소문들이 삽시간에 퍼졌는데 델리에서 택시 강도를 당한 동양인 여행자와 인도 중부 고어에서 강간 살해된 북유럽 여행자의 소문이 돌고 있던 시기였다. 곧 의심은 눈덩이처럼 커져 확신으로 바뀌었고 다음 소문의 당사자가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온 몸을 감쌌다. 인도인치고 건장한 체격의 두 청년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사건에 대비해 배낭 속에 몇 단위로 분할해 소지하던 돈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별다른 상해 없이 최소한의 돈만 지불하고 이 사태가 끝나기를 바라며 몸을 뒤척이던 순간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무언가 묵직한 물건이 느껴졌다.  


<매일 일몰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게 된다>


그건 일명 맥가이버칼로 불리던 스위스 군용 나이프였다. 칼을 발견한 순간 한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의 추가 균형을 맞추려는 듯 급격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모험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칼날을 펴 꺼내 들었다. 평소 과일이나 깍던 둔탁해 보이던 십 센티 길이의 칼날은 그날 따라 살의라도 품은 듯 하얗게 빛났다. 물론 나의 의도는 상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칼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하여 그 맘을 포기하기를 바란 것이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칼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최선인데 왠지 그들도 돌아보지 않았다. 칼의 존재를 모르고 달려들기라도 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식으로 칼의 존재를 알릴 것인가. 괜히 먼저 들이밀어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오르챠를 떠나올 때 대학생 커플이 건네준 사과 봉지가 생각났다. 배낭 옆에 들어있던 사과를 꺼내 깍았다. 그리고 잘라낸 사과를 칼과 함께 움켜 쥐고 두 청년의 어깨 사이로 들이밀었다. "eat ." 사과가 얹어진 칼을 본 것일까. 움찔 하는 그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행히 의도대로 칼의 존재는 알린 듯 했다. 쟌시역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나머지 사과 서너 개를 시간에 맞춰 깍았고 그들에 넘기고 나도 먹었다. 긴장감에 줄창 피워대던 담배 필터에 바짝 마른 입술이 달라붙어 떨어져 나왔고 필터에 찝찌름한 피가 묻어 나왔다. 문득 나의 모습이 아귀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사과가 건네지고 얼마 뒤 드디어 역의 불빛이 보였다. 릭샤가 정지하기 전 뛰어내려 길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릭샤 청년 둘도 릭샤에서 내려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무니 입술에서 또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안도감에 기이한 웃음이 터졌다. 한참 허리를 구부려 웃음을 뱉어 내었다. 담배를 다 피울 동안 두 청년은 말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떠나지 않지? 한참을 서로 응시하다 담배꽁초를 버리고서야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줄까 말까. 괘씸하기는 했지만 놀란 눈으로 서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다 심호흡을 하고 길을 건너 두 청년 앞에 섰다. 그리고 백 루피를 꺼내 건넸다. "one fifty, two hundred" 안도감에 따블을 건넨 것이다. 바라나시 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심장은 여전히 두근 반 세근 반 두근거렸다. 


난 이 사건을 재치로 위험을 넘긴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고 십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에서 다음 구절을 보고 말았다.


"인도에서는 시외에 나갈 때는 택시나 릭샤를 가릴 것 없이 운전석에 반드시 조수를 한 사람 태우고 둘이서 다닌다. 어쩌면 승객이 도둑으로 돌변할지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인도 기행 p89-


그러니까 말이죠, 사건을 릭샤 청년의 입장에서 재구성해보면,

<숙소 아저씨의 호출이 온 것은 어둠이 내린 저녁이었다. 몇 번을 거절했으나 반협박성 요구에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윗 동네에 사는 크리슈나가 같이 가주겠다기에 돌아오는 길에 여행자라도 태워 돌아올 요량으로 승낙했다. 탑승한 여행자는 한국인으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국인을 처음 보는 크리슈나도 그 모습이 재밌는지 연신 뒤돌아보며 웃었다. 오랫만에 만난 우리도 이런 저런 이야기로 즐거웠다. 시간이 지나니 콧노래가 그쳤다. 그리고 뭔가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뒤를 돌아본 크리슈나가 놀란 얼굴로 칼에 대해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했다. 칼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행객이 뭐가 아쉬워서 강도짓을 한단 말인가. 순간 우리 둘의 어깨 사이로 사과가 들이 밀어졌다. 사과 밑에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칼날이 함께 놓여 있었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수시로 사과와 칼날이 우리 둘의 사이를 파고 들었다. 돌아보니 입술에는 피가 붉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귀같았다. 드디어 역에 도착하니 건너 편으로 냅다 튀었다. 그리고 한참을 서서 웃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돈을 따블로 주고 헐레벌떡 멀어져 갔다. 저건 미친 놈이 틀림없다. fucking korean!>


