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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 - 조르주 상드에서 애거서 크리스티까지
로사 몬떼로 지음, 정창 옮김 / 작가정신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시대를 앞서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이라는 제목은 너무나 웅장하고도 처연한 제목이다. 그래서 출간 당시부터 너무나 읽고 싶은 책의 목록 중 하나였음에도, 이 장엄한 제목이 주는 약간은 허황되고 거창한 냄새 때문에 읽기를 한사코 미루었다. 그러나 미리 밝히지만 이 책은 거창하지도 허황되지도 않으며, '오늘날 같으면 잘 나갈 수 있었던 천재적인 여자들이 시대를 잘못 만나 망가졌다는 류'의 책은 분명히 아니다.
필자는 자신이 15명의 여성을 선정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 순위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인물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는 여성들을 꼽았다고 밝히는 데, 이 점에서 진솔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미국의 작가, 로라 라이딩을 세기의 악녀로 표현한 부분에서, 제시한 일부의 자료를 근거로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평가가 같아서, 자뭇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서론 부분의 '들어가는 글'은 일반 여성학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는 서양의 여성 들에 대해 통사론적인 시각으로 기술하는 데에 25페이지 상당을 할애하는데, 이 부분은 약간 지루한 느낌을 준다. 이상의 두가지 점만을 제외한다면 이 책은 너무나 주옥같다.
로라 라이딩과 딸을 죽인 어머니 아우로라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대체로 한없는 애정을 갖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맥락에 잘 근접해서, 꼼꼼한 자료들을 제시하며 삶의 궤적을 비교적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필자가 다룬 모든 여성들이 시대에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처철하게 화려하게 소박하게 때로는 지나친 광기로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읽는 독자에 따라서는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는가보다. 특히 독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기인해 어느 특정 인물을 더욱 호소력 있게 느끼는 것일 거다. 나는 다음 세 이야기가 가장 와 닿았다.
남편과 취미 생활을 함께 하기 위해 애써 골프를 배우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도 했던 에거서 크리스티는 어느날 바람기 있던 남편에게서 이혼 요구를 받게 된다. 그후 스스로 열흘간 자신의 실종 사건을 꾸미고, 남편과의 삶을 예전엔 없었던 것인 양 말끔히 잊고 또다른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죽는 그날까지 강박적으로 자신의 외면과 내면을 꾸미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녀의 삶이 그녀가 펴낸, 수학적으로 완벽한 추리물들과 별반 어긋나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병원 24시>를 연상시키는 프리다 칼로를 투병기. 그녀는 여섯 살 때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았고, 열여덟살 때는 끔찍한 교통 사고를 당했었다. 그후 무시무시한 후유증으로 삼십년간 수많은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스무살에 만나서 마흔 일곱의 죽는 날까지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의 끊임없는 부정을 목도해야 했고(심지어는 아내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도), 당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에도 맞서 싸웠다.
마지막으로 브론테 가의 여자들. 세 자매는 모두 짧은 기간 기숙학교를 다니다가, 학교의 열악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중도하차하고 아버지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짧은 생애 동안 좁은 집과 황량한 들판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을 했고, 책을 읽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 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전기를 읽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살았던 이 여성들의 인생의 여로를 들여다보며, 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의 남은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살기에 시대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나다운 생을 자유롭게 구가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필자가 후기에 쓴 한마디를 떠올린다. '정상적'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제도와 관습에 스스로를 묶어두지 말라는 그 한마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