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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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죽기 살기로 읽어주세요' 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한다. 부모에 의해 저질러진 지옥 같은 가정 폭력의 피해 생존자로, 극심한 우울증으로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 울부짖는 엄마의 감정 배출 쓰레기통으로, 엄마가 뱉어낸 가래통을 비우러 안방으로 향하던 불안한 눈동자의 소녀로, 집안의 대를 자기 선에서 끊어버리자 다짐하는 삼남매의 둘째로, 책으로 맞으면서 자라 책을 쓴다고 자조하는 작가로...작가는 고통의 기억을 담담하게 끄집어내어 건조한 글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스스로 PTSD와 해리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내용이 일인칭이면서 관찰자 입장처럼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작가가 해리 상태로 그의 내면을 바라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추천의 글에는 '손끝을 뜨겁게 하는 사랑일까' 혹은 '결국 사랑의 자리를 남겨놓았더라' 는 글귀들이 눈에 띈다. 책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개인의 영역이니 왈가불가할 사항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만큼은 사랑이란 단어가 왠지 좀 불편하다. 읽는 내내 속 깊은 울음을 표출하지 못하는 불안한 눈동자의 작고 어린 소녀만이 보였다. 베란다에 쌓여있는 책더미 속 웅크린 몸 하나 들어갈 공간이 유일한 햇살이었던 작은 소녀, 언니의 자살을 너무 지쳐서, 기운이 없어서, 기운을 다 써서 죽어간 소진사 라고 불러야만 하는 낙심한 소녀만이 보였다. 얼마 전 뉴스에 세월호 생존 학생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학생이 생전 가장 힘들어한 부분이 '죽은 아이들의 몫까지 살아라'는 위로의 말이었다고 한다. 어설픈 선의의 위로가 섬뜩한 고통의 칼날이 된 경우이다. 왜 우리는 모든 감정의 앞에 긍정만을 두려는 것일까. 울분과 분노와 치욕은 드러내서는 안되는 감정일까. 고통과 슬픔만이 가질 수 있는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은 왜 쉽게 무시될까. 긍정만 표출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몸속에서 지방처럼 태워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는 꺼내고 말려야 아문다.  


작가가 기르던 노령묘 준이치의 죽음으로 책은 마친다. 물리적인 시간은 지나가고 기억만이 남았다. 작가가 맞이한 두 번의 죽음. 장녀형 인간의 의무감으로 소진사한 언니, 19년의 묘생을 자연스럽게 마친 준이치. 무지개 다리 너머 그 곳에서 언니 이슬과 준이치가 만난다. 힘들게 뱉어낸 그녀의 아픈 기억들이 잘 말라서 곱게 아문 상처가 되길 바래본다.


언니가 준이치를 만나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눌 것 같다.

"준이치, 나 랑이 언니 슬이야!"

"알아, 나는 랑이 짝궁 준이치야."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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