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장바구니담기


스물한 살에 이미 그녀는 성공과 친근해졌고, 여러 차례 신고식을 치르고 굴욕을 겪었으며, 요구에 따라 말하는 법, 웃는 법, 우는 법을 배웠다. 이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천사의 아름다움과 악마의 아름다움까지 발견했다. 유명인들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고, 거리에 나서면 행인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랑도 안다고 믿었다. 사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닥쳤다.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21쪽

이 몇 초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했다. 그 남자 로맹 가리와 그 여자 진 세버그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 그들의 것이 될 사랑 이야기 속으로.-24~5쪽

아무리 반복해서 말한들 우리는 자기 죽음의 순간과 자기 가족을 선택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가리는 조소라도 하듯 두 가지 다 선택한다. 어쨌든 작가가 어느 정도 전설이나 이야기를 지어내어 자기 작품으로 삼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을 지어내는 건 예술가의 특권이고, 심지어 모든 인간의 권리가 아니겠는가? 전기 작가는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들을 재배치하고 수정하기 위해 적절해 보이는 분류를 할 것이다. 그것들을 현실의 빛 아래 얼마큼 노출시킬지 결정하는 건 전기 작가의 몫이다. 잘 쓴 글을 읽고 행복에 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31쪽

이래서 우리는 비열한 자들만 남게 될 세상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인간은 언제나 그들 안에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나은 이 생각을 품어왔던 것이다. "투쟁을 계속하자!"-40쪽

도시가 개인을 매료하는 힘이 늘 설명되지는 않는다. 파리에서는 이런 힘이 샘솟듯 흐른다. 그리고 그 힘은 거리에서 몇 걸음 걷다가 끌어안는 연인들의 행복을, 파리의 하늘을 사로잡는 화가의 눈길을, 흘러가는 센 강을 바라보는 어느 고독한 창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포착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며 새로워진다.
"파리…… 내가 프랑스인인 것은 오로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장식인 이 도시 때문이다"라고 몽테뉴는 말했다. 히틀러로부터 이 도시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기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명령에 불복종한 독일군 장군이 한 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65쪽

레슬리에게 니나와 닮은 점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모든 여자에겐 우리가 사랑한 어머니와 닮은 데가 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건 어느 정도는 모든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미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빠져든 가리는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66쪽

만약 우연이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 저 길로 지나갔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나 의문을 품어본다. 생각없이 극장 문이나 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는 일, 한 발짝의 걸음이 그렇듯이 한 번의 눈길이, 미소가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81쪽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 -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