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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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6~7쪽

확실히 수동 운전은 오토매틱보다 요령을 익히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린다. 발도 둘 다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나 수영과 마찬가지로 일단 몸에 익으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밖에 운전하지 않은 사람보다 확실히 인생이 한 눈금 더 즐거워진다. 정말로. -23쪽

보통은 순서가 반대다. 먼저 이야기가 있고 나중에 제목이 붙는다. 내 경우는 그렇지 않고 먼저 틀을 만든다. 그리고 '음, 이 틀 속에 어떤 얘기가 들어갈까?'를 생각한다.
왜 그랬는가 하면, 그 당시 쓰고 싶은 것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쓰고 싶은데 쓸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인생 경험도 아직 부족했고. 그래서 먼저 제목을 지어놓고 그 제목에 맞는 얘기를 어디선가 끌어왔다. 즉 '말장난'에서 소설을 풀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38~9쪽

당연하지만, 여행의 장점은 일단 일상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시애틀의 비 내리는 오후, 나와 그 작은 금붕어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적어도 나는 친밀하게 느꼈다-관계는 아마 그때 그 자리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리라. -43쪽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강하든 약하든 누구나 열심히 땀을 흘리며 애쓰는구나 하는 걸 실감하게 된다. 메달의 수는 국가나 국민의 수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신기한 '현장의 힘' 같은.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그게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어딘가로 느닷없이 증발해버린다. 일장기가 올라간다, 올라가지 않는다, 만으로 얘기가 진행되고,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며 여론으로까지 강하게 몰아간다. 이것은 선수들에게도 우리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까? -59쪽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창작이란 건 뭐 그런 것이다, 라는 얘기다. 이것은 상당히 극단적인 예지만, 뭐가 좋고 뭐가 좋지 않은가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가치 판단의 확고한 기준이란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누구에게 배우냐에 따라 소설 쓰는 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섭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무섭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결국은 제 몸에 맞는 옷밖에 입을 수 없으니까. 맞지 않는 것을 떠맡겨봐야 어느 순간 저절로 벗겨질 뿐이다. 그러니 맞지 않는 것을 떠맡기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교육이 될지 모른다. 그 때문에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한다면 너무나 억울하겠지만. -78~9쪽

비틀스와 비교하는 것은 쑥스럽지만, 회사란 '문제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것, 전례가 없는 것, 발상이 다른 것, 그런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배제한다. 그런 흐름 속에서 '동요하지 않고 꿋꿋할' 사원이 얼마나 있는가로 회사의 기량 같은 것이 정해지는 것 같다. -103쪽

악마도, 깊고 푸른 바다도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한없이 깊은 해저의 웅덩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은 늘 어딘가에서 잠재적으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이란 게 뭔가 두렵군요. -107쪽

나는 제법 나이를 먹었지만, 나 자신을 절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는 분명 아저씨랄까, 영감이랄까, 틀림없이 그쯤 됐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뭐, 아저씨니까" 하고 말하는 시점부터 진짜 아저씨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줌마가 다 됐네"라고 말하는 순간(설령 농담이나 겸손이었다 해도) 그 사람은 진짜 아줌마가 돼버린다.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그만한 힘을 발휘한다. 정말로.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애써 자신을 아저씨나 아줌마로 만들 필요도 없다. 나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혼자서 살짝 머리끝쯤에서 떠올리면 된다. -112쪽

말할 것도 없지만,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질이다. 질에 만족하면 상대가 한 명이어도 상관없고, 설령 일만 명의 여성과 잤다고 해도 마음에 쿵 오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은 시간과 정신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122쪽

그래도 세상의 모든 신 앞에 정정당당하게 맹세하는데,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것보다 병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그 증거로 만약 초밥집에서 캔맥주가 나온다면 대부분의 손님은 "장난해?" 하고 투덜거릴 것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들 (아마도) 불평 하나 없이 캔맥주를 마신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만적인 삶의 방식 아닌가…… 하고 잘난 척 말하는 나도 집에서는 톡 하는 한심한 소리를 내며 꼭지를 따 캔맥주를 마신다. 현실적 간편함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만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납작하게 짜부라진 맥주 캔은 뭔가 안쓰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어젯밤 비운 알루미늄캔을 아침에 볼 때면 까닭 없이 허무해진다. '아아, 또 이렇게 마셔버렸네' 하고, 반면 빈병은 언제나 꼿꼿하고 단정하게 바로 서 있다. -142~3쪽

다만 변명이 아니라, 세상에는 오역보다 훨씬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읽기 힘든 문장으로 나열된 번역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번역이다.-163쪽