<저들의 삶은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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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10-06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 순간에는 오싹하고도 무서웠을 것 같아요. 잉크냄새님의 재치가 돋보였네요. 후일담이라 맘 놓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ㅎㅎ

잉크냄새 2026-10-06 23:51   좋아요 1 | URL
저보다도 릭샤꾼과 친구가 오싹하고 무서웠을 겁니다. 둘이나 타고 강도를 당할뻔 했으니까요. 저도 재치라 생각했는데 법정 스님에 따르면 강도로 살짝 돌변한 상황이죠. ㅎㅎ

마힐 2026-10-07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쪽 다 몸은 현재에 여여하게 자기 할일을 했지만 속으로는 무수히 많은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네요. ^^ 지나고나서야 웃을 수 있지만 당시 상황엔 여러 개의 우주가 펼쳐졌네요. ㅎㅎ 사과를 깍을 때 맥가이버 음악이 머리 속에서 흘러 나왔을 것 같네요.

잉크냄새 2026-10-07 20:56   좋아요 1 | URL
지금에서야 빰빰빠바바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하는 맥가이버 음악이 어울릴 수 있는데 당시에는 빠밤빠밤~ 하는 조스 등장 음악이 더 어울렸을 겁니다.
역시 모든 건 지나고 나면 코미디....过去的就让他走

icaru 2026-10-07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반전이 있는 에피소드였네요 ㅋ읽으면서 손에 살짝 땀이 배어나왔네요! 법정스님의 <인도 기행>과 엮으시는 편집력도 ㅋ 그나저나 일몰사진 와아--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아련하고, 역사의 한장면(이 건축물에요 ㅋㅋ) 묻어 있네요. 저는 일몰 사진 보면 쓸쓸하달까 고독하달까 슬프달까 ㅎ

잉크냄새 2026-10-07 20:54   좋아요 0 | URL
여행하고 나면 남는 건 이런 에피소드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행할 때는 그냥 막 돌아댕기는 게 최고인가 봅니다.
일몰 사진은 뭐 항상 그렇죠. 괜히 센티해지고 멜랑꼴리해지고...ㅎㅎ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표현은 그 본뜻은 살벌한데 어감은 참 낭만적이네요.

카스피 2026-10-07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넘 멋지 십니다.저도 해외 여행가서 저런 멋진 사장 한장 남기고 싶네요^^

잉크냄새 2026-10-07 20:55   좋아요 0 | URL
허접한 사진 항상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Forgettable. 2026-10-07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포와 코미디는 한 갈래 라더니 ㅋㅋ 어제 읽었는데 오늘 오전에 이 상황을 상상하면서 큭큭 웃었습니다. 두려웠을 인도 청년 둘/ 잉크냄새님께는 죄송하지만요 ㅋㅋ

잉크냄새 2026-10-07 20:58   좋아요 0 | URL
어, 그러고보니 뽀님도 다녀오신 곳이네요. 어찌 무탈하게 나오셨나요? ㅎㅎ
인도 청년 둘은 그래도 택시비 따블로 그 마음 보상되지 않았을까요. 저는 바라나시 도착할 때까지 두근두근 했습니다. ㅎㅎ

감은빛 2026-10-29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놀라운 일화네요. 어떻게 사과를 깎으실 생각을 하셨어요?
저라면 초조함에 담배만 피울 뿐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서로가 서로를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네요.
어떻게 해야 그런 오해에서 함께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잉크냄새님이 무사히 돌아와 이런 멋진 글을 올려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잉크냄새 2026-10-31 09:50   좋아요 0 | URL
허둥지둥 두리번거리던 시야에 사과가 마침 눈에 딱 들어왔기 때문이죠. ㅎㅎ 사과가 없었다면 그 오해의 상황은 더 심각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허접한 글 항상 성의껏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이지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장애를 이유로 멈추지 않는 삶들의 이야기
권용덕 지음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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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개인의 불행이나 결핍으로 치부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상의 범주에 위치시키고 언제든 비정상을 차별할 근거 위에 서 있다. 문제는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의 구조에 있다. 동정과 시혜의 시선이 아닌 평등과 참여의 관계로 무게 중심을 이동해야 구조는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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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fox 2026-09-30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가 약한 부분중 하나인것 같아요.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고 다 같이 행복할수 있는 국가가 되면 좋을 것 같네요. 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인 것 같아요. 잉크냄새님 오늘도 행복히시고 건강하세요.

잉크냄새 2026-09-30 20:58   좋아요 1 | URL
장애를 보며 느끼는 동정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일텐데 그 밑에 무의식중 깔려있는 차별 의식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동정보다는 평등한 눈빛을, 시혜가 아닌 같이 참여하는 공동의 장을 요청하는 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