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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이제는 어느 정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인지 1위 작품 뿐만 아니라 순위권에 올랐던 작품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 듯하다. 2006년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1위를 놓고 다투었다는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그런 경우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인데 전혀 기대 없어 읽어서 그런지 간만에 정말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잠자는 것을 미뤄가며 읽어갔다.
대학교 경음악부에서 유독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코올중독분과회'를 만들어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며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졸업 후 각자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꽤 오랫만에 이들은 알코올중도분과회의 멤버인 안도의 주최로 안도의 형의 고급 펜션에 모여 동창회를 연다. 무엇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물건이 없는 장소. 마치 중세의 성 같은 이 장소에서 후시미는 아끼는 후배 니이야마를 죽이기 위해 만발의 계획을 세운다. 완벽하게 밀실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후시미. 친구들은 모두 니이야마가 그저 푹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뿐 니이야마가 죽어 있을 것이라는 '비일상적'인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불안해지는 친구들. 어떻게든 문이 열리는 시간을 늦추려는 후시미. 그리고 이 상황에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추리를 시작하는 유코. 그들의 숨막히는 두뇌 대결이 시작된다.
발달한 과학수사 탓에 점점 본격 미스터리가 설 자리가 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이런 식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라는 놀라움이 들었다. 부유한 동네에 위치한 고급 펜션. 마음만 먹으면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고, 문을 부수거나 창문을 깰 수도 있지만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차마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해, 어디서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문짝을 부수지 못해 밀실 상태를 유지시킨다. 도시 속에 있지만 외딴 섬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을 보며 저자의 착안에 감탄했다.
오랫만에 본격 미스터리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만에 읽는 '도서 추리소설'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범인의 정체가 누군인지 밝혀내는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범인이 누군지를 보여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범인의 심리 상태나 범인의 정체에 도전하는 인물을 통해 긴장감을 이끄는 도서 추리소설. 이 책 속에서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지만 가슴은 뜨거운 후시미와 겉으로 보기엔 후시미와 비슷하게 차가워 보이지만, 실은 속마음도 차가운 유카. 닫힌 문을 두고 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대결을 시작한다. 니이야마의 죽음을 단순히 사고사로 만들기 위해 후시미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트릭을 하나씩 하나씩 부수며 후시미를 긴장시키는 유카. 대학 시절 핑크빛 로맨스가 있을 뻔한 관계였던지라 뭔가 껄끄러움이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함이 넘쳤다.
책 속에서 유카는 결국 후시미의 모든 것(심지어 동기까지)을 파악해 자신이 후시미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적인 면에서는 우수한 유카에게는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애초에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살해한 동기도 뭐랄까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물론, 그보다도 더 하찮은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만) 그런 동기로 범행을 저지른 후시미보다 후시미의 범행을 속속들이 까발리는 유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남들은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그 궁금증을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 감성보다는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냉혹한 성격 등등 유카는 예쁘장한 얼굴을 한 추리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유카는 다른 추리소설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일단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이시모치 아사미가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도 읽게 될 것 같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상작인 <용의자 x의 헌신>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낯선 작가라 다음 작품은 한참 있어야 만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찾아보니 저자의 다른 작품인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도 얼마 전 출간됐고, <달의 문>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시모치 아사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왜 이제야 만나게 됐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을 정도로 반가웠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