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함을 없게 하라 - 조선의 법의학과 <무원록>의 세계, 역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1
김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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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드라마 '별순검'에서 우리 고유의 법의학을 만난 적이 있다. 독살을 확인하기 위해 은비녀를 입이나 항문에 꽂아 확인하는 모습이나 술지게미를 이용해 사체의 상흔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 등은 그동안 'CSI'류의 과학수사가 등장하는 외국 드라마 못지 않게 재미있었다. 아쉽게 '별순검'은 시청률 문제로 막을 내렸지만 드라마 속에서 나온 수사방법에는 꽤 관심이 갔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언급한 <신주무원록>을 읽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선뜻 손을 못대고 있던 차에 조선의 법의학에 관해 쓰여진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부담없이 선택하게 됐다.

  사실 책을 보기 전에 책 소개에서 '정약용의 사건 파일'이라는 부분이 있어서 어떤 살인사건을 정약용이 조선시대의 법의학의 방법을 통해 해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읽어보니 그 부분은 하나의 예로 짤막하게 등장할 뿐이고 독을 먹고 죽은 경우, 목을 매고 죽은 경우, 물에 빠져 죽은 경우, 구타당해 죽은 경우, 칼날에 맞은 경우, 불에 타 죽은 경우, 병들어 죽은 경우, 부녀자가 죽은 경우, 얼어죽은 경우, 실족하여 죽은 경우, 눌려 죽은 경우, 수레에 치여 죽은 경우 등등 각가지 죽음의 경우에 이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하는 설명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책의 구성 면에 있어서 차라리 돈이 좀 들었더라도 사진을 실어놓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삽화(조악한 느낌까지 들었다)나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얇은 책임에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용도 서술이 아니라 거의 단순한 나열로 이루어져 읽는 이들에게 다소 지루함을 안겨준 것 같다. 시체의 조사와 수사에 있어서 원통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조사했던 선조들의 정신은 물론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수사법과 구체적인 사례는 책을 덮고나서도 아닌 몇 페이지만 넘겨도 벌써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인상이 깊지 않았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이 책은 이런 이런 구슬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만 하고 있을 뿐 그 구슬을 꿰어내어 하나의 글로 이어가기엔 부족함이 많은 책이었다.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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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2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어설프죠 ㅡㅡ;;;

이매지 2006-09-2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어설펐어요. 이 좋은 소재를 이렇게밖에 못 쓰나 싶더라니까요
 