주먹밥으로 말하자면 엄선한 쌀로 정성껏 지어서 적당한 힘을 주어 간결하게 꽉 쥔다. 그런 식으로 만든 주먹밥은 누가 먹어도 맛있다. 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을 제대로 '쥐기'만 하면,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은 성별이나 연령의 차를 넘어 비교적 쉬이 전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잘못됐다면 죄송하지만. -182쪽

내게 까마귀 떼란 한마디로 '시스템'이었다. 여러 가지 권위를 중심에 둔 틀, 사회적인 틀, 문학적인 틀. 당시 그것은 우뚝 솟아오른 돌벽처럼 보였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탄탄한 존재로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돌이 무너지고 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환영할 상황일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시스템이 탄탄했을 때가 싸움이 쉬웠다. 즉, 까마귀가 제대로 높은 가지에 앉아 있을 때가 구도를 읽기 쉬웠다. 지금은 무엇이 도전해야 할 상대인지 무엇에 화를 내야 좋은지 도통 파악하기가 힘들다. 뭐, 눈을 부릅뜨고 보는 수밖에 없지만. -207쪽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겪으면서 여기저기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라고 할까, 그때마다 그 장소에서 나는 뭔가 특별한 음악을 필요로 했다. -218쪽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을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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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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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에 이미 그녀는 성공과 친근해졌고, 여러 차례 신고식을 치르고 굴욕을 겪었으며, 요구에 따라 말하는 법, 웃는 법, 우는 법을 배웠다. 이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천사의 아름다움과 악마의 아름다움까지 발견했다. 유명인들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고, 거리에 나서면 행인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랑도 안다고 믿었다. 사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닥쳤다.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21쪽

이 몇 초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했다. 그 남자 로맹 가리와 그 여자 진 세버그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 그들의 것이 될 사랑 이야기 속으로.-24~5쪽

아무리 반복해서 말한들 우리는 자기 죽음의 순간과 자기 가족을 선택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가리는 조소라도 하듯 두 가지 다 선택한다. 어쨌든 작가가 어느 정도 전설이나 이야기를 지어내어 자기 작품으로 삼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을 지어내는 건 예술가의 특권이고, 심지어 모든 인간의 권리가 아니겠는가? 전기 작가는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들을 재배치하고 수정하기 위해 적절해 보이는 분류를 할 것이다. 그것들을 현실의 빛 아래 얼마큼 노출시킬지 결정하는 건 전기 작가의 몫이다. 잘 쓴 글을 읽고 행복에 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31쪽

이래서 우리는 비열한 자들만 남게 될 세상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인간은 언제나 그들 안에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나은 이 생각을 품어왔던 것이다. "투쟁을 계속하자!"-40쪽

도시가 개인을 매료하는 힘이 늘 설명되지는 않는다. 파리에서는 이런 힘이 샘솟듯 흐른다. 그리고 그 힘은 거리에서 몇 걸음 걷다가 끌어안는 연인들의 행복을, 파리의 하늘을 사로잡는 화가의 눈길을, 흘러가는 센 강을 바라보는 어느 고독한 창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포착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며 새로워진다.
"파리…… 내가 프랑스인인 것은 오로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장식인 이 도시 때문이다"라고 몽테뉴는 말했다. 히틀러로부터 이 도시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기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명령에 불복종한 독일군 장군이 한 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65쪽

레슬리에게 니나와 닮은 점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모든 여자에겐 우리가 사랑한 어머니와 닮은 데가 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건 어느 정도는 모든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미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빠져든 가리는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66쪽

만약 우연이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 저 길로 지나갔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나 의문을 품어본다. 생각없이 극장 문이나 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는 일, 한 발짝의 걸음이 그렇듯이 한 번의 눈길이, 미소가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81쪽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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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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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니가 보고 싶어』로 오랜만에 생동감 있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준 정세랑의 두번째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보다 늦게 출간됐지만 그보다 먼저 집필된 작품이라 그런지 『덧니가 보고 싶어』보다 더 풋풋한 느낌이었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으로 '연애'를 소재로 다루지만, 『덧니가 보고 싶어』가 여러 이야기가 잘 어우러진 패치워크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구에서 한아뿐』은 잘 직조된 모직원단 같은 느낌이라 비교해가며 즐길 수 있었다. 느닷없지만, 최근 에피톤 프로젝트의 2집 중 <이제, 여기에서>를 들으며 "열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라는 부분에 어쩐지 가슴이 두근, 했었다. 누군가 나를 만나기 위해 열한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면 그게 누구든 간에(아, 스토커는 논외로 하자) 어쩐지 감동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여기에서>와 뉘앙스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지구에서 한아뿐』도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얘기다.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큰 빚까지 져가며 2억 광년(!) 우주를 횡단해 지구에 온 외계인의 사랑 이야기니 말이다. 이렇게 요약하자니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지' 싶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연은 조금 더 복잡하다.

