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토요일 오전 근무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떠나간 토요일 오후의 기숙사는 가을비처럼 눅눅하게 젖어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정문 언덕길 초입에서 빌린 <러브레터>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왔던 그 날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든 어둠이 스멀스멀 기숙사 거실을 찾아 들고 있었다. 을씬년스런 한기에 담요를 두르고 거실벽 한쪽에 기대어 튼 <러브레터>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거실 가득 남겼는데, 눈과 편지와 기억과 추억의 흔적들이 눈발처럼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었다. 눈밭에서 외치던 그녀의 외침이 한동안 거실 구석을 울린 후에,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을 열고 내 기억의 누군가에게 살짝 외쳐보았다. "오겐키데스카, 아타시와 겐키데스"
그 느낌처럼 아련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12월 6일 사고사로 운명을 달리 했다. 다른 영화를 찾아보지 않았기에 그저 <러브레터>의 주인공으로만 기억되던 배우이지만 그의 죽음은 뭔가 과거 기억의 어느 한 부분을 살짝 건드려 움찔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 잘 가시길. 그 곳에서 소식 들려주시길. "아타시와 겐키데스" 라고 소리쳐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