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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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그는 언제나 제멋대로 달렸다. 대전을 향해 달리다 말고 춘천을 발견하는 식이었다. 내가 보기에 작은오빠는 속도 내기와 끼어들기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어느 방향, 어느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는, 원래 작정했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를 향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일 자체를 매우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 -12쪽

하는 일마다 각종 창의적인 방법으로 족족 망해먹을 수 있는 김학원의 걸출한 능력은 더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놀라다 못해 섬뜩한 공포마저 느끼는 것은, 지난 이십 년간 한결같이 온갖 말도 안 되는 다양한 방법으로 망하는 시범을 보여준 그 인간에게 여전히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줄이 존재하는 이 정신 나간 세상이었다. 김학원은 이 세상의 어디를 콕콕 찔러야 돈이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돈 이십만원이 없어서 쪽방에서 쫓겨나고 노숙자가 된다는데, 김학원은 여전히 어디에선가 큰돈을 끌어와서는 쉽사리 날려버렸다. -112~3쪽

김학원이 가지고 노는 그런 돈은 내가 알고 있는 재래식 돈과는 다른 것이었다. 명색이 돈이라면서 종이 한 장짜리 얇고 너덜너덜한 몸을 입어본 일도 없었다. 증권사 전광판의 붉고 푸른 숫자로만, e-트레이딩시스템의 화면 위에서만 잠시 스쳐 지나가는 도깨비불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허공에 가까운 어딘가에서 꿈결같이 명멸하며 인간의 마음에 기괴한 자극을 주는 전기적 신호로만 존재했다.
그건 돈이 아니었다. 욕망의 올가미 혹은 정신의 바이러스, 궁극적으로는 경제의 가면을 쓴 흉기였다. 돈다발로 쌓여본 일도 없고 현물로 바뀌어본 일은 더더구나 없는 주제에 꽁무니에 0만 터무니없이 많이 붙이고 있는 그 독벌레 같은 숫자들 때문에 김학원은 쉽사리 사고를 쳤고 우리는 덩달아 미쳐갔다. -113쪽

제법인걸. 나는 가까스로 냉정을 유지했다.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이렇게 사람 아픈 곳을 살살 쓸어주는 남자라니,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다. 나는 오히려 그가 조금 얄미워졌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 이거지. 당신이 이러지 않아도 보육실의 김혜나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하렘으로 입궁했다고. 늘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127~8쪽

나 자신에게 환상을 가지기에 나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지구에서 김학원 다음으로 쓸모없는 쓰레기가 바로 나였다. 보육실에서 며칠 열심히 일했던 괜찮은 겉모양만으로는, 심연처럼 입을 벌린 나의 모든 악덕과 무능을 메꿀 길이 도저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가 나를 위로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신뢰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데이터와 분석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한번 말한 것만으로도 왠지 그것이 사실일 것 같았다. 희망이, 그가 말한 것처럼 괜찮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빌어먹을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꾸역꾸역 치밀어올랐다.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 무능한 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부여잡고 싶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 사이의 거리가 남극과 북극처럼 너무 멀어서 나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130쪽

임현명 여사와 그녀의 전남편 김덕만 사장을 포함한 우리 부모 세대의 유명했던 교육열은 당신들이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의 성격이었다. 우리 부모들은 이 세상의 축복받은 인생만이 인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아이콘으로서 대학을 철석같이 숭배했다. 그러나 부모들의 부푼 가슴을 안고 덩달아 가슴 부풀어 대학에 들어간 우리는 많은 믿음에 배신당해야만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일단 집을 사면, 무언가 잘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순진했던 믿음을 가장 충실히 추종했던 자의 현재가 어떠한지는, 어제저녁 내 남편 윤성민이 '의대 갈걸'이라는 사자성어로 요약했던 바 있다. 뒤통수치는 깨달음이 자고 나면 하나씩 찾아오는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올케들은 여전히 교육에 매달렸다. 더이상 숭상하지도 않는 것에 매달리는 심리는,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내가 보기엔, 달리 몸부림칠 방도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큰올케의 잔학함에서 작은올케의 인자함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드넓었으되, 그녀들의 교육열의 주성분은 똑같이 순도 높은 불안이었다. -182~3쪽

어둠 속에서도 완연히 창백한 낯빛이기는 했으나, 정욱연의 음성만큼은 새벽 세시를 오후 세시로 착각하나 싶을 만큼 별다르지 않았다. 늘 생각했지만, 굉장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얼마든지 떳떳한 일이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그 어떤 흉허물도 광기도 다 안아줄 듯한 그 담담한 목소리,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은 절반 넘게 그 목소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200~1쪽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겹쳐져 한 점에서 만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두 개의 직선처럼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의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조차도 우리 사이에는 삼억팔천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213쪽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말이오, 그때부터 진짜 큰일이 닥친다오. 더이상 재미로 하는 게 아니야. 재미가 다 뭔가. 꾼들끼리 겨루게 되는 거지. 죽고 사는 전쟁이 되네. 그 꾼들은 말이야, 다들 제각각 들러붙은 헛것들이 있어. 그때부터는 들린다고 해야 하나, 쫓긴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먹고살 것이 없을 때보다 더 절박하기조차 하오. 그건 욕심이 아닌 것 같아. 욕심만 가지고서는 사람이 그리 되나 어디. 욕심하고는 달라. 사람이 아예 어딘가가 고장이 나버리는 거야. 욕심보다도 훨씬 무섭고 지독한 거야, 그게. -235쪽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나는 그대로 폭발했다. -268쪽

"나는 말이다, 네 아빠랑 사십칠 년을 살았어. 계속 함께 살았다면 내년에 금혼식을 했을 거야. 너도 조금은 알겠지만 결혼생활이란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결혼생활이 잘 풀릴 때도 있었고, 거지같이 안 풀릴 때도 있었고, 결국은 깨져버렸지. 한참 동안 힘들기도 했다만, 난 괜찮아. 박회장님 이야기가 아니야. 그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이건 네 아빠와 나에 대한 이야기야. 나는 네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고 네 아빠도 그랬단다.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끝까지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끝나더라도 크게 여한은 없어. 인생을 건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헤어지게 마련이니까."-311~2쪽

작은오빠도 성민도, 사랑이 무슨 등급제인 것처럼 말했다. 정욱연은 1++등급 꽃등심이고 나는 4등급 국거리라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끝까지 신경질이 났다. 사랑이 쇠고기냐? 정욱연이 나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나 이상하냐? -316쪽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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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2-08-0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하게도, '파주시'라는 주소만 들어도, 나는 왜인지 매지님이 떠올라요.
마치, 파주시에만 가면 마치 매지님을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말이죠.
언젠가 거기에 가게 되면 '이매지님, 여기'라는 현수막이라도 들고 다녀봐야겠어요.
또 알아요? 갑자기 매지님이 창문에서 현수막을 보고 뛰어올지.(웃음)

이매지 2012-08-14 20:22   좋아요 0 | URL
파주시 문발동에 오시면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엘신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