  일류대 의상디자인학과를 나왔지만 절친 유리와 함께 사연이 있는 옷을 리폼하는 친환경 옷수선집 '환생'을 꾸려가는 한아. "평일 오후 2시의 6호선 전철 한 칸에서 가장 예쁠 정도"(곧 "출퇴근 시간 2호선 한 칸에선 20위권에도 못 들 수준")의 외모인 한아는 조그만 가게에서 행복하게 일하며 정착하지 못하며 철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는 남자친구 경민과 어쨌거나 그럭저럭 무탈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느닷없이 캐나다에 별똥별을 보러 간 경민이 소형 운석 폭발에 며칠 연락이 두절됐다가 무사히 귀국한 이후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캐나다에 다녀온 후 경민은 전에 먹지 않던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집까지 배웅을 해주는 등 평소보다 더 다정해진다. 내심 싫지는 않지만 뭔.가.이.상.하.다. 대체 경민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증이 커져가던 차에 밝혀진 비밀. 응? 경민이 경민이 아.니.라.고?! 캐나다에서 소형 운석이 폭발했을 때 진짜 경민은 한아를 만나기 위해 2억 광년을 날아온 외계인에게 신분을 넘기고 우주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정체를 밝히자 처음엔 당황한 한아.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라고 말하는 데 두근, 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시작된 한아와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의 범우주적 사랑은 시작된다. 

  "자신들의 사랑이 온 우주에서 단 하나뿐임을 바라는 연인을 위한 순도 100프로 무공해 소설이 떴다!"라는 조현의 추천사처럼 『지구에서 한아뿐』은 사랑을 꿈꾸는 모든 연인들의 '로망'을 담은, 유무형의 빚을 지면서까지 사랑을 하는 지구상 아니 우주의 모든 연인을 위한 다디단 책이다. 하지만 마냥 달콤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범우주적 사랑' 외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름, 얼굴,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하고 있지만 마인드는 전혀 다른 존재로 갈음되었을 때 그는 어디까지 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껍데기만 빌릴 뿐 전혀 다른 존재가 되버리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우주를 여행하던 진짜 경민(엑스)이 돌아오면서 더 커진다. 이 지구상에 두 개여서는 안 되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엑스와 경민의 간극은 분명 존재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이처럼 무엇이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도 있지만,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대한 물음도 담겨 있다.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고 있는 이 끔찍한 별에서"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한아라는 존재를 통해 자본주의나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이 지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봤지만, 뭐 궁극적으로 『지구에서 한아뿐』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SF 연애물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여전히 말맛과 현실감이 살아 있고, 『덧니가 보고 싶어』에서 밝힌 "농담이 되고 싶다"는 포부 또한 유효하다. 이제 갓 두번째 발걸음을 내딛었기에 아직은 그의 농담이 어디로(혹은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농담을 기꺼이 또 한 번 즐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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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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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가 예쁘냐, 예쁘지 않냐 묻는다면 물론 예쁘기는 하다. 어느 정도 예쁘냐면…… 평일 오후 2시의 6호선 전철 한 칸에서 가장 예쁠 정도로 예쁘다. 다른 말로는 출퇴근 시간 2호선 한 칸에선 20위권에도 못 들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 번쯤 눈길을 던질 만큼의 외모는 되지만 말을 걸거나 번호를 따 갈 정도는 아닌, 딱 고 정도. -9쪽

"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
유리는 촉촉한 아보카도 장어 롤을 씹으며 경민이 언제부터 이런 캐릭터였나 잠시 고민했다.
"경민 씨는 그게 문제라니까. 우주적 규모로 잘할 필요 없어요. 동네 규모로 좀 잘하면 안 돼?"-33쪽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탁월하고 독창적인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못난 재능이 그저 때를 만나지 못한 거라고 위무하는가. 끊임없이 공자의 세계에,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피카소의 세계에,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즈의 세계에, 퀸의 세계에, 박경리의 세계에,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서태지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끔찍한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36쪽

