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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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그는 언제나 제멋대로 달렸다. 대전을 향해 달리다 말고 춘천을 발견하는 식이었다. 내가 보기에 작은오빠는 속도 내기와 끼어들기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어느 방향, 어느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는, 원래 작정했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를 향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일 자체를 매우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 -12쪽

하는 일마다 각종 창의적인 방법으로 족족 망해먹을 수 있는 김학원의 걸출한 능력은 더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놀라다 못해 섬뜩한 공포마저 느끼는 것은, 지난 이십 년간 한결같이 온갖 말도 안 되는 다양한 방법으로 망하는 시범을 보여준 그 인간에게 여전히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줄이 존재하는 이 정신 나간 세상이었다. 김학원은 이 세상의 어디를 콕콕 찔러야 돈이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돈 이십만원이 없어서 쪽방에서 쫓겨나고 노숙자가 된다는데, 김학원은 여전히 어디에선가 큰돈을 끌어와서는 쉽사리 날려버렸다. -112~3쪽

김학원이 가지고 노는 그런 돈은 내가 알고 있는 재래식 돈과는 다른 것이었다. 명색이 돈이라면서 종이 한 장짜리 얇고 너덜너덜한 몸을 입어본 일도 없었다. 증권사 전광판의 붉고 푸른 숫자로만, e-트레이딩시스템의 화면 위에서만 잠시 스쳐 지나가는 도깨비불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허공에 가까운 어딘가에서 꿈결같이 명멸하며 인간의 마음에 기괴한 자극을 주는 전기적 신호로만 존재했다.
그건 돈이 아니었다. 욕망의 올가미 혹은 정신의 바이러스, 궁극적으로는 경제의 가면을 쓴 흉기였다. 돈다발로 쌓여본 일도 없고 현물로 바뀌어본 일은 더더구나 없는 주제에 꽁무니에 0만 터무니없이 많이 붙이고 있는 그 독벌레 같은 숫자들 때문에 김학원은 쉽사리 사고를 쳤고 우리는 덩달아 미쳐갔다. -113쪽

제법인걸. 나는 가까스로 냉정을 유지했다.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이렇게 사람 아픈 곳을 살살 쓸어주는 남자라니,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다. 나는 오히려 그가 조금 얄미워졌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 이거지. 당신이 이러지 않아도 보육실의 김혜나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하렘으로 입궁했다고. 늘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127~8쪽

나 자신에게 환상을 가지기에 나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지구에서 김학원 다음으로 쓸모없는 쓰레기가 바로 나였다. 보육실에서 며칠 열심히 일했던 괜찮은 겉모양만으로는, 심연처럼 입을 벌린 나의 모든 악덕과 무능을 메꿀 길이 도저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가 나를 위로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신뢰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데이터와 분석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한번 말한 것만으로도 왠지 그것이 사실일 것 같았다. 희망이, 그가 말한 것처럼 괜찮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빌어먹을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꾸역꾸역 치밀어올랐다.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 무능한 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부여잡고 싶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 사이의 거리가 남극과 북극처럼 너무 멀어서 나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130쪽

임현명 여사와 그녀의 전남편 김덕만 사장을 포함한 우리 부모 세대의 유명했던 교육열은 당신들이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의 성격이었다. 우리 부모들은 이 세상의 축복받은 인생만이 인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아이콘으로서 대학을 철석같이 숭배했다. 그러나 부모들의 부푼 가슴을 안고 덩달아 가슴 부풀어 대학에 들어간 우리는 많은 믿음에 배신당해야만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일단 집을 사면, 무언가 잘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순진했던 믿음을 가장 충실히 추종했던 자의 현재가 어떠한지는, 어제저녁 내 남편 윤성민이 '의대 갈걸'이라는 사자성어로 요약했던 바 있다. 뒤통수치는 깨달음이 자고 나면 하나씩 찾아오는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올케들은 여전히 교육에 매달렸다. 더이상 숭상하지도 않는 것에 매달리는 심리는,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내가 보기엔, 달리 몸부림칠 방도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큰올케의 잔학함에서 작은올케의 인자함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드넓었으되, 그녀들의 교육열의 주성분은 똑같이 순도 높은 불안이었다. -182~3쪽

