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절판


엘러리 퀸은 아버지의 수사 방법에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개탄했다. 엘러리는 순수한 논리가이자 몽상가이며 예술가다운 기질도 갖고 있었다. 코안경 너머의 그의 눈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추구했다. 범죄자들은 그의 예리한 두뇌로 날카롭게 해부되곤 했다. 범죄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같은 그의 복합적인 기질은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러리는 기분이 내킬 때면 추리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 일을 제외하고는 그의 아버지가 퇴직하기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리처드 퀸이 경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엘러리 퀸'의 이름으로 많은 추리소설들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퀸'이 아닌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없으며 '엘러리 퀸'의 소설과 그의 본명으로 나온 책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는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두번째 책이다. 본명으로 낸 책들은 작가와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겪은 사건들을 거의 가감 없이 그대로 쓴 것이다). -13~4쪽

보통 사람들한테는 범죄자들이 범행 시에 항상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거야. 이를테면 같은 담배만 피우고 버린다든가, 늘 똑같은 가면을 쓴다든가, 일을 끝낸 다음에는 반드시 여자를 끼고 질펀하게 논다든가 하는 행동들 말이야.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범죄 행위는 곧 직업이라네. 어떤 직업이든 일을 하는 중엔 그 사람의 특성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보통 사람들은 그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지만. -15쪽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특별 대우를 요청할까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건 살인 사건입니다. 살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서도 최악의 것입니다. 따라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법 아래 개인이든 기관이든 차별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여인이 난폭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녀를 살해했습니다. 바로 이 시각에 범인은 몇 킬로미터 밖에 있을 수도 있고, 이 방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54쪽

"'장기의 수는 직접 두고 있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인다.'라는 말이 있죠. 누가 한 말이냐고요? 못난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작가 미상'의 말입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해볼까요?"-71쪽

'단서'라는 말은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Clue'라는 단어는 'Clew'에서 유래됐다. (……) 고대 영에서 '실'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Clew는,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실을 건네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 단서란 탐정에게 유혀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실제적인 것일 수도 있다. 단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혹은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상태에서, 혹은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상태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 아무튼 그것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단서는 범죄를 담당하는 수사관들을 종잡을 수 없는 미로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광명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범죄의 예술>, 존 스트랭 윌리엄 O. 그린이 쓴 서문에서 발췌-143쪽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스릴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스릴은 (……) 추적자의 기질과 정비례한다. 추적자는 현미경을 이용해야만 찾을 수 있는 범죄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관찰하고 (……) 수집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조물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상상력을 이용해서 실제의 모든 현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이론을 창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스릴을 맛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문제에 대한 통찰과 끈기 그리고 정열 이런 것들을 고루 갖춘 사람만이 범인을 추적해내는 일에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 -<지하 세계의 존재>, 제임스 레딕스-247쪽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논리적인 분석을 해보는 것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한다. 나는 추리소설의 진정한 맛을 느끼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읽는 것 못지않게 자신이 직접 추리를 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의 하나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스포츠맨 정신에 입각하여,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도전장을 보낸다. 마지막 페이지를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이여, 누가 프렌치 부인을 죽였을까? …… 대부분의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직감으로 범인을 '짐작'해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의 '짐작'은 추리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상식과 논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즐거움도 배가시킬 수가 있다. -3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이현의 연애>로 홀딱 반해버린 심윤경. 과작인 탓에 동화를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쓴 <서라벌 사람들>이 벌써 4년 전 이야기다. 작년 가을 느닷없이 동화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를 냈을 때 인터뷰에서 '새 소설이 출간 임박'했다는 언급이 있어서 언제 나온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해를 지나 마하 39의 속도로 <사랑이 달리다>가 찾아왔다. 책을 손에 쥐자마자 심한 독서 침체기 중이었음에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심지어는 걸어다니면서도(!) 홀리듯 읽었다. 일단 책장을 넘기는 순간, 주인공 김혜나와 함께 앞뒤 보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는 소설 <사랑이 달리다>이다.