결국 벌떡 일어난 한아는 거울 앞에 서서 커다란 재봉 가위를 들고 머리 몇 가닥을 잘라낸다. 하지만 곧 멈추고 만다. 스스로의 얼굴 윤곽이 맘에 안 드는 한아는, 실연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영화처럼 머리를 짧게 쳐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자격증은 괜히 주는 게 아니었다. 머리에 테러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아아, 술 땡기네."-61~2쪽

"함께 떠나본 일은 잘 없는 것 같아."
"응. 바보 같지만 난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까. 전혀 진취적이지 않지."
한아가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 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82~3쪽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네가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오래 걸려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97~8쪽

둘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그 만남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었고 훗날 종종 서로를 생각하며 웃게 되었다. 그렇게 이상한 경험을 함께한 사람, 기억나지 않을 리가.
동시에 웃었던 적도 있다. 한 사람은 서울에서, 한 사람은 우주 투어 길에서. -126쪽

"우리 별에는 없지만 결혼이 환상이라면, 의외로 우주에 굉장히 보편적인 환상인 거야.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정말로."
유리의 귀띔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경민이 차분하게 대응했다.
"일생일대 유일한 대상을, 얼마나 많은 종류의 지적 생명체들이 헤매며 찾고 있는데. 찾았으니, 자랑하고 싶은 건 얼마나 당연해. 아주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욕망인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바보 같지도 않아?"
"지구의 결혼이라는 거, 어디가 변질된 냄새가 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둘의 결혼은 그거랑은 다를 걸 알잖아. 그게 어디가 바보 같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결혼을 하자."-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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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안녕, -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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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안녕, 하고 말했다. 안녕, 하고 따라 해보았다. 안녕, 홀라, 헬로, 알로하, 오하이오, 니하오, 차오 안, 샬롬, 나마스테, 부에노스 디아스, 즈드라스트부이체, 도드리 덴, 사와디 크랍, 하바리 가니, 셀라마트 파기, 본 조르노, 세르부스. 열이곱 개의 안녕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안녕 안녕, 하고 코끼리의 목소리를 따라 하다보니 목이 말라서 포도를 먹었다. -7쪽

_초음파로 말할 수 있다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는 드라큘라의 목소리가 감미로워서 그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깝게스리. -20쪽

_어떤 소원 생각했어요?
_하루 종일 같이 있어줘.
손목이 화끈거렸다. 드라큘라의 손이 매웠다.
_네 소원은?
_같은 거.
우리는 비긴 김에 서로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37쪽

_왜 말하지 않았지.
드라큘라가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 나와 있고 싶어서 머무른 게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던 중이었다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 두번째였다. 동물원에서도 그랬다. 그가 하지 않았던 말 한마디가 우리가 나눴던 모든 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나.
민구를 내내 원망했다. 내가 했던 말들은 그냥 말이었다. 순간순간 나오는 대로 흘려보냈던 무의미한 소리들이었다. 그때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다. 나는 민구 곁에 있고 싶었다. 민구도 그랬다. 말보다 더 분명한 것들이 있었다. 마주 보며 웃는 순간들은 진짜였다. 그런 순간들을 내가 내뱉은 허황된 말들을 이유로 깨뜨리려는 민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민구를 경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98쪽

자유, 자유, 말로만 떠드는 놈들도 많았어. 밖에서는 숨죽이고 있다가 도서관 안에서만 독재니 부패한 언론이니 하며 욕을 했어. 하지만 놈들은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어. 정치며 언론에 대해 욕을 하다가도 곧 부끄러워했어. 부끄러워서 술을 마셨어. 홍콩 할매나 빨간 마스크의 자질이 있는 친구들은 아니었어. 그런데 정부에서는 그런 친구들을 거리에서 내몰고 거리가 깨끗하고 평화로워졌다고 말하고 있었어.
거짓말이 옳은 시간이었어. 거짓말을 믿거나 묵인하거나 차라리 외면해야 했어. -111쪽

사람들은 진실보다, 그럴듯하게 꾸며진 말을 믿는다. 나는 검사가 뭐 그런 대사를 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처럼 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117쪽

_사랑을 하고 있어?
_모르겠어요.
_누가 있구나. 뭘 모르겠는데?
_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_그걸 왜 몰라. 어떤데?
_하루 종일 그 사람이 보여요.
_그럼 사랑하는 거지.
_모르겠어요. 내 감정을 믿을 수 없어요. 그 사람 없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겨우 이 정도가 사랑일까요?
_좋아하는 걸 대봐. 무엇이든지.
레몬, 구름, 사람, 달리기, 빛, 아이스크림, 관. 끝없이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천 가지도 댈 수 있었다.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1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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