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만 보면 요 십 년 사이 우리의 생활이 좀 편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생활감각으로 따지면 그렇게 편해진 것 같지도 않다. 옛날에는 주부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일도 그다지 얺었고, 주택융자금 지옥도 없었다. -12쪽
삼십 년에 한 번밖에 우승하지 않는 팀을 응원하노라면, 딱 한 번의 우승으로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듯 십 년 정도는 즐길 수 있다. -19쪽
문장을 쓰는 비결은 바로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말해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요컨대 '지나치게 쓰지 말라'는 뜻이다. 문장이란 것은 '자, 이제 쓰자'고 해서 마음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우선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천재가 아닌 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이미 있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려와 적당히 헤쳐나가게 된다. -32~3쪽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 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와, 제법인데"라는 둥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그러나 거기서 좀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33~4쪽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단순한 차원의 얘기를 새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열적이라거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이 밝다거나, 그런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장미를 좋아하고 개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참 나, 안 그런가요. 히틀러는 개를 좋아했지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히틀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죠.-53~4쪽
1971년이란 해는 학생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해지며 폭력적인 내부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매우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잘난 척하며 '요즘 젊은 남자들은 어쩌니저쩌니' 하는 얘기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딱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를 하면서 맛있는 걸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69~70쪽
요즘 세상에 '돈도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과거에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요즘의 폐쇄된 사회 상황이 무척 염려스럽다. 빠져나갈 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좋은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79쪽
"생일이 돼도 좋은 일이 하나도 없네요."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생일이 같은 사람끼리 오손도손 모여서 "너나 나나 좋은 일이 없군" 하고 주절거리며 먹고 마시는 게 가장 타당한 생일 축하 방법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109쪽
미리 말해두지만 단순히 여자한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집에 바래다주거나, 짐을 들어주거나, 센스 있는 선물을 하거나, 입은 옷을 칭찬하거나, 그런 것은 고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다. 내 말은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하루키 씨는 정말 친절하군요"라고 말하지 않게 만드는 테크닉이 어렵다는 것이다. 왜 여자가 "친절하군요"라고 말하게 해선 안 되는지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이런 느낌은 나이가 들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161쪽
이따금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다는 판단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 먹는 걸까? 대체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이런 것들은 암만 생각해도 적절한 대답이 안 나오니 결국 '운명'이란 한마디로 치부하는 도리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결과가 전부다. -227~8쪽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내가 굴은 먹지만 대합은 못 먹는다는 것에 대해 누가 "왜 그런가?" 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본인인 나도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하다. 성향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31~2쪽
물론 젊으면 다 좋다는 건 아니고. 젊은 세대에게는 또 젊은 세대 특유의 오만함이나 무심함이 있어서 종종 진저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오만함이나 무신경함은 독립적으로만 기능할 뿐 다른 어떤 권력에 직접 연결돼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상대할 때는 안심이 된다. 내 나이쯤 되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위에 산적해 있으니 말이다.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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