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구판절판


한아가 예쁘냐, 예쁘지 않냐 묻는다면 물론 예쁘기는 하다. 어느 정도 예쁘냐면…… 평일 오후 2시의 6호선 전철 한 칸에서 가장 예쁠 정도로 예쁘다. 다른 말로는 출퇴근 시간 2호선 한 칸에선 20위권에도 못 들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 번쯤 눈길을 던질 만큼의 외모는 되지만 말을 걸거나 번호를 따 갈 정도는 아닌, 딱 고 정도. -9쪽

"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
유리는 촉촉한 아보카도 장어 롤을 씹으며 경민이 언제부터 이런 캐릭터였나 잠시 고민했다.
"경민 씨는 그게 문제라니까. 우주적 규모로 잘할 필요 없어요. 동네 규모로 좀 잘하면 안 돼?"-33쪽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탁월하고 독창적인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못난 재능이 그저 때를 만나지 못한 거라고 위무하는가. 끊임없이 공자의 세계에,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피카소의 세계에,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즈의 세계에, 퀸의 세계에, 박경리의 세계에,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서태지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끔찍한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36쪽

결국 벌떡 일어난 한아는 거울 앞에 서서 커다란 재봉 가위를 들고 머리 몇 가닥을 잘라낸다. 하지만 곧 멈추고 만다. 스스로의 얼굴 윤곽이 맘에 안 드는 한아는, 실연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영화처럼 머리를 짧게 쳐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자격증은 괜히 주는 게 아니었다. 머리에 테러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아아, 술 땡기네."-61~2쪽

"함께 떠나본 일은 잘 없는 것 같아."
"응. 바보 같지만 난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까. 전혀 진취적이지 않지."
한아가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 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82~3쪽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네가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오래 걸려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97~8쪽

둘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그 만남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었고 훗날 종종 서로를 생각하며 웃게 되었다. 그렇게 이상한 경험을 함께한 사람, 기억나지 않을 리가.
동시에 웃었던 적도 있다. 한 사람은 서울에서, 한 사람은 우주 투어 길에서. -126쪽

"우리 별에는 없지만 결혼이 환상이라면, 의외로 우주에 굉장히 보편적인 환상인 거야.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정말로."
유리의 귀띔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경민이 차분하게 대응했다.
"일생일대 유일한 대상을, 얼마나 많은 종류의 지적 생명체들이 헤매며 찾고 있는데. 찾았으니, 자랑하고 싶은 건 얼마나 당연해. 아주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욕망인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바보 같지도 않아?"
"지구의 결혼이라는 거, 어디가 변질된 냄새가 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둘의 결혼은 그거랑은 다를 걸 알잖아. 그게 어디가 바보 같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결혼을 하자."-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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