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절판


회장님 가라사대,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책을 읽는 인간과 읽지 않는 인간 -15쪽

인생은 내기다. 이건 진짜라네. 나이만은 먹을 만큼 먹은 우리가 하는 말이니까 틀림없어.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나름의 위기를 헤쳐왔으니까. 인간은 한순간, 한순간 내기를 하면서 살고 있네. 순간순간을 선택하면서 산다고 바꿔 말해도 되겠지. 자네는 간장맛 쌀과자를 골랐네. 이 가네코 신페이가 12배로 건 긴고도의 참깨과자가 아니라, 잇시키 류세이가 3배로 건 '소프트 샐러드'를 집었어. 사메시마 고이치는 그것을 자기 의사로 골랐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고르게 했을까?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는 영역이네만, 자네는 이처럼 흐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죽음이 찾아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을 계속하는 것이네. -26~7쪽

하지만 말이에요, 재미있는 책은 읽힌다,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실 환상이에요. 우리가 대단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조차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읽힌다고는 할 수 없죠. 재미가 있는데도 알려지지 않은 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 인정을 받고 못받는 것은 운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해요. 내가 천국까지 갖고 가고 싶다. 내 뒤에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꼭 읽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후세에 남는 건 아니거든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건 여기 있는 우리들과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독서란 본래 개인적인 행위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책을 좀 읽는다고 자만하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도 터무니없는 환상이에요. 인간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거든요. 서점에 가면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늘 절망합니다. 내가 읽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수효의 책들 중에 내가 모르는 재미가 넘치는 책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어요. -57~8쪽

미스터리 팬은 본래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인종이다. 미스터리로 읽을 수만 있다면, 다른 장르에서 진출해 오든 새로 개척하든 뭐든지 환영이다. 순수문학이든 논픽션이든, 매력적인 수수께끼가 많고 문장도 능숙하고 분위기가 있으면 오케이. 소도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은 커진다. -142쪽

넌 몰라. 여자는 여자 그 자체를 질투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미래를 질투하는 거야. 어떤 멋진 사람을 만나서, 어떤 식으로 사랑받을지 상상하지. 그리고 그 여자가 사랑받는 자기이 행운에 만족하고 우월감을 느낄 걸 상상하면서 질투하는 거야. 난 아무리 아름답고 복받은 여자라도 감수성이 없는 여자는 질투하지 않아. 설령 어린아이라도, 자기를 꼭 끌어안고 싶어지는 기쁨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여자만 질투한단다. -156쪽

예를 들어, 순수문학이었다면, 소설의 무대가 조그만 상자 안이든,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세계든 상관없지. 하지만 미스터리는 반드시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연기되는 거라고. 순수문학이라면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써도 상관없어. 하지만 미스터리는 그런 일이 용납되지 않거든.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이상야릇한 '안티 미스터리'는 예외로 하고, 추리소설은 그 성질상 반드시 독자의 이해와 의식을 어딘가에 염두에 두고서 쓰지 않으면 안돼. 그런 제약이 있어 재미있는 거고. 추리소설만큼 제 3자의 눈을 신경 쓰면서 쓰는, '밖을 향한' 소설은 없다고. 그런데 <삼월>에는 그런 부분이 없어. 관객은 없는데, 존재하지 않는 관객의 의식은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점이 묘해 -168쪽

시작 부분을 쓰고 나면, 이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없을지 대부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읽기 시작한 순간에 그 책이 재미있을지 없을지 알게 된다. -318쪽

어째서 인간은 '잘 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을까? 이야기의 내용에 감동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 삶과 죽음의 갈등, 아낌 없이 주는 사랑,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이입한다. 그것은 알겠다. 하지만 '잘 된 이야기'에 대한 감동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감동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들어맞았다는 쾌감이다. 어째서 쾌감일까? 그리고 '잘 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인간에게는 몇 종류의 이야기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리라. 입력된 이야기와 일치하면 빙고(!) 상태가 된다. 어째서? 픽션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제4 욕망인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아마도 상상력이라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 때문이리라. 픽션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날부터 우리는 고독하고 복잡하며 불안정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343~4쪽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원에 쭉 뻗어 있는 도로. 물이 고여 있는 수로. 하얀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중학생. 변두리에 있는 네모난 대형 쇼핑몰. 비슷비슷한 모양의 단독주택. 눈에 익은 간판이 달려 있는 주유소. 흔하디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녀는 늘 속고 있는 기분이 든다. 겉모습만의 도시, 겉모습만의 거리. 진짜 모습은 이렇지 않다. 한낱 지나가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진짜 얼굴을 보여줄 리가 없다. 어딘가 진짜 모습이 있을 것이다. 낯선 목소리, 낯선 얼굴, 낯선 이야기가. 그녀는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꼬리가 비어져나와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신경이 쓰인다. 어딘가에 진짜 세계의 자투리가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창밖의 풍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지금까지 발견한 예가 없기는 하지만. -36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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