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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에스프레소
이정호 지음 / 이매진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대개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된 신문을 훑어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인터넷에 접속하면 포털사이트에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기사의 제목을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보다 빠르게 새로운 기사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쓰레기같은 기사들도 많이 만날 수 있고, 기사의 홍수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방향으로 기사를 이해해야하는지, 실제 우리나라의 기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놀고 있는지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책이다.
소위 '언론 플레이'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좋은 기사 거리가 있으면 우르르 그것을 기사화하여 한 사람을 신화적인 존재로 만들기도 하고, 그것의 진실을 까발린 언론에 대해서는 몰매를 때리는 것도 하나의 '언론 플레이'이다. (최근에 일어난 황우석 관련 사태를 보면 그렇지 않은가? PD 수첩 1탄을 방송했을 때는 MBC에게 뭇매를 때리던 언론은 이제는 돌연 무너진 황우석 신화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이런 '언론 플레이'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기사를 쓰는 (혹은 방송을 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신문사에 소속되어 있고, 신문사는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보수적인 신문사, 진보적인 신문사. 그 아래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는 자신이 속한 신문사의 입장에 치우칠수밖에 없다. 그러니 "신문에서 나온 기사인데..."라는 믿음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는게 낫다.
책 속에서는 실제 기사들을 인용하여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인 쟁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A라는 신문사는 이렇게, B라는 신문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자, 어떤 것이 진실인 것 같은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처음엔 아무런 생각없이 신문을 읽으면서 세뇌받듯이 받아들였던 그 기사의 진실 앞에 얼떨떨한 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그동안 언론에 속고 살았다는게 너무 분했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의 어두운 면, 밝은 면, 더러운 면, 추악한 면. 그 모든 것을 파헤쳐서 대중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시켜줘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정말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 나라의 언론은 순전히 그들만을 위한 언론이었다. 한 예를 들면, 조선일보에서 못 먹어서 장농에서 굶어죽은 아이, 생활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외국의 사례를 끌어다 국가에서 보다 많은 지원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에서 실제로 그런 정책을 만들려고 하자 그들은 복지비 예산이 우리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났다며 분노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난치병에 걸린 한 소년을 소개하고, 며칠 뒤에 삼성측에서 그 소년을 돕기로 했다는 것을 기사화한다. 결국에는 재벌들의 미담기사를 싣기 위해서 포석을 깔았던 것이다. 노조가 파업하면 노조의 입장에서 기사를 싣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입장을 대변하고,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외국의 사례를 끌어와 그 나라의 실정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끼워넣는 기사들도 정말 많았다.
자신의 주체성을 갖지 못한 언론. 언론개혁의 의지조차 가지지 못한 언론.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그야말로 사기를 치고 있는 언론.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의 작은 목소리는 무시해버리는 언론. 그런 언론은 이제는 더이상 믿을 수 없다. 넘치는 기사 속에서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밝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언론에 대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 언젠가는 믿을 수 있는 언론. 사회의 어둠까지 비출 수 있는 언론이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