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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은 독자라면 베일에 가려진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기억할 것이다. 단순히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회사 회장에게 초대를 받아서 회장의 별장에 가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꽁꽁 숨겨진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모인 사람들은 총 4부로 구성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는데,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1부가 바로 이 책 <흑과 다의 환상>이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소개된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 1부는 <흑과 다의 환상>. 이 4부작에는 각각 부제가 있어요. 이 부에는 '바람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답니다. 이 4부작은 어느 것이나 로드무비풍이라고 할까요. (중략) 1부는 노인 네 명이, 노인이라고 하면 너무한가요. 장년 남녀 네명이 여행을 하는 이야기예요. 정말로 그게 다랍니다. 장소는 아마도 야쿠시마 섬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확실히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한가로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한 여행이에요. 등장인물이 하는 이야기 곳곳에서 섬 맨 안쪽에 있는 전설의 벚나무를 찾아가는 게 이 사람들의 여행 목적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조금도 진전이 없는 거예요. 길을 잃기도 하고, 늑장을 부리기도 하죠. 네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잘도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온통 이상한 사건들 이야기만 하죠. 네 사람이 각자 안락의자 탐정의 역할을 하는 셈이랍니다. 하지만 명쾌하게 진상이 밝혀지는 사건이 있으면, 실컷 벌일 대로 벌여놓기만 하고 끝나는 사건도 있고, 언뜻 암시만 하고 그대로 지나가버리는 사건도 있어요. 그 부분이 완전히 닥치는 대로인지, 또는 철저하게 계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각각의 이야기들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책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과는 다른 구석도 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총 4명의 인물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바라본 상황과 그들의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대개 이럴 경우에는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인물들이 바라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런 시각의 차이없이 사건 1은 A라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건 2는 B라는 사람의 입장에서와 같이 바라보고 있다. 사건이 진행되어 가면서 각 인물들의 내면이 변해가는 것도 직접 들여다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사건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본 모습도 등장해 책에 재미를 더해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네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유리'라는 인물에 대해서 각 인물들이 어떻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또 그녀가 이 네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녀는 과연 살아있는지 등에 대해 궁금증을 안고 볼 수 있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또 하나의 재미는 최근 내가 읽은 온다 리쿠의 작품들이 <밤의 피크닉>이나 <네버랜드>, <굽이치는 강가에서>처럼 소년, 소녀들이 등장한 성장소설이었다면 이 책은 성장 소설에 등장하기엔 조금 어릴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함을 느꼈다. 중년의 네 남녀가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모습, 자신이 외면하고 싶어했던 과거의 진실을 마침내 마주하는 모습, 그리고 그런 진실과 노련하게 마주하는 모습은 주인공들이 중년이고, 그들이 낯선 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온다 리쿠를 좋아한 독자라면 이 책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 아직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물론,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듯 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이야기도 물론 기대가 되지만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서 이 책 속에서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유리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하니 특히 더 빨리 읽고 싶어진다. 여운이 가라앉기 전에 빨리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시작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