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때의 겨울방학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경찰의 탐문수사를 받던 친구가 방학을 맞아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 전라도 광양의 어느 마을이었다. 누군가를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았고 어두컴컴한 저녁 우리집의 문을 두드렸다. 혼자 보내기가 안쓰러웠던 난 가방에 주섬주섬 옷가지를 넣고 달랑 차비만 들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눈발이 간간이 날리던 생면부지의 객지에 여장을 푼 곳은 어느 허름한 함박집이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의 막노동에 일당 이만원, 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본 생명수당 삼천원. 도합 이만 삼천원. 적은 돈이었지만 차비로 써버리고 주머니속에 구겨진 천원짜리 몇장밖에 남아있지 않던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꺼이 생각한 것은 생명수당이었다. 생명수당의 이면에 깔린 가혹한 위험에 노출된 것은 차후의 문제라 치더라도, 아니 사전에 알았다 치더라도 변함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죽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던 나이였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였기 때문일것이다.
생명수당 삼천원의 옵션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위험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채찍이었다. 당시 우리는 삼사십미터 높이에서 안전띠없이 작업을 했었다. 가슴 졸이던 첫날 작업이 끝난 날, 우리는 나름대로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친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로. 당장 때려치우지 않은 것은 젊음의 오기와 오만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날 삼십미터 높이의 추락의 경험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직면했다. 며칠후 친구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또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친다고. 아마 친구가 초코파이를 사들고 들어온날이 그날부터일것이다. 이백원짜리 청자담배를 몇보루씩 쟁여놓고 혓바닥이 아프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가불을 받지 않던 상황이었다. 둘이 생명수당을 가불받기로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퇴근길에 초코파이를 생명수당만큼 사가지고 들어왔다. 오리온인지 동양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거의 한달 반 가량 우리는 퇴근후에 어두운 방문을 열어놓고 퍼질러 앉아 초코파이 한통과 쿨피스를 우악스럽게 먹어치우곤 했다.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집착한 것은 초코파이, 얼룩말, 말아톤이다. 얼룩말과 말아톤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겠는데 초코파이는 뭘까. 우리가 한달 반 동안 초코파이에 집착한 이유는 뭘까. 간단하지 않을까 싶다. 먹고 죽은 귀신 땟갈도 고운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