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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오단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상류 계급의 영애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비밀독서모임에 관한 이야기인 <덧없는 양들의 축연>을 읽으며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바벨의 모임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연작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한편으로는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오싹한 이야기 모음집 정도였던 <덧없는 양들의 축연>. 전체적으로 암흑 동화를 읽는 듯한 분위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기에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나 <인사이트 밀> 등 다른 출간작도 읽어봐야 하겠다고 생각만 하고 미뤄오던 차에 <추상오단장>이라는 당췌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제목의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휴학을 하고 잠시 큰아버지의 헌책방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하고 있는 요시미츠. 어느 날, 한 여성이 찾아와 얼마 전 한 학자에게 인수한 장서 중에 있을 <호천>이란 동인지를 사고 싶다고 한다. 마침 그 동인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요시미츠는 큰아버지의 허락하에 비교적 쉽게 그 잡지를 판매한다. 하지만 잡지를 받아든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의 필명이 카노 코쿠뱌쿠라고 밝히며 그의 다른 작품도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거액을 제안한다. 이에 마음이 동한 요시미츠. 작은 실마리를 통해 카노 코쿠뱌쿠의 작품 네 편을 찾기 시작하는 요시미츠. 기묘한 분위기의 '리들 스토리'를 읽으며 뭔지 알 수 없는 과거의 늪에 조금씩 빠져드는 요시미츠. 22년 전 앤트워프의 총성이라고 불렸던 미결 사건의 실마리가 카노 코쿠뱌쿠가 남긴 소설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정교한 트릭이 등장한다는 식의 정통파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이 책은 다섯 개의 리들 스토리라는 각각의 조각을 통해 커다란 그림을 잘 짜맞춰나가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단지 아버지가 필명으로 남긴 원고를 찾는 모험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액자식 구성으로 요시미츠가 찾아내는 다섯 편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과거 미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책에 대한 책'이라는 설정 자체도 독자를 반색케한다. '신비' 또는 '기묘'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적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도, 내용도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그것은 아마 이야기라는 괴물이리라)가 살아 숨쉬는 듯했다. 유능한 탐정도, 머리를 아프게 하는 트릭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추상오단장>을 빛나게 하는 것은 작가의 필력이었다. 좋은 이야기가 갖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멋진 작품. 읽고 나니 개운한 맛이 나는 추리소설. 오랫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