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어제 퇴근시간 무렵 내린 비는 비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무서운 모습이었다. 물벼락이라고 해야 할까? 물폭탄이라고 부르면 더 잘 어울릴까? 암튼 단순히 비 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어떤 것이었다. 나와 일터 동료는 퇴근 길이 무서워 자연스럽게 야근에 돌입했다. 비가 좀 잦아들면 퇴근할 생각으로 일을 더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친한 후배와 문자를 주고 받았는데, 비가 오니 전을 부칠까 하고 묻더라. 전을 부칠테니 놀러 오라는 얘기였다. 마침 폭염에 폭우까지 겹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에어컨이 없이 선풍기 만으로는 이 더위와 습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네 뒷산 자락에 있는 우리집으로 올라가는 그 가파른 비탈길은 폭우 때문에 폭포로 변해있을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도 거의 급류가 몰아치는 강처럼 변한 그 비탈길을 헤치고 올라건 적이 어려번 있었기 때문에 가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 오늘은 그 후배의 집에서 에어컨 이라는 신문물을 누리며 맛있는 전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폭우는 한참 후에 좀 누그러졌고, 내가 사무실을 나설 무렵엔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 후배가 요즘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고 해서 나란히 앉아 10시 반에 시작하는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티비가 없는 삶을 20년 넘게 살다보니 뭔가 특정한 방송을 기다렸다가 본다는 것이 낯선 느낌이었다. 암튼 그렇게 둘이 앉아서 은퇴한 유명 프로야구 선수들이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에게 콜드게임으로 지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기상특보가 시작되는 걸 보았다. 아마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방송에는 한강 이남 몇몇 지역이 침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곧바로 2011년이었던가 그해 여름 폭우로 강남역 일대가 물에 잠겼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나는 업무 때문에 강남역 쪽으로 갔다가 무릎까지 물에 잠기는 경험을 했었다. 이번에도 역시 강남역 일대가 물에 잠겼다. 사진으로 본 모습에는 도로의 차들이 모두 완전히 물에 잠겼고, 버스도 3분의 2 이상 높이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래 이런 모습을 이제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보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기후위기 시대의 보편적인 풍경이라고 불러야 할까?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오고 있다. 그리고 낮에 한동안 또 폭우가 쏟아졌다. 어제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폭우는 폭우였다. 8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라고 했다. 수도권에서 여러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했다. 도로가 물에 잠기고, 지하철 역도 잠기고, 아파트 축대가 무너지고, 수많은 건물과 집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대통령이란 사람은 자기 집 근처에 침수 지역이 있어서 집무실로 가지 않고 집에서 전화로 보고 받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참,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소식이다. 정말 뭐라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이다.
암튼 낮에 한참 폭우가 쏟아질 무렵 마침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보고 있었기에, 멍하니 계산대에 기대 서서 유리 너머 인도와 차도에 비가 퍼붓는 모습을 지켜보고,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폭우를 보고 있으려니, 과거에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1
아마 1987년이나 1986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법원과 검찰청 건물이 들어서서 사라져버린 야산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산이 없었다. 처음엔 책가방을 머리 위에 얹고 뛰었으나, 집까지 그 먼 거리를 뛰어갈 수는 없었기에 조금 뛰다가 말고 그냥 지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머리에 얹고 있던 책가방도 그냥 다시 등에 메었다. 학교 건물 밖으로 박차고 나와 몇 걸음 뛰지도 않아서 이미 온 몸은 다 젖어 있었다. 마치 물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아직 길이 뚫리지도 않은 야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비 때문에 자꾸 발이 미끄러지거나, 돌 무더기가 무너지며 비틀 넘어지다가 손을 짚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조금 큰 나무 아래로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며 머리를 털고 무거운 옷을 짜기도 했는데 번쩍 하고 번개가 치는 걸 느꼈다. 번개가 칠 때는 큰 나무 아래에 있으면 안 된다고 배웠던 걸 떠올린 나는 급하게 뛰쳐나갔다. 뒤이어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퍼붓는 빗소리만으로도 귀가 멀 지경이었는데, 천둥 소리가 계속 울렸다. 번개가 계속 연달아 번쩍여서 빨리 나무들이 많은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빠르게 뛰었다. 옷은 몽땅 젖어 무거웠고, 이미 야산을 오르느라 지쳐서 마음만큼 빨리 발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자꾸만 발은 미끄러졌고, 자꾸만 넘어지려다가 간신히 버티곤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저 야산에서 폭우를 헤치고 뛰어서 돌아온 기억만 있다. 번개가 무서워 마구 뛰었던 기억.
