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큰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한마디 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재밌게 놀다와!" 그말에 아! 오늘이 스승의 날이구나 싶었다. 아이는 오늘 학교에서 작년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께 그림편지를 쓸 거라고 했다. 교문 앞에서 재밌게 놀다오라고 머리를 쓰다듬은 후 들여보내고, 지하철 역을 향하면서 새삼스레 스승의 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실 학창시절부터 선생님께 감사나 존경의 감정을 느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내가 겪어 온 여러 선생님들 중에서 스승답다고 생각할만한 분은 거의 안계셨다.
유일하게 '스승'이란 표현을 인정해 주고 싶은 분은 중학교 1, 2학년 2년간 담임을 맡았던 음악선생님이다. 키가 크고, 근육질 몸매에 아주 잘생긴 얼굴의 남자 음악선생님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권투를 했다고 했는데, 어깨에서부터 팔뚝까지 내려오는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주먹은 또 어찌나 컸는지 그 큰 주먹이 정면으로 날아오는 상상만으로도 맞설 생각이 싹 달아날 것 같았다. 그 선생님은 여러모로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늘 관대하고 공평하고 학생들을 믿어주는 태도 때문이다. 나는 조금 말썽을 일으키는 편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그런 관대함과 공평함과 무심함(실은 무심함을 가장한 신뢰)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키가 작고, 덩치가 작은 편이었기에 약해보였던 나는 곧잘 덩치 큰 아이들과 부딪치곤 했다. 점심 도시락 반찬을 뺏아먹으려는 녀석들과 한 판. 샤프나 볼펜 따위의 학용품을 뺏으려는 녀석들과 한 판. 회수권이나 푼돈 따위를 뺏으려는 녀석들과 한 판. 예쁜 여배우(소피마르소?) 사진을 코팅한 책받침을 뺏으려는 녀석들과 또 한 판. 별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거나 장난을 거는 녀석들과도 한 판. 어쩌다보니 나는 우리 반에서 싸움을 제일 많이 한 녀석으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상대 전적도 나쁘지 않았다. 완승을 거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완패를 당한 경우는 아예 없었다. 당시의 기준(코피, 울음, 패배시인)으로 봤을 때, 대부분은 판정승 정도로 인정받았다.
치고 받고 싸우고나면 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순하게 생긴 놈이 심심하면 싸움박질이나 하고 상처투성이였으니, 담임 선생님이 몰랐을 리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싸운 건으로 훈계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학년이 바뀔 때 마지막으로 개별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는 한마디 하셨다. "내년에는 싸움 좀 고마해라! 니가 우리반에서 싸움 제일 많이 한다매? 덩치도 작은 놈이 무슨 싸움을 그리 하노?" 그러나 다음 해에도 나는 또다시 싸움을 반복해야 했다. 먼저 시비를 걸고, 뭔가를 뺏으려 드는 놈들에게 맞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봄에는 덩치가 엄청 큰 - 마치 곰같은- 놈과 싸우다가 눈 아래를 찢어놓았다. 그 놈은 이틀인가 학교를 못나왔다. 선생님은 잘못해서 눈을 다쳤으면 큰일 났을 거라고 한마디 하셨지만 심하게 야단치지는 않았다. 가을에는 내 물건을 훔쳐간 녀석과 싸움이 붙었는데,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좀 심하게 패버렸다. 바닥에 쓰러뜨려놓고, 몸통을 깔고 앉아서 두들겼는데, 나중에는 주먹 쥘 힘이 없어서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 녀석은 얼굴이 완전히 부어올라서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고, 나도 초반에 얻어맞은 덕분에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때도 선생님은 싸움을 했다는 사실보다는 너무 과하게 때렸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조심하라고 하셨다.
당시 다른 반 담임선생님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개인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싸운 사실만으로 매질을 했다. 만약 내가 다른 선생님을 만났다면 그 2년동안 수없이 매질을 당하느라 허벅지와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선생님은 단지 싸움질만 용서해 준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학생들 일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숙제를 안해가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던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숙제 좀 안할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오는 게 니한테 좋을끼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형편에 육성회비나 보충수업비 따위의 학비를 제때 내지 못했던 나를 위해 소액의 장학금을 알아봐주시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별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로 정말 많이 맞으면서 자랐는데, 당시 기준으로 맞을 짓을 많이 하고도 그 선생님께 매를 맞은 기억은 없는 듯 하다.(혹 반 전체가 손바닥을 맞거나, 아주 사소한 일로 맞은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선생님이건 남선생님이건 당시에 한번도 나를 때리지 않은 선생님은 거의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솔직히 별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없어서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는데, 아주 가끔 그 선생님은 어디서 뭘하고 계실까 궁금하기는 하다. 당시 선생님 나이가 아마도 지금 내 나이쯤 되었을까? 아니 좀 더 젊었으리라 생각된다. 이후로도 계속 관대함과 공평함과 무심함을 가장한 신뢰로 나 처럼 예민한 학생들을 더 빗나가지 않게, 스스로의 가치 판단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주셨으리라. 비록 직접 들려드릴 수는 없지만, 이 미욱한 글로서라도 감사하고 또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본다.
※ 아래는 본문과는 관계없는 스승의 날 권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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