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적반하장 

어제와 오늘 이틀 연속으로 어이없는 메일을 받았다. 함께 사업을 진행하는 타 단체 활동가로 부터였는데, 작년까지 담당이었던 활동가가 일을 쉬게 되면서, 인수인계를 받은 사람이다. 한때 같은 건물에서 일했었고,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처음엔 인수인계를 받을 당시에 세세한 부분까지 전달이 안되어 뭔가 오해가 생긴거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처음부터 정확한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그냥 자신의 말만 통보하여 전하는 태도도 예의가 아니었고, 마치 내가 뭔가 부당한 요청이라도 한 것처럼 표현해놓은 부분은 참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서 한참을 다시 읽고 또 읽어봤다.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건 너무 도가 지나치다 싶어서, 답장을 보냈다. 그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근거를 설명하고, 나에게 보낸 글에서 잘못 표현된 부분을 발췌해서, 그렇게 판단한 것이 어이가 없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하다고 해서 보냈다. 혹 내 감정이 잘못 전달될지도 몰라 꼼꼼하게 다시 살펴보고 발송버튼을 눌렀다.

오늘 아침에 메일을 열어보니 다시 답변이 왔다. 자신의 잘못은 전혀 깨닫지 못한 듯. 계속해서 똑같은 말투와 태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자신이 할 말이 아닌 주제넘은 표현들. 마치 자신이 내 상관이라도 된 것인양 단정짓는 표현들이 그대로였다. 어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다른 일도 못하고!) 메일을 쓴 것이 허무해진 꼴이었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자칫 언성이 높아지면 더 상황이 나빠질 듯 하여, 그냥 다시 메일을 썼다.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상했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다시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표현에 대해서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괜히 둘러서 말해봐야 또 똑같은 상황만 반복될 것 같았다. 어쨌거나 앞뒤 생각없이 직설적으로 말이 앞선건 그가 먼저였으니, 나로서는 더이상 그의 기분을 배려할 상황도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자꾸만 감정이 앞서는 걸 꾹 누르고 애썼다. 문장 하나를 쓰면서 몇 번을 지웠다가 다시 썼는지 모른다. 오해가 풀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가 쓴 표현이 잘못이었다는 점만 분명하게 전달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보다 해당분야에서 몇 년 먼저 시작한 선배이고,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는 점을 분명히 적었다.(이건 나이나 경력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라, 맘에 안들긴 하지만 다른 표현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 시간의 상당부분을 보내고나서도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급한 일이 두어건 있는데, 머리도 손도 그쪽으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다시 답장이 와 있었다. '굉장히 불쾌한 글이군요.'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여, 더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내용을 짧게 적어놓았다. 이런 상황을 '적반하장'이라고 표현하던가? 불쾌하다고? 사과가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나는 불쾌하지 않아서 그냥 점잖게 글을 보낸줄 아나? 먼저 불쾌한 글을 보냈던 사람에게 나름 굉장히 예의를 갖춰서 정성스레 답장을 보냈더니, 도리어 먼저 화를 내는 꼴이라니! 이건 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란 생각 밖에 안든다. 나로서도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러, 다시 답장을 보내야 하나, 전화를 걸어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는데, 도무지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더 나가면 싸움 밖에 안되지 싶은데, 굳이 내가 먼저 그 기본이 안된 인간에게 싸움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냥 이렇게 넘어가면 왠지 굉장히 손해보는 것 같고, 억울하기만 한데.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젠장 이틀째 기분이 나빠서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다! 

둘. 고열 

이번주는 출장으로 시작했다. 작년에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가급적 출장을 안가려고 노력했고, 꼭 가야할일이 있어도 그날 안에 돌아오도록 일정을 잡았다. 내가 없으면 밤에 아내 혼자 아이들을 돌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꼭 1박을 해야할 상황이었다. 이젠 아기가 제법 자라서 괜찮겠지 싶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없을 때 일이 생겼다. 