  생일이면 아빠가 옷을 차려입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금이야 옥이야 자란 김혜나. 그녀는 맨날 제정신 못 차리고 대형사고만 치는 작은 오빠 김학원, 돈과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큰오빠와 어린 시절부터 아옹다옹 삐걱삐걱했지만 풍족한 환경 탓에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그런 어쨌거나 소소한 사고들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사평온하게 지낸 그녀가 부모의 이혼(그것도 믿었던 아빠가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버려 새 살림을 차리면서 벌어진)을 경험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재산 분할 소송도 걸지 않고 엄마가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으며 아빠의 화수분 같은 재력을 잃게 된 삼남매. 작은 오빠야 전처럼 누군가의 등을 쳐먹으며 살고, 큰오빠야 자기 사업을 한다고 해도 내일모레면 마흔이지만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김혜나는 아빠의 신용카드 유효기간 만료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불안해진다. 게다가 동갑내기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까지 나자 김혜나는 비로소 난생처음으로 제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부잣집 철부지딸인 김혜나가 대형 산부인과 보육실 김혜나로 새 지위를 얻으며 벌어지는 일들이 김혜나의 통통 튀는 매력과 함께 그려진다. 


  '사랑'이 달리다, 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단순히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에 중심에는 사랑이 놓이지만 사랑'만' 다루지는 않는다. <사랑이 달리다>는 어떻게 보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어떻게 보면 모두가 성공을 외치는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항변이며, 어떻게 보면 귀엽지만 어떻게 보면 막장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읽던지 간에 이 책은 캐릭터가 살아 있는 소설이다. 이런 캐릭터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비현실적인데 싶다가도 어느샌가 아니 뭐 또 이런 사람들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나 싶어지며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이야기 초반에 혜나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라고 작은 오빠 학원의 운전실력을 언급하는데, <사랑이 달리다>도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어떻게' 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등장인물 각자의 종착지보다는 그들이 나아가는 방식 자체에 더 주목했고 그랬기에 그 종착지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수긍할 수 있었다. 


  다른 인물들이 변모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주인공 김혜나가 교주라 해도 믿길 정도로 모든 이에게 칭송받는 산부인과 원장 정욱연과 관계를 쌓아가며 변해가는 모습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정욱연과 김혜나의 관계는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한 편의 성장소설에 가깝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본질은 미성숙한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을 함께 끌어안고 성장해가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특히 김혜나가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같이 고백할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김혜나가 정욱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정욱연의 모습을 누군가와 겹쳐 보다가 어느샌가 정욱연까지도 사랑하게 되버렸다. 


  <사랑이 달리다>를 구성하는 한 축이 '사랑'(혹은 성장)이라면 다른 한 축은 '돈'이다. 돈으로 표상되는 김혜나 가족의 욕망은 현대사회의 일면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그대로 폭발했다"(268쪽)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겠지만, 김혜나 가족은 영어유치원이나 입학사정관제 등으로 드러나는 불타는 교육열, '의대 갈 걸'로 표상되는 전문직종에 대한 선망, 돈과 지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는 자존심, 그리고 돈이든 성공이든 조금이라도 더 손에 쥐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 등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불안의 변형인 이 욕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지 입 안에 씁쓸함이 감돈다. 대체 이렇게 악다구니를 써서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허망함만 남는 것이다. 


  사랑이건 욕망이건 뭘로 읽던 간에 <사랑이 달리다>는 간만에 심윤경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해줬다. 그녀를 이런 작품으로 다시 만나 더없이 기쁘다. 분명 이전 작품과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지만 심윤경이 이런 글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놀랐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찾아올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354쪽). 지금 이 순간 마하 40으로 달리고 있을 김혜나와 혜나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 심윤경을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 2012-08-2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반가와요. 히죽.