가로세로 세계사 2 : 동남아시아 - 동방의 천년 문명이 열린다 가로세로 세계사 2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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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을 떠올려보면 드는 생각은 앙코르와트의 유적이나 요즘 부쩍 자주 볼 수 있는 베트남 쌀국수, 아니면 많은 관광객들이 가는 곳(외국으로 졸업여행가는 친구들은 거의 동남아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정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동남아시아 국가의 역사에 대해 짧게나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 타이, 캄보디아, 필리핀, 싱가포르,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동티모르,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의 11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때문인지 일단 책은 단순한 나열식의 서술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지역의 역사가 대개 비슷비슷해서 그런지 읽다보면 A국의 역사가 B국의 역사같고, B국의 역사는 C국의 역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됐다. 몇몇 특색있는 역사를 가진 국가(예를 들어,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카톨릭 교도가 80%가 넘는 국가고, 이들의 독립은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자존심과 이익을 위해였다.)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식민지 지배, 민족주의 운동, 독립, 민주주의 혼란기, 쿠데타 군부통치, 민주화'의 비슷한 길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분리-독립한 브루나이와 동티모르, 그리고 작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외국의 침략세력(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에스파냐)에 고통을 받았다. 이후 2차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전 지역이 일본에게 점령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는 이들 지역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유입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도 한다. 즉, 이들 지역의 국가가 밟은 노선은 우리가 밟은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 동족간의 전쟁, 외세에 의한 분단, 민주주의의 유입, 경제적인 발전. 이런 요소들은 우리와 동남아 모두 아픔을 딛고 일어선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와의 많은 공통점을 가진 국가들이라 관심이 갔고, 또 그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 공감할 수도 있었고 그들과 한 편이 되서 응원의 박수도 보낼 수 있었지만 왠지 그들의 역사를 너무 수박겉핥기식으로 바라본 게 아닌가하는 느낌도 없지않았다. 총 11개 국을 다루고 있지만 각 국에 할당된 페이지는 끽해야 20페이지 남짓이다. 그래서인지 각 국의 역사도 시작부터 거슬러올라간 것이 아니라 '이런 이런 왕조를 거쳤다.'식의 간략한 서술만 하고 간략하게 언급만하고 지나가고 주가 되는 것은 식민지 침략부터다. 이 때문에 그 민족과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점들을 놓치고 있는 점들도 많은 것 같고, 다소 반복되는 서사로 독자에게 지루함을 안겨줄 여지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지 국가가 아닌 피식민지 국가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너무도 가볍고, 깊이가 없어보였다. 청소년이나 어린이들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적이라면 괜찮겠지만 이 책 한 권만으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한다는 건 부족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많은 동남아史를 찾아볼 수 있는 기회는 되어줬지만 아쉬움이 많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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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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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니 대체 이게 뭐야?'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쭉 이해가 잘 되다가 마지막에 마치 돌고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가는 이야기의 구조가 너무도 혼란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는 이야기. 이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인 <기다리는 사람들>에서는 우연히 회장님의 초대를 받아 가게 된 평범한 남자인 고이치. 그 곳에서 그는 회장님의 친구분들에게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제목의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익명의 작가가 자비로 200부만 제작한 책으로 작가를 밝히지 말 것과 사본을 만들지 않은 것, 친구에게 빌려줄 경우에는 단 한 사람뿐, 그것도 하룻밤만 빌려줄 수 있다는 기이한 조건을 건 책이라는 점과 함께 작가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회수를 시작했다는 점까지 온통 묘한 이야기가 얽힌 책이다. 바로 그 책을 빼곡하게 책이 쌓여있는 집에서 찾고 있다는 회장님과 그의 친구들. 힌트는 '붉은 석류'뿐. 과연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찾아낼 수 있을까?  2장인 <이즈모 야상곡>에서는 앞서 언급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숨겨진 작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3장인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에서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과는 동떨어진 배다른 자매의 이야기가 등장하고(여기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앞으로 쓰여질 이야기로 등장한다), 4장인 <회전목마>에서는 마침내 작가의 입장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쓰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자신의 글쓰는 방식과 같은 이야기를 진행해간다.

  각기 다른 방식과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있는 4가지 이야기가 저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을 두고 돌아가고 있다. 총 4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지만 책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작가 문제를 논할 때 나오는 말처럼 이 4가지 이야기는 저마다의 작가가 쓴 것처럼 느낌이 묘하게 다르다. 앞선 두가지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완결성도 지니고있고, 구성도 어렵지 않아서 쉽고 재미있게 읽혔던 반면에 세번째 이야기에서는 약간의 공포소설 같은 느낌을, 네번째 이야기에서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나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낳고, 하나의 전설은 또 하나의 전설을 낳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묘하게 남아 오롯이 완성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가상의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물론 가상의 세계이긴 하지만 책 속에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극찬하고 찾아 헤매는 그 책을 나도 한 번 맛보고 싶다는 묘한 욕심이랄까? 이전에 읽었던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이 미스터리하면서 따뜻함을 그려냈다면 이 책은 따스함보다는 한 권의 책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그런 감질맛나는 긴장감에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4장인 회전목마에서 실마리가 등장했을 때, '아, 그렇구나!'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이야기. 그 이야기는 내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안쪽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바깥쪽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오가며 느낀 재미와 긴장감은 어떤 소설과 비교할 수 없을 듯. 책을 읽으며 스르르르 내 몸이 진창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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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2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렁에 빠진 느낌입니다^^

이매지 2006-09-2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흑과 다의 머시기 (벌써 까먹은) 그 책 나왔으면 좋겠어요!
굽이치는 강가에서도 곧 읽을 예정이예요^^

마늘빵 2006-11-25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매지님 4등 하셨네요. 저두저두. ^^ 축하해요.