함께 출장을 간 이웃 일터의 친구가 한턱 내기로 해서, 맛있게 저녁을 먹으며 술도 한잔 곁들이고 나온 길이었는데, 전화가 왔다. 둘째가 열이 나고 있다는 아내의 전화였다. 모텔 방으로 돌아와서 친구녀석과 맥주를 한잔하고 있는데, 다시 고열이 나고 있다는 아내의 연락이 왔다. 아이가 아프다는데, 옆에 없으니 아무것도 해주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해열제를 먹이고, 미지근한 물로 닦아주고 있다고 했다. 밤에 아기가 열이 나면 어른들은 밤새 잠을 못잔다. 계속 이마를 짚어보고, 열이 오르면 미지근한 물을 받아와서, 수건을 적셔서 닦아주어야 한다. 둘이라면 번갈아서 아이를 보면서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는데, 아내 혼자서는 힘든 일이다. 마침 아이의 큰외삼촌이(아내의 큰오빠) 야간에 대리운전을 하신다는 사실을 떠올라서, 전화를 드렸다. 아기가 열이 심하다는데, 혹시 근처에 계시면 잠시 들여다보고, 도와주시라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곧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 걱정이 되어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친구 녀석은 함께 걱정을 해주다가 먼저 잠들고, 나는 하릴없이 틀어놓은 티비로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전화기만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새벽 늦은 시간에 해열제 덕분에 열이 조금 떨어졌다고, 오빠가 와서 도와주고 있다는 문자가 왔다. 조금 안심하고 나도 눈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뒤척이다가 한참만에 잠이 든 덕분에, 아침에 힘겹게 눈을 떴다. 전화기를 보니, 새벽녁 다시 열이 심하게 올라서 응급실로 달려갔었다고 한다. 큰 아이는 자도록 놔두고, 오빠의 도움으로 아내와 아기만 병원으로 갔다고. 그랬더니 큰 애가 혼자 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장모님께서 새벽부터 집으로 달려오셨다고 했다. 아기는 막상 응급실에 가서는 다시 열이 떨어져서 간단한 진찰만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그랬는데 병원비는 엄청나게 나왔다고!) 사실 몇 해전 첫째가 딱 지금 둘째만 했을 때에도 고열때문에 밤새 고민하다가 새벽에 응급실로 뛰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별 도움은 받지 못하고, 병원비만 엄청나게 나온 적이 있었다. 어쨌든 다시 상태가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문자를 받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도 아기는 주기적으로 열이 올랐다. 거의 40도까지 열이 오르곤 해서, 아예 아기를 물 속에 담가놓고 열을 떨어뜨렸다. 아기는 계속 울었고, 얼르고 달래가며 열을 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아기는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은 열이 오르는 빈도가 많이 줄어들고, 아주 고열이 아닌 39도 수준으로 온도가 조금 떨어졌다. 며칠동안 잠을 못자서 아기의 눈 주위에 다크써클이 생겼다. 10개월된 아기가 다크써클이라니! 아내도 나도 잠 못자고,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다. 큰 아이도 밤에 아기 우는 소리 때문에 자꾸만 깨다보니 역시 피곤해하고 있다. 온 가족이 다 죽을 맛이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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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3-1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날은 풀려가는데 어려운 몇 일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겪지 않으면 좋은 일들인데...살다보면 꼭 겪게되는 일들이네요.

남자들의 세계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같음 저 메일을 보낸 사람에게 다시 답 메일을 보냈을 것 같아요.
본인때문에 나 역시 기분이 매우 불쾌하다는 점을 알릴 것 같아요.
겉으론 니가 잘못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자기도 알지 않을까요?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일 수도..

아기는..고열은 사실 좋은 게 아닌데.
응급실 말고 소아과를 가보시는게 좋지 않을까.
응급실에서 제대로 된 진료가 이루어지는 걸 못봐서요.
어쨌든, 힘든 시기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래요.

감은빛 2011-03-19 04:19   좋아요 0 | URL
기본이 안된 그 인간은 여성입니다.
제가 '그'라고 표현해서 남자라고 생각하셨나봐요.
저는 왠지 '그녀'라는 표현이 맘에 들지 않아서,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충분히 알아듣게 두 번이나 메일을 보냈기 때문에,
더이상 평범한 방법은 소용이 없는 것 같구요.
뭔가 적당한 방법이 없을까 고민중입니다.

아, 이 글에는 미처 쓰지 못했는데,
소아과에 계속 다니고 있었습니다.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써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울창 2011-03-1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개월 아이에게 다크써클이 생길 정도라면 부모는 온몸이 다크써클이지 않을까 싶네요....힘내셔요, 감은빛 님!

감은빛 2011-03-19 04:20   좋아요 0 | URL
온몸이 다크써클이라는 표현 재밌네요~ ^^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1-03-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도면 어린 아이가 정말 힘들었겠어요. 감기인지 어서 빨리 나아야 할텐데 걱정이네요. 저도 고맘때 열나면 무조건 벗겨서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계속 닦이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힘내세요;

감은빛 2011-03-19 04:22   좋아요 0 | URL
목에 염증이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그 쪼그만 녀석이 살이 쏙 빠져가지고 고생하는 거 보니, 참 맘이 아픕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열나면, 진짜 가슴아프죠. 아이도 힘들구요. ㅠㅠ

감은빛님은 요즘 진짜 바쁘신듯데다 기분 나쁜 메일도 받으시고
아이는 아프고...... 힘드시겠어요.

음.... 예의없는 메일, 본인은 무엇이 잘못인지 모를지 몰라요.
자신의 상황에서만 바라보는게 인간이니까요. 저 역시 화나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면 제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눈꼽만큼의 주저로 인해 그냥 덮어두고 있어요.
가끔 제 3자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니까요, 누가 잘못 했냐고.