어둠 속에서도 완연히 창백한 낯빛이기는 했으나, 정욱연의 음성만큼은 새벽 세시를 오후 세시로 착각하나 싶을 만큼 별다르지 않았다. 늘 생각했지만, 굉장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얼마든지 떳떳한 일이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그 어떤 흉허물도 광기도 다 안아줄 듯한 그 담담한 목소리,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은 절반 넘게 그 목소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200~1쪽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겹쳐져 한 점에서 만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두 개의 직선처럼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의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조차도 우리 사이에는 삼억팔천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213쪽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말이오, 그때부터 진짜 큰일이 닥친다오. 더이상 재미로 하는 게 아니야. 재미가 다 뭔가. 꾼들끼리 겨루게 되는 거지. 죽고 사는 전쟁이 되네. 그 꾼들은 말이야, 다들 제각각 들러붙은 헛것들이 있어. 그때부터는 들린다고 해야 하나, 쫓긴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먹고살 것이 없을 때보다 더 절박하기조차 하오. 그건 욕심이 아닌 것 같아. 욕심만 가지고서는 사람이 그리 되나 어디. 욕심하고는 달라. 사람이 아예 어딘가가 고장이 나버리는 거야. 욕심보다도 훨씬 무섭고 지독한 거야, 그게. -235쪽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나는 그대로 폭발했다. -268쪽

"나는 말이다, 네 아빠랑 사십칠 년을 살았어. 계속 함께 살았다면 내년에 금혼식을 했을 거야. 너도 조금은 알겠지만 결혼생활이란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결혼생활이 잘 풀릴 때도 있었고, 거지같이 안 풀릴 때도 있었고, 결국은 깨져버렸지. 한참 동안 힘들기도 했다만, 난 괜찮아. 박회장님 이야기가 아니야. 그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이건 네 아빠와 나에 대한 이야기야. 나는 네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고 네 아빠도 그랬단다.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끝까지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끝나더라도 크게 여한은 없어. 인생을 건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헤어지게 마련이니까."-311~2쪽

작은오빠도 성민도, 사랑이 무슨 등급제인 것처럼 말했다. 정욱연은 1++등급 꽃등심이고 나는 4등급 국거리라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끝까지 신경질이 났다. 사랑이 쇠고기냐? 정욱연이 나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나 이상하냐? -316쪽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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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2-08-0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하게도, '파주시'라는 주소만 들어도, 나는 왜인지 매지님이 떠올라요.
마치, 파주시에만 가면 마치 매지님을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말이죠.
언젠가 거기에 가게 되면 '이매지님, 여기'라는 현수막이라도 들고 다녀봐야겠어요.
또 알아요? 갑자기 매지님이 창문에서 현수막을 보고 뛰어올지.(웃음)

이매지 2012-08-14 20:22   좋아요 0 | URL
파주시 문발동에 오시면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엘신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ㅎ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구판절판


숫자로만 보면 요 십 년 사이 우리의 생활이 좀 편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생활감각으로 따지면 그렇게 편해진 것 같지도 않다. 옛날에는 주부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일도 그다지 얺었고, 주택융자금 지옥도 없었다. -12쪽

삼십 년에 한 번밖에 우승하지 않는 팀을 응원하노라면, 딱 한 번의 우승으로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듯 십 년 정도는 즐길 수 있다. -19쪽

문장을 쓰는 비결은 바로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말해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요컨대 '지나치게 쓰지 말라'는 뜻이다.
문장이란 것은 '자, 이제 쓰자'고 해서 마음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우선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천재가 아닌 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이미 있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려와 적당히 헤쳐나가게 된다. -32~3쪽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 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와, 제법인데"라는 둥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그러나 거기서 좀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33~4쪽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단순한 차원의 얘기를 새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열적이라거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이 밝다거나, 그런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장미를 좋아하고 개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참 나, 안 그런가요. 히틀러는 개를 좋아했지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히틀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죠.-53~4쪽

1971년이란 해는 학생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해지며 폭력적인 내부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매우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잘난 척하며 '요즘 젊은 남자들은 어쩌니저쩌니' 하는 얘기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딱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를 하면서 맛있는 걸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69~70쪽

요즘 세상에 '돈도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과거에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요즘의 폐쇄된 사회 상황이 무척 염려스럽다. 빠져나갈 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좋은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79쪽