#2
2000년쯤이었다. 늦여름이거나 초가을이었고 조금 더웠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가 아침 일찍 내 자취방으로 찾아왔었다. 그는 오자마자 김치찌개를 끓였고, 그가 가져온 반찬을 펼쳐놓고 우리는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오전 시간을 방에서 뒹굴거리다가 우리는 시원한 커피숍으로 갔다. 각자 음료 하나씩 주문해놓고 몇 시간을 버텼는지 모르겠다. 아마 꽤 오래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멍하니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갑자기 여자친구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나는 그를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따라 나섰고, 그의 동네에서 버스에 내리자마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폭우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소나기는 점점 더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곧 폭우로 변했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던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순식간에 온 몸이 다 젖었고, 뛰다 말고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랬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웃기 시작했고, 손을 잡고 걸으며 계속 웃었다. 그 폭우를 맞으며.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었고, 우리는 놀이터로 들어가 미끄럼틀 아래에서 간신히 비를 피했다. 서로 비에 쪽딱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젖은 옷을 추스리며 한참을 기다리는데,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집이 그러 멀지 않았기에 그냥 뛰어가도 되었지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냥 그대로 손을 잡고 미끄럼틀 아래 쪼그리고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점점 다 다가갔다. 어린이는 아무도 없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길게 키스를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유독 저 아이와 만나던 시절에는 둘이 비를 많이 맞았었다. 그날 그 아이는 부모님 몰래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다행히 안방이 제일 안쪽에 있었고, 현관문 바로 옆이 그 아이의 방이었다. 그는 젖은 내 셔츠를 벗기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준 다음 남동생 티셔츠 하나를 찾아와서 내밀었다. 바지도 하나 갖다 주려고 했지만, 그건 내가 말렸다. 남의 바지를 입고 싶지는 않았다. 비가 그칠 동안 나를 자기 방에 숨겨둔 후 자신은 엄마가 시킨 집안 일을 했다.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그 아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비가 그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아이와 비를 맞았던 여러 기억 중에 특히 이 날이 기억나는 건, 놀이터에서의 키스와 몰래 숨 어 들어간 그 아이의 방, 그리고 젖은 셔츠를 벗기고 내 몸을 닦아 준 그 아이의 손길 때문일 것이다.
#3
군대에 있을 때에 비를 맞은 기억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군대에는 우산이 없다. 판초우의만 지급된다. 입기도 힘들고 벗기도 불편한 그 우의가 있으면 그래도 비에 덜 젖을 수 있다. 군대 생활을 3등분 한다면 3분의 1은 경계 근무였고, 다른 3분의 1은 참호 공사를 비롯한 각종 작업이었으며, 나머지 3분의 1이 훈련이었다. 그 날은 무슨 훈련인지는 모르지만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복귀하는 행군 날이었다. 화기분대 탄약수였던 나는 무거운 탄통을 들었다. 우의에서 떨어진 물이 팔을 타고 내려와 탄통의 금속 손잡이를 쥔 손바닥에 고이는 그 감촉이 지금도 기억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가로질러 맨 소총이 가슴 앞에서 덜렁거리고 방탄모에 맺힌 빗물이 안경에 떨어져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군장을 한번 치켜 올리고 오른손에 쥔 탄통을 왼손으로 옮겨 들고 맨 손으로 안경의 물기를 쓱 닦고 다시 걷는다. 그 잠깐 걸음이 늦어졌다고 뒤에 선 사수가 욕을 내 뱉는다. 자신의 기관총은 분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어깨에 메고 걷고, 자신은 총을 들지 않은 맨 몸으로 걸으면서 탄통을 든 내가 조금이라도 걸음이 느려지면 바로 걷어차거나 욕설을 날리곤 했다. 빗줄기는 점점 강해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사이에 마침내 밥차가 도착했다. 우리는 왕복 2차선의 국도변에 양쪽으로 갈라져서 바닥에 주저 않아 배식 차례를 기다렸다.
식판에 밥을 퍼서 놓자마자 빗물에 밥을 말은 모습이 되었다. 국도 빗물이 섞여 저절로 간조절을 해주었다. 김치는 빗물에 씻겨 덜 매운 모습으로 변했다. 도로변에 주저 앉아 퍼붓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먹는 밥은 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 밥을 먹지 않으면 다시 반 나절 이상을 걸을 수 없었기에 빗물에 말은 밥을 꾸역꾸역 입 속으로 우겨 넣어야 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밥 중 하나를 그 폭우 속에서 먹었다.