모든 일이 잘 풀리시고, 화창한 봄날 되시기 바랄게염.

감은빛 2011-03-19 04:26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번주는 말그대로 최악의 날들이었습니다!
기분도, 몸상태도 뭐하나 좋지 못한 상황에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한 주가 지나가버렸네요.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아주 상세하게 주고받은 표현들을 전달했습니다.
아내 말로는 그 여성활동가가 백번 잘못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왠만해선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너무 화가나서 분을 삭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조만간 확실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려고 고민중입니다.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03-18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도까지 올라갔다니... 아이가 걱정이로군요. 지금은 깨끗이 나아서 웃고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은빛님도 편안해지시구요...

감은빛 2011-03-19 04:31   좋아요 0 | URL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대신 오랫동안 고열에 시달린 탓에,
온 몸에 열꽃이 올라왔어요.
빨갛게 올라온 열꽃을 보고 있으니, 너무 안쓰럽네요.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3-19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가 아프면, 것도 말 못하는 아기가 아프면...그것보다 더 힘든게 없죠.
그토록 열이 높다는 건, 그리고 며칠째 지속된다는 건 어딘가 염증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소아과를 한번 데려가 보세요.

얼른 나아서 아기도, 감은빛님도 편안한 주말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은빛 2011-03-19 04:33   좋아요 0 | URL
네, 글을 쓸때 미처 못 썼는데,
소아과에 계속 다녔습니다.
목에 염증이 있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인후염이라고 했던것도 같고..)
이제 열이 나는 증상은 거의 나았는데,
설사를 자주 하고, 온 몸에 열꽃이 올라왔습니다.
엊그제 의사선생님이 열꽃이 올라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더니,
정말 오늘 열꽃이 올라오더라구요.
에휴 아기가 너무 불쌍해서 맘이 아픕니다.

염려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3-19 16:43   좋아요 0 | URL
열꽃이 올라왔다는 건, 열이 내렸다는 얘기네요.
설사도 마찬가지구요.
미지근한 보리차 넉넉히 먹이세요.
오늘은 좀 주무실 수 있겠네요~^^

루쉰P 2011-03-2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신경 쓰는 일이 많은 것이 삶인 것 같습니다. ^^ 아파트 경비를 하다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로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아무쪼록 걱정 없는 삶이 되셨으면 하네요.^^

감은빛 2011-03-21 15:33   좋아요 0 | URL
아파트 경비일을 하시는군요!
어찌 생각해보면 지루할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무척 힘든 일일 것 같아요.
그렇죠. 별것도 아닌 걸로 따지고 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힘든 일이 많으시겠어요!
루쉰님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3-22 16:36   좋아요 0 | URL
지루함은 지나가는 사람도, 지나가는 고양이도 단 한번도 시선을 주지 않고 그냥 마치 저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상쾌하게 배경 취급해 주는 것이고, 힘든 일은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가 힘들죠. ㅋㅋㅋ 근데 힘들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 누구나 모두 아무리 잘 살고 잘 나가도 고뇌, 또 고뇌가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음...뭔가 비관적인가요??

감은빛 2011-03-23 13:21   좋아요 0 | URL
아뇨! 비관적이지 않은걸요.
누구나 나름의 고뇌가 있고, 힘겨워하는 일들이 있다고 말씀에 동감합니다.
다만 시선을 어디에 두냐는 것이 다를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남에게 시선을 두고,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시선을 두겠죠.

따라쟁이 2011-03-2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저는.. 그러니까..음.. 아이가 이미 열이 다 떨어진 후에 읽었고..음.. 일도 사과를 이미 다 받은 후에 읽었고..

감은빛 2011-03-23 13:16   좋아요 0 | URL
후후 앞에 먼저 글을 읽고, 읽으셨다니, 재미 없으셨을텐데.
고맙습니다!
 

20대에는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상상과 대화를 더 많이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지 많았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미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늘 지나간 얘기들을 되씹고, 곱씹게 된다. 더이상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 같고, 무엇도 해낼 수 없을 것 만 같다. 

며칠전 아주 오랫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대학동기이자 초등학교 선배인(엄연히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말을 트고 지낸다.) 나와 아주 독특한 인연을 가진 친구.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유일한 대학 동기이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한치 조각을 씹으며, 옛 추억을 열심히 떠들어댔다.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껄여댄다. 그러다 가끔 정신이 번쩍 드는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내가 아주 싫어했던 선배가 커밍아웃을 선언했다는 얘기는 술이 깰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재수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한때 사귀었던 여자후배 얘기가 나올 때에는 그 녀석과 자주 거닐었던 학교 뒷편 산책로가 떠올랐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다는 얘기. 그 녀석도 누군가에게 내 이름을 들으면 그 산책로를 떠올릴까? 누군가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돈을 얼마나 잘 번다더라. 누군가는 선을 봐서 만난 여성과 곧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더라. 끝없이 이름들이 거론되었다가 잊혀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학시절 학과방 구석에서 긴 앞머리를 늘어뜨리고, 기타를 튕기며 여자후배들을 꼬시곤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촌스럽게만 느껴지는데, 그땐 그게 멋있게 보일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며칠 전 김건모가 모 티비 프로에 나와서 데뷔앨범에 들어있는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불렀던데, 그 노래를 참 좋아했다. 특히 '기타를 튕기며 노랠 불렀지. 네가 즐겨듣던 그 노래'라는 구절을. 

