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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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놀이, 한참 배우의 길을 걸어오다가 얼마 전에 들어선 또다른 길, 화가라는 이름이 스스로 어색해서 그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뻘춤함을 느낀다고 해서 화가의 길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게 그림은 연기만큼 절대적인 것이니까.
무엇보다 내게 배우와 화가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얼굴이다. 배우가 쌀로 밥을 짓는 일이라면 화가는 그 찌꺼기로 술을 담그는 일 같다고 설명하면 어떨까. 같은 재료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 따라 결과물은 전혀 다르게 나온다.
운동선수처럼 독하게 훈련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 그렇게 밥과 같은 연기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나면 몸과 마음에는 잔여물이 생긴다. 연기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 그것을 끄집어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술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림이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연기에 정진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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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1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며 화가 놀이라 하네요. 재미있고 하고 싶어 해야 진짜가 나오겠지요.
멋진 배우네요. 연기의 허무를 그림으로 푼

이매지 2011-05-16 23:09   좋아요 0 | URL
읽고 있는 중인데 참 진솔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중간중간 실린 작품을 보는 재미도 쏠쏠.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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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9쪽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9쪽

처음엔 이치로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향후 30년 동안은 질 생각이 없다니, 모름지기 프로라면 그래야 한다. 승리만을 예감하는 '오만과 편견'이 프로를 아름답게 한다. 그런데 그는 졌다. 지고 난 후의 이치로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화를 냈고 굴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국가와 민족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후지 산이 무너진 것도 아니다. 한 수 잘 배웠노라고 말하고서 쿨하게 돌아섰어야 했다. 프로는 질 수도 있다. 패배조차 즐길 줄 아는 배짱이 프로의 미덕이다. 패배 이후의 첫번째 표정, 그것이 한번 프로를 영원한 프로로 만든다. -232쪽

그래서 '심플'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의미, 의미, 의미들. 국가, 민족, 국민 이런 거 빼고 그냥 심플하게 즐기면 안 되겠니?" '레종'씨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환상과 나쁜 환상이 있소. 멋진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국민이 하나 되었다는 환상, 좋지 않소. 그대에게 담백한 이성을 권하오." '시즌'씨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니까 쿨하게 가자고요. 스포츠도 인생도. 잊어요. 우리에겐 늘 다음 시즌이 있잖아요." 게임은 그저 담배 한 개비처럼 무의미하고 담백하고 또 신속히 망각될 때 아름답다. 그러니 화내지 마, 이치로. 굴욕이라니, 이치로. 당신은 그저 '게임'에 한 번, 아니 두 번 졌을 뿐이라고. -233쪽

5월은 쑥스러운 달이다. 기념일들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쑥스럽고 자식은 부모에게 쑥스럽고 제자는 스승에게 쑥스럽다. '안 하던 짓'을 할 때 우리는 민망해진다. 364일을 '하던 짓'만 해왔으니 별 수 없는 것이다. 주일날 회개하여 다시 일주일을 죄짓고 살 힘을 얻는 엉터리들처럼, 사랑이 넘치는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364일 동안을 무심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얻는다. 그러니 기념일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알리바이가 필요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말하자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어린이와 어버이와 스승을 위한 날이 아니다. 부모, 자식, 제자를 위한 날이다. 이것이 기념일의 역설이다.-236쪽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서 하는 말이다. 기념일의 역설 운운했지만, 어쩌면 이것조차 옛말이 아닌가. 스승의 날이 성립되려면 '스승'이 있어야 하고 스승이 있으려면 자신을 '제자'로 간주하는 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그분'의 제자라고 믿는 사람, 스승의 날에 별수 없이 쑥쓰러움을 느끼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스승의 날에 가장 쑥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스승의 날' 자신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있는 거지?" 사실을 말하자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스승은 TV와 인터넷이다. 거기서 무한경쟁 시대의 생존법과 서푼짜리 지식을 배운다. 오늘 누군가는 옷깃을 여미고 모니터에 카네이션 하나 달아주었으리라. -236~7쪽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환상이 있고 그 환상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그것이 무너지면 삶도 더불어 무너질 것이다. 그가 손목을 그은 이유다. 사랑은 이렇게 순수하면서도 병리적인 감정이다.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것이 '교환'일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 교환은 늘 어긋난다. 그가 원하는 것을 그녀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차라리 그가 갖고 있는 것을 망가뜨리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그의 전부였고 그래서 그 훼손은 치명적이었다. 반면 그녀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얻었다. 이렇게 사랑은 부조리한 교환이다. 5를 받아도 +5가 되지 않고, 5를 준다고 -5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적이고 또 사랑의 불행이다. -252쪽

