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토요일 오전 근무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떠나간 토요일 오후의 기숙사는 가을비처럼 눅눅하게 젖어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정문 언덕길 초입에서 빌린 <러브레터>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왔던 그 날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든 어둠이 스멀스멀 기숙사 거실을 찾아 들고 있었다. 을씬년스런 한기에 담요를 두르고 거실벽 한쪽에 기대어 튼 <러브레터>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거실 가득 남겼는데, 눈과 편지와 기억과 추억의 흔적들이 눈발처럼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었다. 눈밭에서 외치던 그녀의 외침이 한동안 거실 구석을 울린 후에,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을 열고 내 기억의 누군가에게 살짝 외쳐보았다. "오겐키데스카, 아타시와 겐키데스" 


그 느낌처럼 아련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12월 6일 사고사로 운명을 달리 했다. 다른 영화를 찾아보지 않았기에 그저 <러브레터>의 주인공으로만 기억되던 배우이지만 그의 죽음은 뭔가 과거 기억의 어느 한 부분을 살짝 건드려 움찔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 잘 가시길. 그 곳에서 소식 들려주시길. "아타시와 겐키데스" 라고 소리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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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12-18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디오테입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분이시네요. 저도 DVD를 거쳐 blue ray등 영화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비디오테입으로 모은 어린 시절의 영화들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테입이 들어갈 때 덜그럭 하는 소리가 지금도 너무 좋습니다. ㅎㅎ 이 영화 주연배우께서 돌아가셨죠... 이분 동생인가가 나카야마 시노부라고 이연걸의 정무문에서 나온 일본배우인 건 최근에 알았네요

잉크냄새 2024-12-19 09:31   좋아요 0 | URL
비디오가 아직도 잘 구동하나 보네요. 비디오가 그 명성을 넘겨준 지가 어언 20년은 다 되어가는데 관리 잘 하신 모양입니다. 비디오 테입이 오래 지나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현상은 없던가요? 그냥 궁금하네요. 그 소나기도 옛 흔적인지라....그 배우가 동생이었군요. 어딘가 닮은것 같기도 하네요. 하여튼 미모는 유전자의 힘인가 봅니다.

transient-guest 2024-12-19 13:02   좋아요 0 | URL
아직은 잘 돌아갑니다만 문제는 비디오 플레이어 같아요 점점 구하는 것이 어려워져서 지금 갖고 있는게 부서지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tv도 옛날 브라운관 tv 가 있어 가끔 사용하는데 이것도 문제네요 ㅜㅜ

잉크냄새 2024-12-20 09:28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 플레이어뿐 아니라 티브이도 연결잭이 달라 호환이 되지 않겠군요. 중고 시장도 매물이 없을것 같고....고민이시겠어요.

감은빛 2024-12-26 10:32   좋아요 1 | URL
와! 비디오 테입을 갖고 계시다니! 저는 몇년전에 이사하면서 갖고 있던 CD랑 DVD도 다 버렸어요. 이젠 노트북에 CD 플레이어도 없어서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정무문의 그 어여쁜 배우가 이 배우의 동생이었군요. 역시 유전자의 힘이네요.

잉크냄새 2024-12-26 22:17   좋아요 0 | URL
몇년전 창고를 정리하다 90년대에 구입한 aiwa가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플레이어는 멀쩡한데 들어볼 카세트테입이 없어서 여지껏 다시 처박혀 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24-12-27 03:38   좋아요 0 | URL
아날로그기계나 매체가 더 오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CD등 디지털은 아주 조금만 망가져도 못 쓰게 되는데 비디오나 카세트테입, LP는 더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4-12-26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배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 찍기 전에는 배우로서의 이미지 보다는 아이돌이였다고, 이 영화 하나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어요. 이와이 슌지 감독도 그래서 더 부담이었다고 들었어요. 세심한 감정 연기가 필요한데, 과연 이 배우가 잘 해줄지 확신이 없었다고.

저는 이와이 슌지 감독을 떠올리면 [4월 이야기] 라는 영화가 먼저 떠올라요. 진짜 재미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우산을 든 여주인공의 얼굴이 긴시간 잊혀지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잉크냄새 2024-12-26 22:13   좋아요 0 | URL
잊혀지지 않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하는 영화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가 봅니다. 전 러브레터에서 여배우가 눈덮힌 산을 향해 ‘오겡키데스까‘라고 외치는 잔상이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 곳이 훗카이도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영화 이후 훗카이도를 꼭 가봐야겠다는 환상이 생겼어요.

transient-guest 2024-12-30 09:40   좋아요 0 | URL
저는 4월 이야기의
잔잔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 시절 일본영화의 감성도요
우산을 든 마츠 다카코의 모습은 지금 봐도 너무 설렙니다 ㅎㅎ

감은빛 2024-12-30 11:31   좋아요 1 | URL
아, 그 배우 이름이 마츠 다카코군요. 이상하게 그분 얼굴은 선명히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시절 제 여동생이 큰 비디오 테이프 유통회사에서 일했었고, 당시 판촉물로 나온 티셔츠(마츠 다카코 님이 빨간 우산을 든 포스터 사진이 박힌)를 저에게 갖다줘서 꽤 오랫동안 입고 다녔었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4-12-30 14:40   좋아요 1 | URL
저도 일본 특유의 감성을 지닌 영화들이 좋더군요. 이와이 슌지를 이어 요즘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재밌더군요.
우산을 든 마츠 다카코를 검색해보니 역시 미인이네요. 설레일만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