이름모를 꽃잎이 흩날리는 봄이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녀석은 캠퍼스의 봄에 한껏 취해있었다. 수업따윈 제쳐놓고 녀석과 학교 뒷편 산책로를 거닐었다. 한 손에는 통기타를 들었고, 다른 손은 녀석의 손을 잡았다. 큰 나무 아래, 편편한 바위를 골라 앉아서, 밤새 연습한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녀석은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감은 눈 위로 자그마한 꽃잎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흩날리며 떨어져내리는 그 꽃잎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해 가을 나는 잠 못드는 밤, 빗소리를 들으며 기타를 튕기곤 했다. 어느 봄날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던 숲 길, 큰 나무 아래 편편한 바위위에서 들려주었던 그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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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3-1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그렇게 삶이 끝나도 좋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죠.
그래도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고.........
저는 요즘 TV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문득 조동진 님의 나뭇잎 사이로 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엄청나게 불렀었는데 말이죠,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누군가의 기타에 맞추어 함께.

감은빛 2011-03-14 14:15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죠.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게 추억이라 생각합니다.

꿈꾸는섬 2011-03-1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이 있다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가끔 떠오르는 추억을 생각하며 그때를 또 그리워하게 되니 말이에요. 감은빛님 글 읽다가 저도 모르게 추억에 빠져드네요.

감은빛 2011-03-14 14:16   좋아요 0 | URL
네, 한 사람의 추억은 또 다른 사람도 추억으로 빠뜨리게 되나봐요.
함께 추억에 빠져주셔서 고맙습니다! ^^

따라쟁이 2011-03-1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이 몰려들고 있는 봄날이에요. 비라도 내리고 나면 추억의 먼지들이 좀 가라앉을까 싶었더니 그것도 아닌가봐요. 네. 봄이에요.

감은빛 2011-03-14 14:18   좋아요 0 | URL
비가 내리면 더 생각나는 것 같아요.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들이 비를 타고 흘러들어요.

양철나무꾼 2011-03-1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이라는 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종의 굳은살 같아요.
전 추억이라고 부를 20대가 한없이 무미건조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 봄밤 님의 글을 읽으니 상념에 젖는걸요~^^

감은빛 2011-03-19 05:18   좋아요 0 | URL
어쩜 그렇게 늘 멋진 표현을 하실 수가 있나요?
굳은살이라는 말. 공감이 갑니다.
얼마나 무미건조한지는 알수 없지만,
그래도 양철님에게는 소중한 추억들이겠죠?
그래서 저와 함께 상념에 젖을 수 있는 거겠죠?
 

하나. 짜증 

 계단을 오른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매일 겪는 일이지만, 계단 끝에서 시야가 확 트이는 순간은 늘 어떤 쾌감이 든다. 해방감이랄까.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시간은 6시를 막 넘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 퇴근시간이 지났다. 아직 어린 둘째 녀석은 담임선생님이 퇴근하고나면 자꾸 운다고, 되도록이면 6시전에 데리러 와달라고 하는데, 나도 퇴근시간은 6시다. 집에서 일터까지 빨리와도 50여분(걷는시간 포함) 오늘처럼 양해를 구하고 일찍 퇴근한 날이 아니면 7시 전에 도착하는것 조차 쉽지 않다. 다시 한번 시계를 보고 뛰어볼까 생각했다가, 허리와 골반이 계속 좋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냥 걸음을 좀 더 재촉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창 바삐 걷고 있는 나에게 어느 여성이 다가선다. 뭐라고 말을 거는데, 무시하고 지나친다. 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뻗는다. 만약 옷자락에 손끝이라도 스친다면 화를 버럭 내리라 생각했지만, 손이 닿기 전에 나는 이미 그녀를 지나쳤다. 어차피 귀에 꽂은 이어폰 때문에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뭐라고 했을지는 뻔하다. '복이 많으신데...' 라던가 '참 인상이 좋으신데....' 라던가. 질리지도 않는 뻔한 말을 내뱉으며 접근하는 사람들. 정말 하루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그 사람들에게 시달리다보니 화가난다. 지난번에는 남자 하나와 여자하나가 양쪽에서 나를 막아서듯이 달려들어서 그 사이를 뚫고 지나쳤는데, 남자가 내 팔을 잡았다. 너무 화가나서 확 째려보았더니, 곧바로 손을 놓았다. 만약 손을 놓지 않았다면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뜨렸을지도 모른다. 바쁜 퇴근길에 매일같이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증산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제발 나 좀 건드리지 말라고! 

