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서기 -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지고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우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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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6-3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랫만에 다시 읽는 시로군요. 다시 읽어도 좋은데요. 고마워요. 다시 읽게해줘서...^^

잉크냄새 2004-06-3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시절 연습장의 겉표지에 창백한 얼굴로 웃고 있던 소녀의 얼굴과 홀로 서기의 몇 구절들...
처음 쓴 어리숙한 연애편지의 편지지와 봉투에도 예외없이 이 창백하고 가녀린 소녀가 웃고 있었다...

icaru 2004-06-30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저 소녀들 그림...진짜..오랜만이네요~!

Laika 2004-06-3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보고 어찌나 반갑던지.....학창시절에 책받침과 연습장 겉장에 있던 그 애들...애들아, 반갑다. ^^

메시지 2004-06-3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갈피. 서점에서 정말 많이 나눠줬었어요. 도종환님의 시도 적혀있고... 정말 반갑네요.

잉크냄새 2004-06-3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윤님의 <홀로 서기> , 도종환님의 <접시꽃 당신>, 유안진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가 고등학교당시 연습장, 책받침을 휩쓸던 시절이었죠.
그림이야 당연히 저 가녀린 소녀들이었고 드물게 제임스 딘이 얼굴을 내밀곤 했죠.^^

호밀밭 2004-06-30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시가 유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봐요. 우리 때는 시도 유행을 타서 연습장에 적혀 있곤 했었는데. 저 소녀들 생각나요. 엽서도 있었고, 책갈피도 있었는데.
참참참 반갑네요. 시도, 소녀들도, 그리고 며칠 안 보이셨던 잉크냄새님도요.

갈대 2004-06-3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소녀들이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드물게 느끼는 세대차이네요^^;

tnr830 2004-06-3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두 넘 좋아하는 시예요^^;;
퍼갈께요^^

수련 2004-07-0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공감이 가는 싯구들입니다.
좋은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서재로 이동해도 되는 거죠?

잉크냄새 2004-07-0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비슷한 년배일꺼라 생각하는 분들은 이 시를 모두 기억하시는군요.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