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는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상상과 대화를 더 많이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지 많았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미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늘 지나간 얘기들을 되씹고, 곱씹게 된다. 더이상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 같고, 무엇도 해낼 수 없을 것 만 같다.
며칠전 아주 오랫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대학동기이자 초등학교 선배인(엄연히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말을 트고 지낸다.) 나와 아주 독특한 인연을 가진 친구.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유일한 대학 동기이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한치 조각을 씹으며, 옛 추억을 열심히 떠들어댔다.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껄여댄다. 그러다 가끔 정신이 번쩍 드는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내가 아주 싫어했던 선배가 커밍아웃을 선언했다는 얘기는 술이 깰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재수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한때 사귀었던 여자후배 얘기가 나올 때에는 그 녀석과 자주 거닐었던 학교 뒷편 산책로가 떠올랐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다는 얘기. 그 녀석도 누군가에게 내 이름을 들으면 그 산책로를 떠올릴까? 누군가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돈을 얼마나 잘 번다더라. 누군가는 선을 봐서 만난 여성과 곧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더라. 끝없이 이름들이 거론되었다가 잊혀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학시절 학과방 구석에서 긴 앞머리를 늘어뜨리고, 기타를 튕기며 여자후배들을 꼬시곤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촌스럽게만 느껴지는데, 그땐 그게 멋있게 보일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며칠 전 김건모가 모 티비 프로에 나와서 데뷔앨범에 들어있는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불렀던데, 그 노래를 참 좋아했다. 특히 '기타를 튕기며 노랠 불렀지. 네가 즐겨듣던 그 노래'라는 구절을.
이름모를 꽃잎이 흩날리는 봄이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녀석은 캠퍼스의 봄에 한껏 취해있었다. 수업따윈 제쳐놓고 녀석과 학교 뒷편 산책로를 거닐었다. 한 손에는 통기타를 들었고, 다른 손은 녀석의 손을 잡았다. 큰 나무 아래, 편편한 바위를 골라 앉아서, 밤새 연습한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녀석은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감은 눈 위로 자그마한 꽃잎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흩날리며 떨어져내리는 그 꽃잎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해 가을 나는 잠 못드는 밤, 빗소리를 들으며 기타를 튕기곤 했다. 어느 봄날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던 숲 길, 큰 나무 아래 편편한 바위위에서 들려주었던 그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