둘. 두부부침 

 둘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도착. 역시 담임 선생님은 안계신듯, 보조선생님이 아기를 안고 나오셨다. 아기를 안은 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안으세요' 아기를 조금 앞으로 내밀어줘야 내가 손을 내밀텐데, 그렇게 안고 있는 채로, 어떡하라는 건지. 자칫 잘못하면 선생님의 몸에 손이 닿을텐데.... 아기의 바깥쪽을 먼저 받고, 내 몸쪽으로 아이가 기울어지기를 기다렸다가(자연스레 선생님 몸에서 아기가 떨어지면) 다른 손을 뻗어 아기를 안았다. 힘들다.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 내가 아기를 안고 있으면, 선생님이 아기띠를 메도록 도와주는데, 이 보조선생님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자꾸만 시간을 끈다. 어디를 어떻게 끼워야할지 모르겠단다. 아기를 안은 자세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겨우 아기띠를 메고 어린이집을 나섰다. 첫째는 요즘 어린이집을 마치고 피아노학원에 다닌다. 둘째를 안고 첫째를 만나러 갔다. 첫째 녀석은 피아노 공부를 다 마치고 그림을 그리고 놀고 있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집으로 향하면서, 저녁 반찬에 대해 잠시 고민한다. 어제 '제철 꾸러미'에서 받은 두부를 계란에 묻혀서 부쳐야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첫째에게 둘째를 잘 보라고 해놓고 얼른 두부부침을 만들었다. 첫째 아이가 맛있다고 잘 먹었다. 

셋. 내 새끼들!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을 때인 것 같다. 빨리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워야 하는데, 아기는 울어대고, 첫째 아이는 말을 안듣고 있으면 정말 힘들다. 미칠 것 같다. 반면 가장 행복한 때도 역시 아이들을 돌볼 때인 것 같다.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아기도 깔깔대며 웃고, 큰 녀석도 깔깔 웃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예쁜지 모른다. 한참을 장난치고 놀다가 한팔에 하나씩 두 녀석을 꼭 끌어안았다. '내 새끼들!' 두 녀석의 뺨을 동시에 부비며 장난을 쳤더니, 또 둘이 깔깔 웃어댄다. 이제 씻기고 재워야겠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셋 다 잠들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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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3-1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힘들 때는 아이들을 돌볼 때,
가장 행복한 때도 아이들을 돌볼 때...
인생의 비밀이 숨어있는 문장인듯..
심오합니다! ^ ^

감은빛 2011-03-12 00:46   좋아요 0 | URL
인생의 비밀까지야 모르겠지만,
그냥 요즘 사는게 그러네요.
그만큼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간다는 얘기죠.

cyrus 2011-03-11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도 나름 바쁘시군요. 그래도 애들을 씻기고 재우고 요리까지 하시는 모습이
멋진 슈퍼파파네요 ^^

감은빛 2011-03-12 00:48   좋아요 0 | URL
슈퍼파파라뇨? 요즘 시대에 이쯤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라고 말하면 여성들에게는 환호를! 남성들에게는 야유를 듣겠죠.
늘 활동가로서, 운동가로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노력합니다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네요. 힘들어요!

꿈꾸는섬 2011-03-1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제가 지금 울컥하고 있어요. 하루종일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니 안쓰럽고, 그 아이를 좀 더 일찍 데려가려고 잰걸음을 걷었을 감은빛님을 생각하니 또 안타깝고 두 아이 데려다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까지...보통 주부들의 일상인데, 어찌 이리 공감 백배하게 만드시는지......
아이들과 함께 있을때 행복하다는 감은빛, 너무 좋은 아빠, 멋진 아빠세요.^^

감은빛 2011-03-12 00:52   좋아요 0 | URL
네, 보통 주부들의 일상이기 때문에, 공감하시는 거죠.
저도 일주일에 이삼일은 보통 주부처럼 살아야 하거든요. ^^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순오기 2011-03-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하루 하루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쁜 '내 새끼들'도 쑥쑥 커갑니다.^^
아이 때문에 힘들고 행복하고~~~ 그때가 좋은 때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죠.
힘내세요~~ 감은빛님!!

감은빛 2011-03-12 00:5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점점 커가는 첫째 녀석을 보면서,
아이들 자라는 게 참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가는데,
그럼 또 쑥 커버린 느낌이 들겠죠.
한 발 멀리 가버린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벌써부터 아쉽습니다.

고맙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3-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새끼들! 그거 한마디로 충분하네요.
고운 페이퍼입니다. 감은빛님 건강 챙기시고, 즐거운 한주 되셔요.