이매지 2006-11-25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도 축하드려요^^
저 다른 리뷰에 비해서 길이도 짧고 질도 떨어져서 좀 민망해요 ㅠ_ㅠ
 
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구판절판


회장님 가라사대,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책을 읽는 인간과 읽지 않는 인간 -15쪽

인생은 내기다. 이건 진짜라네. 나이만은 먹을 만큼 먹은 우리가 하는 말이니까 틀림없어.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나름의 위기를 헤쳐왔으니까. 인간은 한순간, 한순간 내기를 하면서 살고 있네. 순간순간을 선택하면서 산다고 바꿔 말해도 되겠지. 자네는 간장맛 쌀과자를 골랐네. 이 가네코 신페이가 12배로 건 긴고도의 참깨과자가 아니라, 잇시키 류세이가 3배로 건 '소프트 샐러드'를 집었어. 사메시마 고이치는 그것을 자기 의사로 골랐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고르게 했을까?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는 영역이네만, 자네는 이처럼 흐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죽음이 찾아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을 계속하는 것이네. -26~7쪽

하지만 말이에요, 재미있는 책은 읽힌다,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실 환상이에요. 우리가 대단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조차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읽힌다고는 할 수 없죠. 재미가 있는데도 알려지지 않은 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 인정을 받고 못받는 것은 운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해요. 내가 천국까지 갖고 가고 싶다. 내 뒤에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꼭 읽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후세에 남는 건 아니거든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건 여기 있는 우리들과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독서란 본래 개인적인 행위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책을 좀 읽는다고 자만하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도 터무니없는 환상이에요. 인간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거든요. 서점에 가면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늘 절망합니다. 내가 읽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수효의 책들 중에 내가 모르는 재미가 넘치는 책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어요. -57~8쪽

미스터리 팬은 본래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인종이다. 미스터리로 읽을 수만 있다면, 다른 장르에서 진출해 오든 새로 개척하든 뭐든지 환영이다. 순수문학이든 논픽션이든, 매력적인 수수께끼가 많고 문장도 능숙하고 분위기가 있으면 오케이. 소도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은 커진다. -142쪽

넌 몰라. 여자는 여자 그 자체를 질투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미래를 질투하는 거야. 어떤 멋진 사람을 만나서, 어떤 식으로 사랑받을지 상상하지. 그리고 그 여자가 사랑받는 자기이 행운에 만족하고 우월감을 느낄 걸 상상하면서 질투하는 거야. 난 아무리 아름답고 복받은 여자라도 감수성이 없는 여자는 질투하지 않아. 설령 어린아이라도, 자기를 꼭 끌어안고 싶어지는 기쁨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여자만 질투한단다. -156쪽

예를 들어, 순수문학이었다면, 소설의 무대가 조그만 상자 안이든,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세계든 상관없지. 하지만 미스터리는 반드시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연기되는 거라고. 순수문학이라면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써도 상관없어. 하지만 미스터리는 그런 일이 용납되지 않거든.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이상야릇한 '안티 미스터리'는 예외로 하고, 추리소설은 그 성질상 반드시 독자의 이해와 의식을 어딘가에 염두에 두고서 쓰지 않으면 안돼. 그런 제약이 있어 재미있는 거고. 추리소설만큼 제 3자의 눈을 신경 쓰면서 쓰는, '밖을 향한' 소설은 없다고. 그런데 <삼월>에는 그런 부분이 없어. 관객은 없는데, 존재하지 않는 관객의 의식은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점이 묘해 -168쪽

시작 부분을 쓰고 나면, 이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없을지 대부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읽기 시작한 순간에 그 책이 재미있을지 없을지 알게 된다. -318쪽