이매지 2012-08-21 01:20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또 오랜만에 빼꼼 나타났는데 ㅎㅎㅎ
조선인님 반가워요. 히죽.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장바구니담기


그 결과 그는 언제나 제멋대로 달렸다. 대전을 향해 달리다 말고 춘천을 발견하는 식이었다. 내가 보기에 작은오빠는 속도 내기와 끼어들기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어느 방향, 어느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는, 원래 작정했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를 향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일 자체를 매우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 -12쪽

하는 일마다 각종 창의적인 방법으로 족족 망해먹을 수 있는 김학원의 걸출한 능력은 더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놀라다 못해 섬뜩한 공포마저 느끼는 것은, 지난 이십 년간 한결같이 온갖 말도 안 되는 다양한 방법으로 망하는 시범을 보여준 그 인간에게 여전히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줄이 존재하는 이 정신 나간 세상이었다. 김학원은 이 세상의 어디를 콕콕 찔러야 돈이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돈 이십만원이 없어서 쪽방에서 쫓겨나고 노숙자가 된다는데, 김학원은 여전히 어디에선가 큰돈을 끌어와서는 쉽사리 날려버렸다. -112~3쪽

김학원이 가지고 노는 그런 돈은 내가 알고 있는 재래식 돈과는 다른 것이었다. 명색이 돈이라면서 종이 한 장짜리 얇고 너덜너덜한 몸을 입어본 일도 없었다. 증권사 전광판의 붉고 푸른 숫자로만, e-트레이딩시스템의 화면 위에서만 잠시 스쳐 지나가는 도깨비불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허공에 가까운 어딘가에서 꿈결같이 명멸하며 인간의 마음에 기괴한 자극을 주는 전기적 신호로만 존재했다.
그건 돈이 아니었다. 욕망의 올가미 혹은 정신의 바이러스, 궁극적으로는 경제의 가면을 쓴 흉기였다. 돈다발로 쌓여본 일도 없고 현물로 바뀌어본 일은 더더구나 없는 주제에 꽁무니에 0만 터무니없이 많이 붙이고 있는 그 독벌레 같은 숫자들 때문에 김학원은 쉽사리 사고를 쳤고 우리는 덩달아 미쳐갔다. -113쪽

제법인걸. 나는 가까스로 냉정을 유지했다.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이렇게 사람 아픈 곳을 살살 쓸어주는 남자라니,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다. 나는 오히려 그가 조금 얄미워졌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 이거지. 당신이 이러지 않아도 보육실의 김혜나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하렘으로 입궁했다고. 늘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127~8쪽

나 자신에게 환상을 가지기에 나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지구에서 김학원 다음으로 쓸모없는 쓰레기가 바로 나였다. 보육실에서 며칠 열심히 일했던 괜찮은 겉모양만으로는, 심연처럼 입을 벌린 나의 모든 악덕과 무능을 메꿀 길이 도저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가 나를 위로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신뢰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데이터와 분석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한번 말한 것만으로도 왠지 그것이 사실일 것 같았다. 희망이, 그가 말한 것처럼 괜찮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빌어먹을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꾸역꾸역 치밀어올랐다.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 무능한 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부여잡고 싶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 사이의 거리가 남극과 북극처럼 너무 멀어서 나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130쪽

임현명 여사와 그녀의 전남편 김덕만 사장을 포함한 우리 부모 세대의 유명했던 교육열은 당신들이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의 성격이었다. 우리 부모들은 이 세상의 축복받은 인생만이 인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아이콘으로서 대학을 철석같이 숭배했다. 그러나 부모들의 부푼 가슴을 안고 덩달아 가슴 부풀어 대학에 들어간 우리는 많은 믿음에 배신당해야만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일단 집을 사면, 무언가 잘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순진했던 믿음을 가장 충실히 추종했던 자의 현재가 어떠한지는, 어제저녁 내 남편 윤성민이 '의대 갈걸'이라는 사자성어로 요약했던 바 있다. 뒤통수치는 깨달음이 자고 나면 하나씩 찾아오는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올케들은 여전히 교육에 매달렸다. 더이상 숭상하지도 않는 것에 매달리는 심리는,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내가 보기엔, 달리 몸부림칠 방도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큰올케의 잔학함에서 작은올케의 인자함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드넓었으되, 그녀들의 교육열의 주성분은 똑같이 순도 높은 불안이었다. -182~3쪽