감은빛 2011-03-14 14: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바쁜 한 주가 될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즐거운 한 주 되시길~!

hnine 2011-03-12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참 따뜻한 분이시군요. ^^

감은빛 2011-03-14 14:13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따라쟁이 2011-03-1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다는 감은빛님은 애들도 씻겨주고.. 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까 하다가.. 이젠 좀 질릴것 같아서. 패스 하고..
감은빛님, 참 따뜻한 분이시군요. ^^ 2 정도로 하겠습니다.

감은빛 2011-03-14 14:14   좋아요 0 | URL
흠, 저도 그 댓글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만.... ^^
그럼 저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2' 로 하겠습니다.
 

하나. 지난 2월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느낌이다. 평소보다 짧은 달인데, 설 연휴까지 있었으니. 그래서 원고 마감에 대한 걱정과 압박도 컸다. 이번 마감은 정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2월 15일쯤 대략적인 글의 주제와 소재를 잡아놓고, 20일까지는 글을 넘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글이 안써졌다. 일과시간에는 일상업무로 바빴고, 집에서는 각종 집안일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주로 새벽에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으나, 빈 화면에 커서만 깜빡일 뿐. 도저히 자판이 두드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즈음부터 이유없이(아마 오랫동안 잘못된 자세가 굳어져서) 골반이 아프기 시작해서, 컴퓨터 앞에 오래앉아 있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원고 마감일을 넘기고, 두번째 약속시한이었던 25일까지도 글을 쓰지 못했다. 2월의 마지막 날. 28일이 최종 마감일이었다. 이날 오전까지는 무슨일이 있어도 글을 넘기기로 약속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면서, 오늘 밤에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일주일동안 쌓인 피로 때문인지. 아이들을 재우면서 잠들어버렸다. 토요일엔 약속이 있어서 나갔고, 밤에 처가에서 잠을 잤다. 일요일엔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했고, 밤이 되어서야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써야했으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결국 28일 아침까지 단 한줄도 쓰지 못한채 출근했다. 커피 한 잔을 타놓고 맹렬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시간 반 안에 끝내야 했다. 대략적인 틀을 머리속에 잡아놓고 있었기에 그냥 마음가는대로 두드렸다. 1시간 안에 정해진 분량을 채우고 다시 읽으면서 맞춤법을 점검하고, 맘에 안드는 문장을 버리고, 새로운 문장을 채워넣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채 안되어, 완전히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원고를 넘겼다. 최단시간 기록이다! 그렇다면 원고의 질은? 모르겠다. 일단은 그냥 잊어버리련다. 

둘. 토요일 모임이 있어서 큰 아이랑 함께 집을 나섰다. 아내는 둘째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모임이 끝날 때즈음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집으로 바로 돌아갈지, 처가로 갈지 물었더니, 처가로 와서 데려가달란다. 출발할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겠다고. 알겠다고 하고 지하철을 타고 처가로 갔다. 지하철을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데, 꼼장어 집이 보였다. 갑자기 꼼장어가 무척 먹고 싶었다. 옛날에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 맛있게 해주셨던 어느 노점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맛이 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꼼장어에 소주 한잔이 간절했다.아내는 지금 짐을 다 싸놓고 기다리고 있을텐데. 전화를 해서 오늘은 자고 가자고 했다. 꼼장어와 장모님께서 좋아하시는 막걸리를 사갈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아이를 먹이려고 일부러 양념이 아닌 소금구이로 샀다. 오랫만에 장모님과 아이와 함께 꼼장어를 참 맛있게 먹었다. 

셋. 골반이 아픈 증상이 쉽게 낫지 않고 있다. 물론 처음 아픔을 느꼈을 때부터 쉽게 나으리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내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올게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자꾸만 병원이나 한의원을 가라고 부추기는데, 원인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다. 나쁜 자세 때문에 생긴 증상은 자세를 바로잡아야만 고칠 수 있다. 자세를 바로 잡는 건 짧은 기간에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아주 어려운 일이다.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의사가 대신 해줄 수 있거나,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여러모로 많이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구체적이지 않다고 해야할까. 친절하지 못하다고 해야할까. 암튼 큰 틀에서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다지는 데에는 도움을 받았지만, 실제로 아픈 증상을 고치는데에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아무런 기대없이 빌린 한 권의 책이 나를 살렸다! 

  

 

 

 

 

 

  

 

제목이나 표지의 느낌만 보면 보디빌딩이나 운동경험을 쓴 책인 것 같지만,(나는 그런 내용이라 생각하고 빌렸다.) 실제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무술가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몸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잘못된 방식으로 운동을 해왔고, 어떻게해야 고관절과 척추를 바로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제는 이 책을 참고로 하여 바른 마음가짐과 자세로 고관절과 척추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운동을 조금 해보았다. 