선정성을 둘러싼 이 해프닝 속에서 외려 본질적인 것들은 간과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런 사례들이 '논란'의 대상이 될 만큼 내실이 있는 것이기는 한가. 이를테면 선정성에도 품격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은 갖추어야 선정성의 사회학을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주류 대중음악의 노랫말은 어설픈 영어 문장들로 맥락도 없이 '들이대는' 유혹의 수사학에 점령돼 있다. 논란은커녕 논의 자체가 불필요할 정도로 의미의 영양실조 상태다.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면 좋겠다. 한국 대중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매직 스틱과 크리스털보다 중요한 것들은 이 세상에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263쪽

확실히 우리네 애국심에는 어딘가 강박적인 데가 있는 것 같다. 잦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경험 탓이라고 설명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나치게 강박적인 애국심의 이면에 무의식적인 열패감이나 뿌리 깊은 자괴감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자신감이 여유를 낳고 여유가 관용을 낳는다. 사랑이 어디 주입과 단속의 대상일 것인가. 먼저 사랑할 만한 나라여야 사랑받을 것이다. 여유와 관용이 사랑할 만한 나라를 만들지 않겠는가.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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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초 이야기 - 할머니 탐정의 사건일지
요시나가 나오 지음, 송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아기자기한 표지도, "주인공 '소우'를 첫 장면부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등장시키는 것에 기분 좋은 놀라움을 느꼈다"라는 미미 여사의 심사평도 아닌, '할머니 탐정'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읽기 시작한 책. 할머니 탐정 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미스 마플. 글래디 골드 시리즈처럼 미스 마플을 오마주로 한, 몇몇 할머니 탐정이 등장했지만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 터라 일본의 할머니 탐정이 등장하는 <고운초 이야기>를 만났을 때도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소우 할머니를 처음 만난 그 순간. 어느새 나도 소우 할머니가 운영하는 고쿠라야의 자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그녀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대대로 잡화점을 운영해오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커피원두와 전통도기를 함께 취급하는 아담한 가게 '고쿠라야'로 업종을 변경한 소우 할머니. 젊은 시절 남편과 이혼하고 세 살 난 아들을 사고로 잃은 불행을 겪었지만 그런 상처 때문인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지켜봐주고, 배려해준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누구나 들어와 무료로 커피를 시음할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소우 할머니가 고쿠라야에서 고운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일종의 안락의자형 탐정과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의외로 소우 할머니는 현장형 탐정으로 때로는 치매 노인으로 내몰리고, 때로는 부치는 체력에 납치를 청부하는 등 어찌됐거나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마주한다. 

  대개의 일상 미스터리가 그렇듯이 <고운초 이야기> 역시 일상에서 있을 법한 소소한 사건들이 전개된다. 피가 난자하는 사건도, 복잡한 트릭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사건도 아니지만 소우 할머니가 만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특별하다. <고운초 이야기>의 사건들이 특별한 것은 그 사건이 소우 할머니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묻혔을지도 모를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고생들의 유령 목격담을 듣고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가정 폭력의 조짐을 눈치채게 되는 사건을 다룬 첫번째 이야기인 <고운초의 소우 할머니>만 봐도, 소우 할머니는 할머니라는 지위(?)가 주는 적당한 친근함과 오지랖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소소하지만 사랑스럽게 만든다.