어둠 속에서도 완연히 창백한 낯빛이기는 했으나, 정욱연의 음성만큼은 새벽 세시를 오후 세시로 착각하나 싶을 만큼 별다르지 않았다. 늘 생각했지만, 굉장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얼마든지 떳떳한 일이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그 어떤 흉허물도 광기도 다 안아줄 듯한 그 담담한 목소리,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은 절반 넘게 그 목소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200~1쪽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겹쳐져 한 점에서 만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두 개의 직선처럼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의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조차도 우리 사이에는 삼억팔천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213쪽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말이오, 그때부터 진짜 큰일이 닥친다오. 더이상 재미로 하는 게 아니야. 재미가 다 뭔가. 꾼들끼리 겨루게 되는 거지. 죽고 사는 전쟁이 되네. 그 꾼들은 말이야, 다들 제각각 들러붙은 헛것들이 있어. 그때부터는 들린다고 해야 하나, 쫓긴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먹고살 것이 없을 때보다 더 절박하기조차 하오. 그건 욕심이 아닌 것 같아. 욕심만 가지고서는 사람이 그리 되나 어디. 욕심하고는 달라. 사람이 아예 어딘가가 고장이 나버리는 거야. 욕심보다도 훨씬 무섭고 지독한 거야, 그게. -235쪽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나는 그대로 폭발했다. -268쪽

"나는 말이다, 네 아빠랑 사십칠 년을 살았어. 계속 함께 살았다면 내년에 금혼식을 했을 거야. 너도 조금은 알겠지만 결혼생활이란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결혼생활이 잘 풀릴 때도 있었고, 거지같이 안 풀릴 때도 있었고, 결국은 깨져버렸지. 한참 동안 힘들기도 했다만, 난 괜찮아. 박회장님 이야기가 아니야. 그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이건 네 아빠와 나에 대한 이야기야. 나는 네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고 네 아빠도 그랬단다.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끝까지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끝나더라도 크게 여한은 없어. 인생을 건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헤어지게 마련이니까."-311~2쪽

작은오빠도 성민도, 사랑이 무슨 등급제인 것처럼 말했다. 정욱연은 1++등급 꽃등심이고 나는 4등급 국거리라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끝까지 신경질이 났다. 사랑이 쇠고기냐? 정욱연이 나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나 이상하냐? -316쪽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 -354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SHIN 2012-08-0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하게도, '파주시'라는 주소만 들어도, 나는 왜인지 매지님이 떠올라요.
마치, 파주시에만 가면 마치 매지님을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말이죠.
언젠가 거기에 가게 되면 '이매지님, 여기'라는 현수막이라도 들고 다녀봐야겠어요.
또 알아요? 갑자기 매지님이 창문에서 현수막을 보고 뛰어올지.(웃음)

이매지 2012-08-14 20:22   좋아요 0 | URL
파주시 문발동에 오시면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엘신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ㅎ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구판절판


숫자로만 보면 요 십 년 사이 우리의 생활이 좀 편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생활감각으로 따지면 그렇게 편해진 것 같지도 않다. 옛날에는 주부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일도 그다지 얺었고, 주택융자금 지옥도 없었다. -12쪽

삼십 년에 한 번밖에 우승하지 않는 팀을 응원하노라면, 딱 한 번의 우승으로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듯 십 년 정도는 즐길 수 있다. -19쪽

문장을 쓰는 비결은 바로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말해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요컨대 '지나치게 쓰지 말라'는 뜻이다.
문장이란 것은 '자, 이제 쓰자'고 해서 마음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우선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천재가 아닌 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이미 있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려와 적당히 헤쳐나가게 된다. -32~3쪽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 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와, 제법인데"라는 둥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그러나 거기서 좀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33~4쪽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단순한 차원의 얘기를 새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열적이라거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이 밝다거나, 그런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장미를 좋아하고 개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참 나, 안 그런가요. 히틀러는 개를 좋아했지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히틀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죠.-53~4쪽

1971년이란 해는 학생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해지며 폭력적인 내부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매우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잘난 척하며 '요즘 젊은 남자들은 어쩌니저쩌니' 하는 얘기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딱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를 하면서 맛있는 걸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69~70쪽

요즘 세상에 '돈도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과거에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요즘의 폐쇄된 사회 상황이 무척 염려스럽다. 빠져나갈 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좋은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79쪽

"생일이 돼도 좋은 일이 하나도 없네요."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생일이 같은 사람끼리 오손도손 모여서 "너나 나나 좋은 일이 없군" 하고 주절거리며 먹고 마시는 게 가장 타당한 생일 축하 방법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109쪽