며칠동안 아침마다 골반이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는게 무척 힘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픈 정도가 훨씬 덜했다. 그리고 이을 닦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으면서도 계속 저자가 강조한 점을 생각하며 움직였더니, 통증이 덜했다. 출근길을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을 만난 것이 대단한 발견이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이번에 골반이 아픈 증상이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다. 덕분에 더 늦기 전에 내 몸을 돌아보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제부터는 힘들어도 매일매일 실천하는 것만 남았다. 

꽃샘추위와 함께 시작한 삼월. 모 서점의 부도로 시작한 삼월. 무엇하나 좋아보이지 않고, 오히려 막막하기만 한 상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깨달음과 함께 시작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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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3-0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설 때 전 부치고 허리가 아파 애를 먹었습니다.
무엇보다 허리가 아프니 운동을 못하겠더군요.
물론 운동이래봤자 스트레칭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을만해서 허리를 돌려보면 다시 아프고 지금은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낫더군요.
사실 지난 가을부터 몸에서 뼈 부딪히는 소리가 나던데
운동을 안하니 그 소리도 훨씬 덜 나더라구요.
그래서 깨달았죠. 아, 지금까지 내가 뭔가 운동을 잘못했구나!
저 책이 저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보고 싶어지네.

근데 모서점이 부도가 났다굽쇼? 어디랍니까?
요즘 오프 서점 안 될텐데. 온라인 서점 때문에. 안 됐네요.ㅠ

근데 살펴봤더니 남자용이네요. 여자용은 없나요? 흐흑~

감은빛 2011-03-11 10:36   좋아요 0 | URL
운동을 하면 적당히 뻐근하고,
딱 기분좋을만큼 피곤하고 그러면 정상인데,
아파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라면, 뭔가 잘못된 것 같네요.

이 책은 남자용이라기 보다는,
무술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초체력운동을 하면 좋은가.
어떤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는 게 좋은가 하는 내용입니다.
남녀 구분은 없지만, 그리고 일반인에게도 적용은 가능하지만,
일단 무술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랍니다.

2월 말일에 제법 유명한 모 총판이 부도를 내서,
출판계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답이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

무해한모리군 2011-03-0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좋아지셔야 할텐데 저도 좀 따스해지면 동네 한바퀴라도 뛸려구요.
서점 어디가 부도가 났나봐요. 하긴 저도 서점에 간것이 한참 전이네요.
그림 잘그리고 예쁘게 웃는 단야에게 안부전해주세요.

감은빛 2011-03-11 10:39   좋아요 0 | URL
자꾸만 몸에 이상이 생기는데,
이런 일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습니다.
날이 풀리면 좀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점이라기보다는 납품을 전문으로 하는 총판이 고의부도를 내서,
난리가 났습니다. 자꾸만 이런 일이 생기네요.

단야에게 안부 전할게요. 아마 좋아할거예요.
답이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

잘잘라 2011-03-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여자 몸 만들기가 필요해요. 그렇쟎아도 '여자 맞아?' 하는 소릴 듣는데 몸매라도 좀 어떻게 여자티 나게 만들어봐야할텐데.. 흑흑. ㅜㅜ

감은빛 2011-03-11 10:40   좋아요 0 | URL
네, 스텔라님께 답으로 적었지만,
이 책은 남자용이 아니라 무술하는 사람을 위해 적은 책입니다.
남녀 구분은 없구요. 일반인도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읽어볼만합니다.
다만 기본 목적은 무술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라는 거죠.

답이 많이 늦었네요. 죄송! ^^

마녀고양이 2011-03-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두 골반이 아프시네요. 이런.
거기다 여전히 바쁘시구요.

감은빛님... 저도 따라서 언니네 텃밭에서 받기 시작했어요.
지난 주에 첫 상자를 받았는데 너무 기분 좋았답니다. 내일 또 오겠네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팠는데, 늦었습니다.

빨리 나으시고, 좋은 일 가득 하세요.

감은빛 2011-03-11 10:43   좋아요 0 | URL
제철 꾸러미 받으시는 군요!
동지가 또 한명 생겨서 기분이 좋아요!

아프다가 나았다가 또 심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오래가서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노력을 하는 만큼 좋아지리라 믿습니다.

cyrus 2011-03-0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월달이 워낙에 적은 일수의 달이라서 그런지 저도 금방 지나간거 같아요,^^;;
그리고 아프신 곳 얼른 나으시길 바라요.

