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물론 어느 부모에게나 이상이 있다.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저런 사람은 안 됐으면 좋겠다. 엄격하고 위엄 있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이의 성장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사리에 맞는 훈육, 아이가 자유롭고 구김살 없이 커가게 해주는 교육. 부모는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큰 꿈을 품는다. 그러나 겨우 몇 개월 만에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차 이쪽의 모순과 태만을 의식하게 만든다. 언제나 이쪽의 급소를 찔러 다음에 할 말을 꿀꺽 삼키게 한다. 그런 일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나는 내가 아이를 기르고 있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를 기르는 게 아니라 부모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가 알아서 자라는 것을 머뭇머뭇하면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식은 하늘이 점지해준 것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어쩌다가 우연히 나에게 태어났을 뿐, 내 것은 아니다. 전력을 다해 아이를 대하려면 기력 소모가 상당히 심하다. 그래서 부모들은 지쳐가고 하나둘씩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본심과는 다른 의도로 무장하고, 뒤에서 아이구야, 하면서 어깨에 힘을 빼고 쉰다. 아이도 부모의 그런 태도를 눈치 채고 그것에 익숙해진다. -22~3쪽

남자들은 어쩌다 가끔 해준 일은 참 잘도 기억해. 그 한 번이 다른 열 번의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한다니까. -24쪽

자아, 여러분. 그렇다면 무엇이 미스터리인가? 미사키 아키히코가 생각하는 미스터리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딱 잘라 말해 '과거'다. '과거'에야말로 진짜 미스터리가 있는 것이다. 시간에, 기억에, 길모퉁이에, 광 한구석에 소리 없이 묻혀가는 것들 속에 '아름다운 수수께끼'가 있다. 지금 손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조각에서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탐색한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우리의 뇌세포는 날마다 죽어가고, 증인은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다. 세계는 항상 낡은 것을 파괴하고 매장한 다음 잊으려고 한다. 우리의 기억, 그것도 시체나 다름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뇌는 기억을 계속해서 바꿔나가고 있다. 기억을 좀더 감미롭게 개찬하고, 좀 더 질서정연하게 고쳐 나열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덧칠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나는 '과거' 속에 진실이 있고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탐구하는 것은 인간이 무의식 중에 희구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행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34쪽

사랑이 시작되었을 무렵의 침묵은 이야기되지 않는 말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말은 필요 없다.' 그러나 사랑이 식었을 무렵의 침묵은 공허한 주제에 납덩어리처럼 무겁다. 그 무렵에는 말은 너무나도 무력해서, 어떤 말이든 블랙홀 같은 침묵이 삼켜버린다. 이 단계의 침묵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이 침묵을 깨뜨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쪽은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사랑이 남아 있지 않은 쪽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말이란 서비스고,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이미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된 사람에게 서비스해 봤자 소용없다. 남편이라는 인종은 곧잘 '말 안해도 알아 줄 줄 알았다.'라며 아내와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만, 진짜 이유는 분명히 이것이다. -100쪽

다람쥐 쳇바퀴 같다. 일도 연애도, 결과가 모든 것. 뭐가 문제였을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런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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