#4
마지막 기억은 사실 폭우 까지는 아니었고 그냥 비가 오락가락 했던 날이지만, 용역 깡패들이 쏘아대는 물대포 때문에 폭우랑 이미지가 겹쳐 떠올랐다. 2003년 여름이었고, 새만큼 물막이 공사를 급하게 서둘러서 원래 예정보다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환경운동가 80여 명이 기습적으로 새벽에 방조제 공사 구역에 들어가 삽과 곡괭이로 물막이가 끝난 둑을 까서 다시 해수유통을 시킨 날이었다. 밤까지 시골 동네 곳곳에 흩어져 숨어있던 전국에서 모여든 활동가들은 자정 무렵 부안성당에 집결해 중요한 소지품들(전화기 같은)을 모두 잘 보관해두고 젖어도 부담이 없는 최소한의 옷차림에 우비를 입고 각자 비상식량으로 쵸코바를 두 개씩 지급 받았다. 마치 군사작전을 펼치듯 몰래 이동하여 사전에 협조를 얻은 작은 배 두 척에 나눠타고 방조제로 이동했다. 비가 오락가락 했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세게 불어와 여름 밤이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방조제에 도착해서 삽질과 곡괭이질을 할 때는 오히려 열이 나서 좋았다. 가만히 있으면 추우니 더 열심히 곡괭이를 휘둘렀던 것 같다. 군대에서 열심히 진지 공사를 했던 덕분에 나는 삽질과 곡괭이질에 아주 자신이 있었다. 제대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한참 힘이 좋은 시절이었으니, 지친 형들을 비키시라고 하고 아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몇 시간이나 삽질을 했을까 해가 뜰 무렵 마침내 방조제 한 쪽을 터서 해수유통을 다시 시킨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다만 해가 뜨고 시공사 측에서 우리의 존재를 발견한 후로 전경들과 용역 깡패들이 몰려온 후로 악몽이 시작되었다. 용역들은 배를 두 척 정도 몰고 왔는데 그 중 한 척에서 물대포를 우리한테 쏘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우리를 한쪽으로 몰아넣어 피할 곳이 없게 만들었고, 그 사이 시공사에서 포크레인을 몰고 왔다. 우리가 용역들의 물대포와 주먹질과 발길질에 당하고 있는 사이 포크레인은 우리가 터 놓은 물길을 다시 막았다. 우리가 삽과 곡괭이로 몇 시간에 걸쳐 겨우 터 놓은 물길이었는데, 포크레인은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아 다시 막아버렸다. 그리고 긴 시간 폭력에 노출된 상태로 버티기에 들어갔다. 여성 활동가들을 안쪽에 모아놓고 그 바깥으로 둥글게 둥글게 남성 활동가들이 스크럼을 짜고 깡패들의 폭력에 맞섰다. 전경들은 깡패들의 폭력은 두고 보면서 우리가 물길 쪽으로 다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기만 했다. 주먹질과 발길질 그리고 바닷물을 퍼올려서 쏘는 세찬 물줄기의 물대포 때문에 긴 시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맞고 버텼다. 우리가 이렇게 버티면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공약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었다. 비로 우리가 이렇게 두들겨 맞아도 생명의 갯벌을 지킬 수 있다면 며칠이고 이 바다 한 가운데 좁은 방조제 위에 버티고 있을 거라고 다짐했다. 여성 활동가 두 명이 실신해서 해경의 배를 타고 실려 나갔다. 우리는 전날 저녁을 먹은 후로 쵸코바 겨우 2개로 버티고 있었다. 밤새 휘두른 삽질과 곡괭이질로 지치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해가 뜨자마자부터 긴 시간을 두들겨 맞고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군산환경연합에서 우리가 먹을 빵과 물을 배에 실고 왔는데, 용역깡패들이 이걸 뺏어서 모두 바다에 버려버렸다. 우리는 그날 저녁까지 버티다가 결국 부안성당으로 철수했다. 그날 그 방조제에서 철수하면 절대 안 된다고 부르짖었었다. 새만금 공사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공약을 대통령이 이행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버티려고 했다. 그런데 누가 내린 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결정했다고 통보 받았다.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은 패잔병처럼 쓸쓸히 긴 거리를 걸어서 부안성당으로 향했다.
거의 24시간을 굶은 상태로 온 몸이 젖고 지친 상태로 간신히 도착한 부안성당에는 김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친 것처럼 김밥 두 줄을 양 손에 쥐고 먹기 시작했다. 물도 없이 김밥을 몇 줄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일단 10줄을 넘길 때까지는 세기는 했었다. 그 뒤로는 세기도 귀찮아서 그냥 막 집어먹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밥 중 또 하나는 이렇게 폭우는 아니지만, 비와 물대포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또 비가 거세게 쏟아붓는다. 아직 어제만큼의 폭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폭우라고 부를만한 모양새다. 오늘은 집에 가고 싶은데, 폭포나 급류가 되어버렸을 그 비탈길을 오를 걱정을 하니 퇴근하기가 싫어진다.
글을 쓰고 싶어졌다.
