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 부르는 가족
어려서부터 본명이 아닌 가명을 쓰거나 필명을 쓰는 것에 대해 멋지다는 생각을 가끔 했지만 별명을 부르는 것은 그닥 내키지 않았다. 아마도 별명이란 것을 스스로 짓는 경우보다는 대개 친구들이 놀리듯이 붙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지금 쓰고 있는 '감은빛'은 온라인에서 필명으로 쓰기 위해 스스로 지은 것이고, 그 전에 불리던 별명은 '갈매기'였다. (야)구도(시)로 유명한 부산의 상징, 갈매기. 형들은 '갈매가'(갱상도 특유의 억양이 중요포인트!)라고 불렀고, 후배들은 '갈매기 오빠야'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서울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이 별명이 내 외모나 내 말투와 그닥 와닿지 않는다는 평을 자주 듣게 되면서, 그리고 그 별명을 주로 부르던 사람들과 더이상 자주 만나지 않게 되면서 스스로도 안쓰게 되었다.
엊그제였던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큰아이가 뛰어나오며 우리 집에서는 이제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기로 했단다. 엄마는 '한알', 큰아이는 '딸기', 작은아이는 '당근'이란다. 무엇을 기준으로 지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다들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땀에 젖은 웃옷을 벗고 있는데, 큰아이가 빨리 내 별명을 정하라고 난리다. 그 순간 '갈매기'가 떠올랐으나, 다들 2글자 별명이니 부르기 쉽게 맞춰야겠다 싶었다. 뭐가 있을까? 일단 옷부터 벗고 하면 안될까? 시간을 끌면서 고민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다가 뭐를 연상해서 그랬는지 큰아이가 '감자'라고 불렀다. 그러자 아이엄마는 대뜸 반발하며 '감자'가 얼마나 맛있는데, 이런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오래전에 쓰던 온라인 별명 '흰긴수염고래'를 떠올리며, '고래'라는 별명을 쓰겠다고 큰아이에게 말했더니, 이번에도 아이엄마는 곧바로 '술고래'라고 받아쳤다. 그래! 역시 그 반응이 나올줄 알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엄마가 '매기'라고 불렀다. '갈매기'에서 앞글자 빼고 '매기'란다. 이쯤되면 나도 거의 포기상태. 뭐 좋다. '매기'든, '감자'든, '고래'든 뭐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아니 세개 다 별명으로 쓰면 어떤가?
아침에 큰아이 학교 교문 앞에서 "딸기씨, 재밌게 놀다와!" 그랬더니, "매기씨, 다녀올게요!" 하고는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개구쟁이 녀석!
찌쭝과 땀똔
가족들 호칭 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처음에는 그리 쉽지 않은 발음이다. 큰아이는 함미(할머니)를 먼저 발음했고, 하뻐지(할아버지 - 이 발음은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를 나중에 발음했다. 동생네 조카들은 둘다 함미(할머니), 하삐(할아버지)라고 발음했다. 재밌는 건 우리 작은녀석은 거의 처음부터 원 발음에 가깝게 말했다. 함머니(할머니)와 하라머지(할아버지). 특히 할아버지 발음은 글자가 4개이므로 대부분 처음에는 2글자나 3글자로 줄이는 듯 한데, 요 녀석은 일찍부터 4글자의 발음을 들려줬다. (큰아이에 비해) 말이 늦은 편이지만 알아들을만한 단어를 구사할 때는 제법 원 발음에 가깝게 말하는 편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닫는다.
그럼 가족들을 부르는 말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당연히 삼촌이다! 큰아이는 신기하게도 삼촌을 '찌쭝'이라고 불렀다. 그 발음이 너무 재밌어서 자꾸만 삼촌을 불러보라고 해놓고, 온 식구들이 모두 웃곤 했다. 작은아이는 '땀똔'이다. 역시 말하는 시점이 늦은 대신 원 발음에 가깝다.
지난 [뗀뗀님과 넨넨님] 글 마지막즈음에 좋아하는 먹거리에 대한 '유아어'를 떠올리면서 우리 작은아이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공갈젖꼭지'를 뜻하는 '뚜뚜'를 적어놓았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이후 잘 생각해보니, 요 녀석이 좋아하고 유난히 찾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비줍'이다! 이게 뭘 말하는 걸까? 생협에서 박스채 시켜먹는 '배즙'을 말한다. 이 배즙은 달인 배즙이 아닌 생 배즙이다. 큰아이는 달인 배즙의 경우 잘 안먹는데, 생 배즙은 종종 먹는다. 그리고 작은아이는 아주 생 배즙의 귀신이라고 할만큼 좋아한다. 뭔가 기분 안좋은 일이 있으면 무조건 '비줍'을 찾으며 울어댄다. 기분이 안좋으니 일단 자기가 좋아하는 배즙으로 기분 전환을 하겠다는 뜻이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발달단계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 큰아이는 어떤 물건을 볼때마다 무조건 '엄마꼬', '아빠꼬', '함미꼬', '안야꼬(자기꺼)' 등으로 분류를 하고는 확인하듯이 물어보곤 했다. 무엇이든 물건을 보면 무조건 자신이 생각하기에 주로 쓰는 사람걸로 분류해냈다.
물론 작은아이도 짧은 기간동안 '엄마꼬', '아빠꼬'를 했지만, 길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게모야?'라는 질문을 더 많이 했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질문,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 처음에는 아이 말투를 따라해가며 재밌게 대답하다가도 세번, 네번 심지어 열댓번씩 질문이 반복되면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마련이다. 점점 굳어져가는 표정과 말투를 느끼면서도 아이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쯤 대답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제 풀에 지쳐 아이가 먼저 물건의 이름을 말하곤 한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아이의 이름을 말하는 시기와 발음의 차이이다. 큰아이는 비교적 빨리 자기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안야'(물론 유아어)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우리가 뭔가를 대신 해주려고 하면 '안야가! 안야가!'를 큰 소리로 외쳤다. 자기가 하겠다는 소리다. 자기 물건은 '안야꼬!'라고 강조하면서 절대 안주려고 했다.
그에 비해 작은아이는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불러줘도 발음이 모호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갑자기 자기 이름에 가까운 발음을 시작했다. '이떵이'(역시 유아어)이라고 말이다. 요 녀석도 요즘 '이떵이가! 이떵이가!'를 외치며 자기가 양말을 신겠다거나, 바지를 입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물론 아직 혼자서는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것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에 대해서도 '이떵이꺼!'를 분명하게 외치며 안뺏기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큰아이보다 개월수로 대략 3~4개월 이상 늦은 것 같다.
대신 작은아이는 확실히 행동발달이 빠르다. 큰아이도 아침마다 무겁다고 투덜대는 책가방을 작은아이가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무척 놀랐다. 큰아이는 지금도 거의 하지 않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행동도 작은아이는 겁도 없이 거침없이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역시 사람들은 다 저마다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구나! 새삼 아이들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나 역시 늘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뭔가 남들보다 잘 하는 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서 용기를 얻으며 또 한번 열정을 태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