"생일이 돼도 좋은 일이 하나도 없네요."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생일이 같은 사람끼리 오손도손 모여서 "너나 나나 좋은 일이 없군" 하고 주절거리며 먹고 마시는 게 가장 타당한 생일 축하 방법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109쪽

미리 말해두지만 단순히 여자한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집에 바래다주거나, 짐을 들어주거나, 센스 있는 선물을 하거나, 입은 옷을 칭찬하거나, 그런 것은 고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다. 내 말은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하루키 씨는 정말 친절하군요"라고 말하지 않게 만드는 테크닉이 어렵다는 것이다. 왜 여자가 "친절하군요"라고 말하게 해선 안 되는지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이런 느낌은 나이가 들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161쪽

이따금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다는 판단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 먹는 걸까? 대체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이런 것들은 암만 생각해도 적절한 대답이 안 나오니 결국 '운명'이란 한마디로 치부하는 도리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결과가 전부다. -227~8쪽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내가 굴은 먹지만 대합은 못 먹는다는 것에 대해 누가 "왜 그런가?" 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본인인 나도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하다. 성향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31~2쪽

물론 젊으면 다 좋다는 건 아니고. 젊은 세대에게는 또 젊은 세대 특유의 오만함이나 무심함이 있어서 종종 진저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오만함이나 무신경함은 독립적으로만 기능할 뿐 다른 어떤 권력에 직접 연결돼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상대할 때는 안심이 된다. 내 나이쯤 되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위에 산적해 있으니 말이다.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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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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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무작정 끌리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표지가 예쁘다거나, 작가가 매력적이라던가, 그도 아니면 그 책을 접했을 때의 내면상태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한동안 독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기에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어 이 책 저 책 읽다가 던지기를 반복하던 차에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을 만났다. <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좋아했기에 로맹 가리야 전부터 전작을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고, 진 세버그야 <네 멋대로 해라>로 워낙 유명한 여배우라 설명을 덧붙여봤자 사족이리라.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유기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작품은 작품만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작가의 사생활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지라 사실 이 둘이 부부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스물한 살의 진 세버그와 마흔다섯 살의 로맹 가리. 서로 처음 눈을 마주친 몇 초 동안 "말 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한 두 사람,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두 사람. 이 책은 이 두 사람의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다. 


  나이차만큼이나 자라온 환경도, 살아온 시간도 다른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이미 기혼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비난도 이들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끝은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가 아니다.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라는 책 속의 말처럼 두 사람은 각자의 개성이 강했다. 그랬기에 서로를 상처줄 수밖에 없었고, 격정적인 사랑이 두 사람을 휩쓸고 간 뒤 폐허만 남았을 때도 서로를 떠나지 못했다. 서로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것처럼 끝내 헤어지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죽는 게 삶"이니 말이다. 


  "함께 산 8년, 갈라섰지만 결코 떨어지지 못한 채 필사적인 애정으로, 운명이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에게 묶인 채 지낸 12년"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 두 사람이 현대사에서 겪은 일도 한 편의 소설(혹은 영화) 같아서 읽는 재미를 더했다. 두 사람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굵직굵직한 사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흑인인권운동과 사회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FBI에게 감시를 당했던 진 세버그, "스물한 살에 이미 성공과 친근해"진 그녀가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차에서 죽은 채 발견될 때까지 그녀는 성공한 여배우였고, 끊임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의 빛이 강했던 만큼 그 그림자도 깊고 어두웠다. 로맹 가리의 삶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유대계, 러시아 출생, 프랑스 이주 등으로 사회적 편견과 내내 맞서야 했다. 군인, 외교관, 작가 등 다양한 직업 속에서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쓰고 또 썼다.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프랑스비평계의 호평을 제외하고)을 얻었지만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또한 녹록치는 않았다.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두 사람을 삶을 담아내기에 너무 짧지 않나 싶다. 하지만 시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은 두 사람의 삶을 단순히 관조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게끔 돕는다. 행간 속에서 독자는 그들과 교류하는 영광을 얻는다. 우연히 만나 시작된 운명. 그것이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결말이 아닐지라도, 아니 그렇지 않기에 두 사람의 삶은 매력적이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셨을 때 그 쓴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하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커피의 향과 맛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책은 그들의 삶을 음미하느라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볼 만한,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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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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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6~7쪽