어째서 인간은 '잘 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을까? 이야기의 내용에 감동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 삶과 죽음의 갈등, 아낌 없이 주는 사랑,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이입한다. 그것은 알겠다. 하지만 '잘 된 이야기'에 대한 감동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감동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들어맞았다는 쾌감이다. 어째서 쾌감일까? 그리고 '잘 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인간에게는 몇 종류의 이야기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리라. 입력된 이야기와 일치하면 빙고(!) 상태가 된다. 어째서? 픽션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제4 욕망인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아마도 상상력이라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 때문이리라. 픽션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날부터 우리는 고독하고 복잡하며 불안정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343~4쪽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원에 쭉 뻗어 있는 도로. 물이 고여 있는 수로. 하얀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중학생. 변두리에 있는 네모난 대형 쇼핑몰. 비슷비슷한 모양의 단독주택. 눈에 익은 간판이 달려 있는 주유소. 흔하디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녀는 늘 속고 있는 기분이 든다. 겉모습만의 도시, 겉모습만의 거리. 진짜 모습은 이렇지 않다. 한낱 지나가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진짜 얼굴을 보여줄 리가 없다. 어딘가 진짜 모습이 있을 것이다. 낯선 목소리, 낯선 얼굴, 낯선 이야기가. 그녀는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꼬리가 비어져나와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신경이 쓰인다. 어딘가에 진짜 세계의 자투리가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창밖의 풍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지금까지 발견한 예가 없기는 하지만. -36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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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파더 스텝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1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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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부동산 문제, 신용불량 문제 등 사회문제라는 묵직한 소재 혹은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로 찾아왔던 미야베 미유키였기에 그녀가 가벼운 소설을 썼다고 하는건 다소 익숙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간 그녀를 작품을 통해 만나오면서 자연스레 발생한 믿음감에 한 번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볼까하고 책을 폈는데 정말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었다.  

  변호사 출신인 아버지는 여러 명의 도둑을 점조직으로 거느리고 훔쳐도 될만한 곳에 있는 돈을 훔쳐 어려운 사람을 돕곤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아들은 아버지의 밑에서 그가 할당해주는 일을 맡아서 하며 살아간다. (뭐 그렇다고 해서 로빈후드와 같은 의적은 절대 아니고, 그저 프로 도둑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큰 유산을 상속받은 여자의 집을 털기 위해 한적한 마을로 간 그는 재수없게도 번개에 맞는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말을 번갈아하면서 한다. 알고보니 도둑질하려고 했던 옆집에 사는 쌍둥이 형제에게 발견된 것. (원래 그의 계획은 옆집의 지붕을 이용해 건너가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 쌍둥이들은 엄마와 아빠는 각자 애인과 도망가버렸다고 하며 그에게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말한다. 이런 황당할데가! 하지만 그들은 그 사람이 도둑이라는 점도 알고 있고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해버릴 기세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스텝파더가 된 사내. 그는 쌍둥이 형제와 갖가지 사건을 겪게 되는데...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 책 속에는 도둑인 스텝파더와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흔히 쌍둥이들이 벌이는 장난인 서로 바꿔서 학교 가기와 같이 자신의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이야기 등도 물론 등장하지만 그보다 묘한 구성의 이 부자가 일상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을법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맛깔나게 진행되어간다. 쌍둥이의 도움을 받아 원래 털려고 했던 집을 성공적으로 터는 일에서부터(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비밀도 해결) 여행을 간 쌍둥이들이 가방을 도둑맞자 도움을 주기 위해 내려갔다가 우연히 미술관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 쌍둥이들의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가는 이야기, 쌍둥이의 집 인근 호숫가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시체때문에 생겨나는 우여곡절, 쌍둥이의 납치사건 등등. 이들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를 제법 풍기게 된다. 그에 반해, 아이들의 친부모는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이 아이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찾아오지는 않고 전화로만 안부를 묻고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는지 어쨌는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그저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묘한 조합의 가족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문득문득 이 분열된 진짜 가족에 대한 씁쓸함이 들기도 했다.  

  총 7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어느 하나 재미면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또 그 나름대로의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트릭면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을 듯 싶지만) 또,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나름대로, 잘 모르는 독자라고 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 가볍고 유쾌한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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