지난 번에 우리 일터에서 제로 웨이스트 매장을 새로 열었기 때문에 가끔 매장 지킴이를 하게 되었다는 얘길 하면서 우리 매장에 소설가 최정화 님이 방문했었다고 전했었다. 이 책 앞쪽에 우리 매장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나온 것처럼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작가는 삶의 태도를 바꾸면서 글도 자판을 두드리지 않고, 플라스틱 볼펜을 사용하지 않고 연필이나 만년필을 이용해 종이에 글씨를 써서 글을 쓴다고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도 문득 글씨를 쓰고 싶어졌다. 워낙 악필이라 글씨를 쓰는 걸 조금은 두려워하는 편인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의외였다.
내가 왜 이렇게 악필일까? 왜 나는 글씨를 쓰려고 볼펜을 쥐면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드는 걸까? 나는 왜 글씨를 쓰는 걸 두려워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긴 시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최근에 어쩌면 그 답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눈이 나빴다. 그런데 부모님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안경을 맞춰주지 않았다. 심지어 친척 중에 안경원을 운영하는 분이 세 분이나 계셨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친척 중에 한 분이 너무 어려서부터 안경을 끼면 좋지 않다고 해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린 거였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 때문에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시력으로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그랬지만 국민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칠판에 수업 내용의 대부분을 적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당연히 그 내용을 모두 공책에 필기해야 했다. 그런데 교실의 중앙에 위치한 2분단과 3분단과 달리 창가와 복도 쪽에 위치한 1분단과 4분단에서는 칠판에 적힌 글씨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력이 엄청 나빴기 때문인데, 중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안경을 써보기 전까지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처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보다 훨씬 빨리 필기를 잘 하는 다른 학생들은 뭔가 다른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1분단과 4분단에 앉았을 때의 나는 잘 보이지 않으니 필기를 잘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필기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학생들이 필기를 모두 마쳐야 칠판을 싹 지우고 다음 내용을 적을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적으라고 재촉을 하기 마련이다.
6년의 국민학교 생활 중에 유독 내 필기가 느리다고 나를 엄청 구박했던 선생이 한 명 있었다. 젊은 여성이었는데, 좀 매서운 인상이었다. 엄마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여선생이 자꾸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곤 했다는 거다. 조금만 것들도 트집을 잡아서 문제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엔 아마도 다른 엄마들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 중 한 엄마가 슬쩍 (그러나 다른 엄마들 눈에 다 보이게) 봉투 하나를 그 선생 수첩 아래에 집어 넣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선생이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그 아이는 자기가 잘 돌보겠다고 걱정 마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도 잠시 고민을 했다고 했다. 돈 몇 푼 찔러 넣어주면 잘 봐줄텐데, 그냥 무시하면 또 얼마나 애를 구박할 것인가 이러면서. 비록 가난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 몇 푼을 준비 못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점점 더 나빠져서 정말 심각하게 가난한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암튼 내 기억 속에 유독 나를 구박했던 그 선생은 세월이 한참 흘러서 엄마가 말씀하신 그 선생과 같은 사람이다. 사실 국민학교 6년 동안 나를 구박했던 유일한 선생이 그 사람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내 장점을 칭찬하고, 내 태도를 인정해줬는데 그 선생 한테서만 그런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 선생이 내 느린 필기 속도를 계속 지적하고 구박했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글씨를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글시를 쓰려고 펜을 쥐면 나도 모르게 조급해지는 이 마음은 어렸을 때 그 지속적인 구박과 꾸지람 때문이 아닐까? 이건 어쩌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내 머리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어떤가?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는가?
암튼 그래서 이 책의 저 구절을 읽고 우리 매장에 있는 재질이 나무로 된 볼펜을 구매해서 공책에 글씨를 써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글씨지만 나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악필로. 천천히 알아보기 쉽게 글씨를 써보려고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손은 저절로 글씨를 날리며 빨리 움직였다. 이건 마치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고, 혼자 제 멋대로 글씨를 날려서 적어갔다. 이게 참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확실히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삶을 살고 있구나 싶었다. 문서 작업도 모두 자판을 두드려서 하고, 가끔 쓰는 이런 잡다한 글도 모두 자판을 두드리니 밀이다. 한때는 나도 일기라는 것을 직접 적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조차 휴대폰 앱에서 자판을 두드리거나 이런 온라인 공간에 두드려 놓으니 점점 글씨를 보기 좋게 적을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는 구나 싶다.
쉬운 일이 아니라도 포기하지는 않겠다. 앞으로 매일 단 10분이라도 공책에 직접 글씨를 써서 글을 쓰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매일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내 글씨를 알아보는 일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알아볼 수 없는 날려쓰는 글씨가 조금은 반듯하게 바뀌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조금은 가져보며 이 글을 마친다. 쏟아붓던 폭우가 다시 조금 잠잠해졌다. 이 틈에 빨리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