확실히 수동 운전은 오토매틱보다 요령을 익히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린다. 발도 둘 다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나 수영과 마찬가지로 일단 몸에 익으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밖에 운전하지 않은 사람보다 확실히 인생이 한 눈금 더 즐거워진다. 정말로. -23쪽

보통은 순서가 반대다. 먼저 이야기가 있고 나중에 제목이 붙는다. 내 경우는 그렇지 않고 먼저 틀을 만든다. 그리고 '음, 이 틀 속에 어떤 얘기가 들어갈까?'를 생각한다.
왜 그랬는가 하면, 그 당시 쓰고 싶은 것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쓰고 싶은데 쓸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인생 경험도 아직 부족했고. 그래서 먼저 제목을 지어놓고 그 제목에 맞는 얘기를 어디선가 끌어왔다. 즉 '말장난'에서 소설을 풀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38~9쪽

당연하지만, 여행의 장점은 일단 일상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시애틀의 비 내리는 오후, 나와 그 작은 금붕어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적어도 나는 친밀하게 느꼈다-관계는 아마 그때 그 자리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리라. -43쪽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강하든 약하든 누구나 열심히 땀을 흘리며 애쓰는구나 하는 걸 실감하게 된다. 메달의 수는 국가나 국민의 수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신기한 '현장의 힘' 같은.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그게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어딘가로 느닷없이 증발해버린다. 일장기가 올라간다, 올라가지 않는다, 만으로 얘기가 진행되고,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며 여론으로까지 강하게 몰아간다. 이것은 선수들에게도 우리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까? -59쪽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창작이란 건 뭐 그런 것이다, 라는 얘기다. 이것은 상당히 극단적인 예지만, 뭐가 좋고 뭐가 좋지 않은가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가치 판단의 확고한 기준이란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누구에게 배우냐에 따라 소설 쓰는 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섭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무섭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결국은 제 몸에 맞는 옷밖에 입을 수 없으니까. 맞지 않는 것을 떠맡겨봐야 어느 순간 저절로 벗겨질 뿐이다. 그러니 맞지 않는 것을 떠맡기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교육이 될지 모른다. 그 때문에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한다면 너무나 억울하겠지만. -78~9쪽

비틀스와 비교하는 것은 쑥스럽지만, 회사란 '문제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것, 전례가 없는 것, 발상이 다른 것, 그런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배제한다. 그런 흐름 속에서 '동요하지 않고 꿋꿋할' 사원이 얼마나 있는가로 회사의 기량 같은 것이 정해지는 것 같다. -103쪽

악마도, 깊고 푸른 바다도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한없이 깊은 해저의 웅덩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은 늘 어딘가에서 잠재적으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이란 게 뭔가 두렵군요. -107쪽

나는 제법 나이를 먹었지만, 나 자신을 절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는 분명 아저씨랄까, 영감이랄까, 틀림없이 그쯤 됐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뭐, 아저씨니까" 하고 말하는 시점부터 진짜 아저씨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줌마가 다 됐네"라고 말하는 순간(설령 농담이나 겸손이었다 해도) 그 사람은 진짜 아줌마가 돼버린다.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그만한 힘을 발휘한다. 정말로.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애써 자신을 아저씨나 아줌마로 만들 필요도 없다. 나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혼자서 살짝 머리끝쯤에서 떠올리면 된다. -112쪽

말할 것도 없지만,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질이다. 질에 만족하면 상대가 한 명이어도 상관없고, 설령 일만 명의 여성과 잤다고 해도 마음에 쿵 오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은 시간과 정신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122쪽

그래도 세상의 모든 신 앞에 정정당당하게 맹세하는데,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것보다 병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그 증거로 만약 초밥집에서 캔맥주가 나온다면 대부분의 손님은 "장난해?" 하고 투덜거릴 것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들 (아마도) 불평 하나 없이 캔맥주를 마신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만적인 삶의 방식 아닌가…… 하고 잘난 척 말하는 나도 집에서는 톡 하는 한심한 소리를 내며 꼭지를 따 캔맥주를 마신다. 현실적 간편함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만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납작하게 짜부라진 맥주 캔은 뭔가 안쓰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어젯밤 비운 알루미늄캔을 아침에 볼 때면 까닭 없이 허무해진다. '아아, 또 이렇게 마셔버렸네' 하고, 반면 빈병은 언제나 꼿꼿하고 단정하게 바로 서 있다. -142~3쪽

