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은 말하기 전에 몸으로 실천한다.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길을 정한다. 그리고 온 몸으로 그 길을 간다. 예리한 바늘 끝과 다소 뭉툭한 바늘의 귀, 극도로 심플한 바늘의 몸은 이 두 극점으로 자신의 외연과 내면을 소통시킨다. 바늘은 자기의 몸에 실을 꿰고 온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한다. 그리고 숨는다. 바늘은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들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지 않는다. 바늘이 자기의 몸을 빌려준 실만이 바늘이 지나간 자리를 증거할 뿐이다. 바늘에게는 아상我相이 없다. 찢어지고 떨어지고 조각나고 해진 것들을 이어 붙이고 매달아주고 기워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한다. 바늘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이어 붙이고 부활하게 한 옷감으로 증명된다. -p86-



-------------------------------------------------------------------------------------------------

마음은 한번 일어나며 그 자신을 완성하고자 한다. 다행히 바늘에게는 그 마음의 완성을 위해 부림을 당할 아상이 없다. 바늘이 부처고 장자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1-22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3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5-02-1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선우 님의 글을 저도 읽은 적이 있어요. 이런 류의 글을 참 잘 쓰죠. 이 책의 개정판을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마음산책, 이란 책도 비슷한 형태의 책인데 저자가 생각이 난 나네요. 사물에 대한 아포리즘이 탁월했는데 집에서 찾아 봐야겠어요. 좋은 책, 정보를 얻어 갑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 2025-02-13 20:21   좋아요 0 | URL
네, 김선우 작가는 사물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무심코 보아 넘기는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스한 시선이 이런 의미있는 글이 나오는 배경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