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가 돌다. 윤기가 흐르다. 윤이 나다. 윤은 가만히 정체하는 빛이 아니라 흐르고-돌고-드러나는 ‘활동성의 빛’이다. 또한 반드시 물체의 표면에 나타나기에 ‘의존적인 빛’이기도 하다. 즉 빛 자체가 윤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 윤은 ‘존재를 떠받치는 밝음’이란 것. 일반적으로 빛이 (전구나 노을, 혹은 영사기처럼) 특정한 중심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데 비해, 윤은 사물의 표면에 고루 퍼진 채 공평하게 드러나는 ‘안온한 빛’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툇마루처림. -p175-






국민학교 6학년 교실은 오래된 목조 건물 3층이었다. 양쪽으로 목조 계단이 있었고 2층은 교무실로 3층은 6학년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실은 2층 복도 바로 옆에 자리해 있었다. 교실 바닥과 복도는 오랜 세월 세대를 이어 닦고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났고 김연아의 트리플 엑셀이 가능할 만큼 미끄러웠다. 목재 바닥의 윤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동 노동(?)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준비물로는 실과 시간에 직접 바느질해 만든 내복 재질의 걸레, 방앗간에서 얻어온 바카스 병에 담긴 들기름 찌꺼기, 그리고 새하얀 양초가 필요했다. 줄을 맞춰 앉아 바닥에 초를 칠하고 걸레에 기름을 묻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닦아 나간다. 1조가 가면 2조가 뒤를 잇고 걸레가 놓친 부분은 무릎팍이 다시 한번 닦아내어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고 지나간다. 어느새 교실과 복도는 들기름의 향긋한 내음과 걸레의 꼬릿한 냄새가 환상적으로 섞인 신비스러운(?) 향으로 가득 찬다.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숙제 검사라도 하듯 바닥 검사를 실시하면 은은한 바닥에서 끄물거리던 눈부심과 햇살 속에 가볍게 피어오른던 먼지의 은하수 길이 시작되곤 했다. 하교길에는 계단에 앉아 엉덩이 미끄럼을 타며 내려갔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엉덩이를 견뎌냈는지 계단 목재의 모서리는 둥글게 둥글게 변형되고 엉덩이 골을 따라 움푹 파여 있었다. 교장실에서 소리를 치며 나온 교장 선생님이 대머리였던 건 윤기로 떠오른 이 기억의 화룡점정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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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따뜻한 글. 읽으며 입에 절로 웃음이 맺히네요.

잉크냄새 2025-07-29 21:4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도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계신 듯 싶네요.
가끔은 이리 낡고 희미한 기억들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카스피 2025-07-28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국민학교 시절 학생들은 청소시간에 왁스나 양초로 바닥이 윤이나게 닦았다고 하더군요.만일 요즘 그랬다간 민원이다 뭐다 생 난리가 났을 겁니다ㅡ,.ㅡ

잉크냄새 2025-07-29 21:47   좋아요 0 | URL
네 그 아동 노동의 산 증인이 접니다. ㅎㅎ

감은빛 2025-07-29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덧이름 감은빛은 반질반질 윤이나는 검은 색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뜨다 감다의 그 감은 빛으로 빛을 감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이 덧이름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한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어느날 실명으로 감은빛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연락을 해와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그분은 아마 저도 실명일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을 했을텐데, 저는 실명이 아니라고 밝혀서 실망을 안겨드려 안타까웠습니다.

잉크냄새 2025-07-29 21:51   좋아요 0 | URL
가끔 감은빛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그런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었군요. 그래서 님의 글이 윤이 나는 것들처럼 평안해 보이는가 봅니다.

transient-guest 2025-07-29 23:38   좋아요 1 | URL
순우리말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을 뜻하는 우리말이 ‘미르-남자‘ ‘미리-여자‘라고 알고 있는데 혀에 착착 감기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25-07-31 22:30   좋아요 1 | URL
미르가 용의 순우리말이군요. 그럼 미르의 전설이 수컷용의 전설인거죠?

transient-guest 2025-08-01 06:27   좋아요 0 | URL
그 미르는 어떤 의미로 사용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용‘의 전설에 아마 남자격을 넣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 그것도 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

마힐 2025-07-30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 유리창 청소도 있었잖아요. 창 틀에 앉아 메리야스로 만든 걸레로 빡빡 닦았었는데... 걸레 없는 친구는 자기 양말 한 쪽 벗어서 닦고 그랬어요. ㅎㅎ 이제는 아동 노동 했던 시간도 그리워 지네요.

잉크냄새 2025-07-31 22:32   좋아요 0 | URL
아, 메리야스...ㅎㅎ 역시 유리창은 내복보다 메리야스가 잘 닦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