미리 말해두지만 단순히 여자한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집에 바래다주거나, 짐을 들어주거나, 센스 있는 선물을 하거나, 입은 옷을 칭찬하거나, 그런 것은 고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다. 내 말은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하루키 씨는 정말 친절하군요"라고 말하지 않게 만드는 테크닉이 어렵다는 것이다. 왜 여자가 "친절하군요"라고 말하게 해선 안 되는지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이런 느낌은 나이가 들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161쪽

이따금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다는 판단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 먹는 걸까? 대체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이런 것들은 암만 생각해도 적절한 대답이 안 나오니 결국 '운명'이란 한마디로 치부하는 도리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결과가 전부다. -227~8쪽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내가 굴은 먹지만 대합은 못 먹는다는 것에 대해 누가 "왜 그런가?" 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본인인 나도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하다. 성향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31~2쪽

물론 젊으면 다 좋다는 건 아니고. 젊은 세대에게는 또 젊은 세대 특유의 오만함이나 무심함이 있어서 종종 진저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오만함이나 무신경함은 독립적으로만 기능할 뿐 다른 어떤 권력에 직접 연결돼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상대할 때는 안심이 된다. 내 나이쯤 되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위에 산적해 있으니 말이다. -27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무작정 끌리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표지가 예쁘다거나, 작가가 매력적이라던가, 그도 아니면 그 책을 접했을 때의 내면상태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한동안 독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기에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어 이 책 저 책 읽다가 던지기를 반복하던 차에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을 만났다. <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좋아했기에 로맹 가리야 전부터 전작을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고, 진 세버그야 <네 멋대로 해라>로 워낙 유명한 여배우라 설명을 덧붙여봤자 사족이리라.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유기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작품은 작품만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작가의 사생활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지라 사실 이 둘이 부부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스물한 살의 진 세버그와 마흔다섯 살의 로맹 가리. 서로 처음 눈을 마주친 몇 초 동안 "말 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한 두 사람,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두 사람. 이 책은 이 두 사람의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다. 


  나이차만큼이나 자라온 환경도, 살아온 시간도 다른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이미 기혼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비난도 이들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끝은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가 아니다.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라는 책 속의 말처럼 두 사람은 각자의 개성이 강했다. 그랬기에 서로를 상처줄 수밖에 없었고, 격정적인 사랑이 두 사람을 휩쓸고 간 뒤 폐허만 남았을 때도 서로를 떠나지 못했다. 서로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것처럼 끝내 헤어지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죽는 게 삶"이니 말이다. 


  "함께 산 8년, 갈라섰지만 결코 떨어지지 못한 채 필사적인 애정으로, 운명이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에게 묶인 채 지낸 12년"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 두 사람이 현대사에서 겪은 일도 한 편의 소설(혹은 영화) 같아서 읽는 재미를 더했다. 두 사람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굵직굵직한 사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흑인인권운동과 사회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FBI에게 감시를 당했던 진 세버그, "스물한 살에 이미 성공과 친근해"진 그녀가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차에서 죽은 채 발견될 때까지 그녀는 성공한 여배우였고, 끊임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의 빛이 강했던 만큼 그 그림자도 깊고 어두웠다. 로맹 가리의 삶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유대계, 러시아 출생, 프랑스 이주 등으로 사회적 편견과 내내 맞서야 했다. 군인, 외교관, 작가 등 다양한 직업 속에서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쓰고 또 썼다.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프랑스비평계의 호평을 제외하고)을 얻었지만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또한 녹록치는 않았다.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두 사람을 삶을 담아내기에 너무 짧지 않나 싶다. 하지만 시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은 두 사람의 삶을 단순히 관조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게끔 돕는다. 행간 속에서 독자는 그들과 교류하는 영광을 얻는다. 우연히 만나 시작된 운명. 그것이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결말이 아닐지라도, 아니 그렇지 않기에 두 사람의 삶은 매력적이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셨을 때 그 쓴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하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커피의 향과 맛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책은 그들의 삶을 음미하느라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볼 만한, 멋진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