감은빛 2011-03-11 10:44   좋아요 0 | URL
요즘 정말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얼른 좋아질 것 같아요! ^^

따라쟁이 2011-03-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감은빛님은 밥하고 아이들 재워주고 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아주고 씻겨주는 등등에다가 처가로 에스코트까지 가시는 그런 남자셨군요~!(도대체..언제까지 이런 댓글을 달려고 이러는지;;;;)

저도 종종 골반이 <틀어>지곤 하는데 실천해보시고 나으시거든 전수하여 주셔요.^^

감은빛 2011-03-11 10:47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 댓글은 늘 재밌습니다. ^^
요건 전수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저 시키는대로 해보는 거라서 말이죠.
원리를 잘 이해해야 설명도 가능할 것 같은데....
조만간 저 책의 리뷰를 써볼 생각입니다.

lo초우ve 2011-03-09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리가 아플때 골반이 아플때... 지네가 좋다고 하는뎅.. ㅡ,.ㅡ;;
지네.. 가끔 우리집에 기어들어오기도..ㅋ
감은빛님 골반아픈거 고질이랍니다.
언넝 치료 받으세용 ^^
홧팅~!

감은빛 2011-03-11 10:49   좋아요 0 | URL
헉! 지네! 그렇군요.
하얀안개섬님 댁에 지네도 잡을 겸해서, 놀러 한번 가야겠네요! ^^
고질병 맞습니다.
자세가 나빠서 생긴 증상은 쉽게 낫지 않더군요.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렸나
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 / 생각비행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 ‘통섭’이란 말에 관심이 많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만 관심을 가져왔는데, 최근에는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관련된 소식이나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메모해두었다가 찾아보게 된다. 예전에는 그냥 흘려 넘겼을 주제에도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도 ‘지구과학’이나 ‘생물’, ‘물리’ 등의 과목은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기초지식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데, 가끔 새로운 사실들을 접할 때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는 인문학적 지식들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군집생활을 하는 생물들의 생태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때,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이론이 도움이 된 적이 있다. 이런 경우가 ‘통섭’의 일례에 속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여기 생물학자를 꿈꾸었던 한 사람이 거대 독점기업을 무너뜨린 사례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통섭’의 힘에 대해 깨달았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록펠러를 무너뜨린 여성이라고 소개받았다. 단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어떤 사람인지 그 출생에서부터 차근차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는 록펠러와 타벨의 관계를 좀 더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두 사람의 삶을 번갈아가며 소개하고 있다. 시간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소개하는 글의 전개는 어떻게 보면 흥미진진할 수도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에게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한창 타벨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록펠러 얘기를 다시 시작하니 흐름이 끊겨 버리기도 한다.

이 책은 타벨과 록펠러의 삶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잘 몰랐던 1800년대 후반 미국의 역사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게 된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꾸만 주변 인물들로 주의가 분산되어서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방대한 자료를 놓고,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소개하고 싶었던 작가의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벨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생물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 호기심이 많았고, 틈만 나면 현미경을 들여다보았고, 진화론과 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특히 진화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관을 수정해나가며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타벨은 대학 졸업 이후 잠깐 사립학교 주임교사를 맡았다가, 다시 <셔토퀀>이란 잡지에 편집기자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언론인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연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적저한 일을 찾게 되면 언제든 그만두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생물학자가 되지 못하고, 결국 언론인으로 살아간다. 우여곡절을 겪다가 <매클루어 매거진>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폴레옹’이나 ‘링컨’에 대한 기획기사를 통해 큰 인기를 누렸다. 나중에 타벨이 록펠러의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양한 학문에 걸친 관심과 연구가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그는 ‘탐사보도’의 선구자였고, 록펠러를 쓰러뜨린 장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섭’의 힘을 실제로 보여준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여러 사람들이 ‘삼성’에 대해 언급 한 것을 보았다. 책 뒷부분의 ‘옮긴이 후기’에서도 ‘삼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삼성’이란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타벨의 폭로가 없었다면,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추악한 진실은 영영 드러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진실을 파헤쳐서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침내 그들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때가 곧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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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0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메리포핀스님 서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때도 기억에 남았는데,
님의 이런 조곤조곤한 글쓰기를 통해서는 그녀의 삶을 엿보게 되는걸요.
'통섭'이라는 단어를 잘 기억해 두려구요~^^

감은빛 2011-03-02 13:26   좋아요 0 | URL
두꺼운 분량만큼 여러모로 남는게 많은 책입니다.
그리고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나무꾼님 책 읽는 스타일을 보면 이미 '통섭'을 실천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마녀고양이 2011-03-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섭이라는 책을 사놓고도 처음 읽다가 내팽겨쳐 둔... 어렵더라구요, 개념이. ㅠㅠ

그래두, 제가 상담 방면으로 혹시 일을 하게 된다면
예전에 했던 IT일이나 대기업 근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성에 맞진 않지만 억지로 사고 방식 체계를 바꾸어 놓은
전산 분야에서 일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두번 다시 하고 싶진 않지만요. ^^

감은빛 2011-03-10 13:56   좋아요 0 | URL
그럼요.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하던, 그 전에 했던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되죠.
지금 공부하고 계신 분야가 상담쪽인가봐요.
왠지 잘 하실 것 같아요!

답이 많이 늦어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