  크게 보자면 가족 또는 친구에 대해 다루고 있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착한 미스터리. 점점 삭막해지고,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도 사라지는 요즘 <고운초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줬다. 염세주의적인 면모에 성악설을 지지(?)하는 미스 마플과는 달리 낙천주의적인 면모에 성선설 쪽으로 보이는 소우 할머니. 서로 다른 면모를 보이지만 두 할머니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인 듯. 미스 마플과 비교하며 읽어도, 평범하게 일상미스터리를 즐기듯 읽어도 모두 만족할 수 있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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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4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상오단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상류 계급의 영애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비밀독서모임에 관한 이야기인 <덧없는 양들의 축연>을 읽으며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바벨의 모임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연작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한편으로는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오싹한 이야기 모음집 정도였던 <덧없는 양들의 축연>. 전체적으로 암흑 동화를 읽는 듯한 분위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기에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나 <인사이트 밀> 등 다른 출간작도 읽어봐야 하겠다고 생각만 하고 미뤄오던 차에 <추상오단장>이라는 당췌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제목의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휴학을 하고 잠시 큰아버지의 헌책방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하고 있는 요시미츠. 어느 날, 한 여성이 찾아와 얼마 전 한 학자에게 인수한 장서 중에 있을 <호천>이란 동인지를 사고 싶다고 한다. 마침 그 동인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요시미츠는 큰아버지의 허락하에 비교적 쉽게 그 잡지를 판매한다. 하지만 잡지를 받아든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의 필명이 카노 코쿠뱌쿠라고 밝히며 그의 다른 작품도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거액을 제안한다. 이에 마음이 동한 요시미츠. 작은 실마리를 통해 카노 코쿠뱌쿠의 작품 네 편을 찾기 시작하는 요시미츠. 기묘한 분위기의 '리들 스토리'를 읽으며 뭔지 알 수 없는 과거의 늪에 조금씩 빠져드는 요시미츠. 22년 전 앤트워프의 총성이라고 불렸던 미결 사건의 실마리가 카노 코쿠뱌쿠가 남긴 소설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정교한 트릭이 등장한다는 식의 정통파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이 책은 다섯 개의 리들 스토리라는 각각의 조각을 통해 커다란 그림을 잘 짜맞춰나가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단지 아버지가 필명으로 남긴 원고를 찾는 모험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액자식 구성으로 요시미츠가 찾아내는 다섯 편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과거 미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책에 대한 책'이라는 설정 자체도 독자를 반색케한다. '신비' 또는 '기묘'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적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도, 내용도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그것은 아마 이야기라는 괴물이리라)가 살아 숨쉬는 듯했다. 유능한 탐정도, 머리를 아프게 하는 트릭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추상오단장>을 빛나게 하는 것은 작가의 필력이었다. 좋은 이야기가 갖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멋진 작품. 읽고 나니 개운한 맛이 나는 추리소설. 오랫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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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09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 독서 모임이라~
님이 개운하다고 하시니 궁금하네요

이매지 2011-05-10 10:16   좋아요 0 | URL
비밀 독서 모임에 대한 책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이라는 책이예요^^
어느 작품을 읽으셔도 만족하실 거예요^^
 
고운초 이야기 - 할머니 탐정의 사건일지
요시나가 나오 지음, 송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절판


시골생활의 궁색함은 빤히 얼굴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쳐진, 사슬로 만든 거미줄을 서로 잡아당기는 데 있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이나 다른 것을 시도하려면 무겁게 칭칭 얽매인 쇠사슬을 풀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진을 빼야 한다. 실제로 소우의 결혼이나 이혼 때, 고쿠라야를 신축할 때에도 우는 사람, 화내는 사람, 웃는 사람, 점을 치는 사람 등이 친척이나 친구가 아닌데도 마구 몰려들었다. 당사자가 원한다면 모를까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거리와 세대가 바뀌어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소원해진 지금이 소우로서는 편했다. -20~1쪽

남의 일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 치매노인으로 의심받은 데 대한 억울함에 오른쪽으로, 놀림감이 된 데 대한 창피함으로 왼쪽으로 돌아눕다, 결국에는 손자뻘 되는 경찰에게 이성을 잃고 화를 낸 데 대한 한심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각오도 하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건만 결국 그건 나만이 늙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고기와 야채를 써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53쪽

근육은 운동으로 파괴된 조직을 재생시켜 강하게 만들지. 생각해보면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야. 때로는 번거롭게 느껴지는 사람들과의 교제나 타인과의 충돌을 반복하면서 기반이 생기고 무거운 것도 들 수 있는 힘도 키워지지. 운동을 하면 근육통이 생기지만, 그것을 무서워하기만 하면 자꾸 약해지기만 해.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도 그런 걸. -164쪽

테이블 옆 쓰레기통에 버려진 주먹밥이 썩어가고 있었다. 소우는 이건 도우미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못 본 척했다. 본래 그 쓰레기통은 못 쓰는 종이만 넣던 것인데, 지금도 유키노의 몸상태가 좋았다면 귤껍질 같은 것도 주방의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친구의 성격을 아는지라 자칫 자신이 청소를 해주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자신의 자잘한 실수나 실패를 깨닫고는 쓸쓸히 미소 짓는 유키노의 모습을 되도록이면 보고 싶지 않았다.
소우는 유키노가 탄 배의 뱃머리가 조금씩 각도를 바꿔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함께 흘러왔던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서서히 돌아서 결국엔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결국 상대도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전사한 오빠의 군복 입은 모습을 처음 보던 날, 열일곱에 죽은 여동생이 병상에서 어른스런 표정을 보여주었던 저녁 무렵, 결국 이혼하게 된 남편을 잠도 자지 않고 기다리던 수많은 밤에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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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0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탐정이라 와 궁금하네요

이매지 2011-05-08 12:01   좋아요 0 | URL
따뜻한 탐정이예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