다만 변명이 아니라, 세상에는 오역보다 훨씬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읽기 힘든 문장으로 나열된 번역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번역이다.-163쪽

주먹밥으로 말하자면 엄선한 쌀로 정성껏 지어서 적당한 힘을 주어 간결하게 꽉 쥔다. 그런 식으로 만든 주먹밥은 누가 먹어도 맛있다. 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을 제대로 '쥐기'만 하면,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은 성별이나 연령의 차를 넘어 비교적 쉬이 전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잘못됐다면 죄송하지만. -182쪽

내게 까마귀 떼란 한마디로 '시스템'이었다. 여러 가지 권위를 중심에 둔 틀, 사회적인 틀, 문학적인 틀. 당시 그것은 우뚝 솟아오른 돌벽처럼 보였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탄탄한 존재로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돌이 무너지고 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환영할 상황일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시스템이 탄탄했을 때가 싸움이 쉬웠다. 즉, 까마귀가 제대로 높은 가지에 앉아 있을 때가 구도를 읽기 쉬웠다. 지금은 무엇이 도전해야 할 상대인지 무엇에 화를 내야 좋은지 도통 파악하기가 힘들다. 뭐, 눈을 부릅뜨고 보는 수밖에 없지만. -207쪽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겪으면서 여기저기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라고 할까, 그때마다 그 장소에서 나는 뭔가 특별한 음악을 필요로 했다. -218쪽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을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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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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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에 이미 그녀는 성공과 친근해졌고, 여러 차례 신고식을 치르고 굴욕을 겪었으며, 요구에 따라 말하는 법, 웃는 법, 우는 법을 배웠다. 이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천사의 아름다움과 악마의 아름다움까지 발견했다. 유명인들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고, 거리에 나서면 행인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랑도 안다고 믿었다. 사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닥쳤다.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21쪽

이 몇 초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했다. 그 남자 로맹 가리와 그 여자 진 세버그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 그들의 것이 될 사랑 이야기 속으로.-24~5쪽

아무리 반복해서 말한들 우리는 자기 죽음의 순간과 자기 가족을 선택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가리는 조소라도 하듯 두 가지 다 선택한다. 어쨌든 작가가 어느 정도 전설이나 이야기를 지어내어 자기 작품으로 삼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을 지어내는 건 예술가의 특권이고, 심지어 모든 인간의 권리가 아니겠는가? 전기 작가는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들을 재배치하고 수정하기 위해 적절해 보이는 분류를 할 것이다. 그것들을 현실의 빛 아래 얼마큼 노출시킬지 결정하는 건 전기 작가의 몫이다. 잘 쓴 글을 읽고 행복에 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31쪽

이래서 우리는 비열한 자들만 남게 될 세상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인간은 언제나 그들 안에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나은 이 생각을 품어왔던 것이다. "투쟁을 계속하자!"-40쪽

도시가 개인을 매료하는 힘이 늘 설명되지는 않는다. 파리에서는 이런 힘이 샘솟듯 흐른다. 그리고 그 힘은 거리에서 몇 걸음 걷다가 끌어안는 연인들의 행복을, 파리의 하늘을 사로잡는 화가의 눈길을, 흘러가는 센 강을 바라보는 어느 고독한 창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포착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며 새로워진다.
"파리…… 내가 프랑스인인 것은 오로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장식인 이 도시 때문이다"라고 몽테뉴는 말했다. 히틀러로부터 이 도시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기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명령에 불복종한 독일군 장군이 한 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65쪽

레슬리에게 니나와 닮은 점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모든 여자에겐 우리가 사랑한 어머니와 닮은 데가 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건 어느 정도는 모든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미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빠져든 가리는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66쪽

만약 우연이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 저 길로 지나갔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나 의문을 품어본다. 생각없이 극장 문이나 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는 일, 한 발짝의 걸음이 그렇듯이 한 번의 눈길이, 미소가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81쪽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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