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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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9쪽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9쪽

처음엔 이치로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향후 30년 동안은 질 생각이 없다니, 모름지기 프로라면 그래야 한다. 승리만을 예감하는 '오만과 편견'이 프로를 아름답게 한다. 그런데 그는 졌다. 지고 난 후의 이치로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화를 냈고 굴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국가와 민족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후지 산이 무너진 것도 아니다. 한 수 잘 배웠노라고 말하고서 쿨하게 돌아섰어야 했다. 프로는 질 수도 있다. 패배조차 즐길 줄 아는 배짱이 프로의 미덕이다. 패배 이후의 첫번째 표정, 그것이 한번 프로를 영원한 프로로 만든다. -232쪽

그래서 '심플'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의미, 의미, 의미들. 국가, 민족, 국민 이런 거 빼고 그냥 심플하게 즐기면 안 되겠니?" '레종'씨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환상과 나쁜 환상이 있소. 멋진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국민이 하나 되었다는 환상, 좋지 않소. 그대에게 담백한 이성을 권하오." '시즌'씨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니까 쿨하게 가자고요. 스포츠도 인생도. 잊어요. 우리에겐 늘 다음 시즌이 있잖아요." 게임은 그저 담배 한 개비처럼 무의미하고 담백하고 또 신속히 망각될 때 아름답다. 그러니 화내지 마, 이치로. 굴욕이라니, 이치로. 당신은 그저 '게임'에 한 번, 아니 두 번 졌을 뿐이라고. -233쪽

5월은 쑥스러운 달이다. 기념일들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쑥스럽고 자식은 부모에게 쑥스럽고 제자는 스승에게 쑥스럽다. '안 하던 짓'을 할 때 우리는 민망해진다. 364일을 '하던 짓'만 해왔으니 별 수 없는 것이다. 주일날 회개하여 다시 일주일을 죄짓고 살 힘을 얻는 엉터리들처럼, 사랑이 넘치는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364일 동안을 무심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얻는다. 그러니 기념일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알리바이가 필요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말하자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어린이와 어버이와 스승을 위한 날이 아니다. 부모, 자식, 제자를 위한 날이다. 이것이 기념일의 역설이다.-236쪽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서 하는 말이다. 기념일의 역설 운운했지만, 어쩌면 이것조차 옛말이 아닌가. 스승의 날이 성립되려면 '스승'이 있어야 하고 스승이 있으려면 자신을 '제자'로 간주하는 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그분'의 제자라고 믿는 사람, 스승의 날에 별수 없이 쑥쓰러움을 느끼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스승의 날에 가장 쑥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스승의 날' 자신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있는 거지?" 사실을 말하자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스승은 TV와 인터넷이다. 거기서 무한경쟁 시대의 생존법과 서푼짜리 지식을 배운다. 오늘 누군가는 옷깃을 여미고 모니터에 카네이션 하나 달아주었으리라. -236~7쪽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환상이 있고 그 환상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그것이 무너지면 삶도 더불어 무너질 것이다. 그가 손목을 그은 이유다. 사랑은 이렇게 순수하면서도 병리적인 감정이다.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것이 '교환'일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 교환은 늘 어긋난다. 그가 원하는 것을 그녀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차라리 그가 갖고 있는 것을 망가뜨리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그의 전부였고 그래서 그 훼손은 치명적이었다. 반면 그녀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얻었다. 이렇게 사랑은 부조리한 교환이다. 5를 받아도 +5가 되지 않고, 5를 준다고 -5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적이고 또 사랑의 불행이다. -252쪽

선정성을 둘러싼 이 해프닝 속에서 외려 본질적인 것들은 간과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런 사례들이 '논란'의 대상이 될 만큼 내실이 있는 것이기는 한가. 이를테면 선정성에도 품격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은 갖추어야 선정성의 사회학을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주류 대중음악의 노랫말은 어설픈 영어 문장들로 맥락도 없이 '들이대는' 유혹의 수사학에 점령돼 있다. 논란은커녕 논의 자체가 불필요할 정도로 의미의 영양실조 상태다.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면 좋겠다. 한국 대중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매직 스틱과 크리스털보다 중요한 것들은 이 세상에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263쪽

확실히 우리네 애국심에는 어딘가 강박적인 데가 있는 것 같다. 잦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경험 탓이라고 설명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나치게 강박적인 애국심의 이면에 무의식적인 열패감이나 뿌리 깊은 자괴감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자신감이 여유를 낳고 여유가 관용을 낳는다. 사랑이 어디 주입과 단속의 대상일 것인가. 먼저 사랑할 만한 나라여야 사랑받을 것이다. 여유와 관용이 사랑할 만한 나라를 만들지 않겠는가.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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