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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
박서원 / 동아일보사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재작년 어느 날인가 나는 갑작스럽게 고향집으로 내려갈 일이 있었다. 주말이었고, 표를 미리 예약해 두지 않으면, 당일 좌석을 얻기 위해 대합실에서 두 세 시간의 기다림은 감수해야 했다. 기차의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과 기차 안에서의 세 시간, 도합 여섯 시간 남짓의 시간을 때우기 위해 서울역내의 서점에서 책 두 권을 샀다. 백지연의 <앵커는 닻을 내리지 않는다>라는 책과, 바로 이 책 박서원의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이 두 권의 책을 선택한 일에 대해,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질이냐 하는 생각을 한다. 왜? 두 책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 백지연의 이야기는 너무 너무나 잘 나가고 있다는 행복의 비명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한창 주가를 날리던 뉴스 앵커 시절이었음에도, '공부가 하고 싶은데~'하고 잠시 딴 생각을 하니, 영국의 옥스퍼드가 나를 부르네. 한마디로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서원은? 그녀는 <난간 위의 고양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녀의 서른 아홉 에세이이다.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출생하였고, 기면증(시도때도 없이 경련을 일으키다가 기절하듯 잠이 드는 전신 마비를 불러오는 병이다.)이라는 신경증을 어릴 적부터 앓고 있었고, 아무것도 뒷받침되어 주지 않는 가정 상황에서 그녀의 시심과 문학적 재능을 피어나고 있었다.
스무살까지 살 수 있을까 싶은 그녀가 스무살을 훌쩍 넘겼을 즈음, 시인이었던 어느 유부남 교수와의 불륜이라고 밖에 불릴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그 교수와 헤어진 후, 어느 119구급대원의 그녀를 향한 일방적이고도 안타까운 짝사랑을 받아들여 그녀는 결혼을 한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1년 9개월 후 이혼을 한다. 그녀는 몹시 병약했으므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으나, 시부모님은 너무나 완강하게 손주를 바라고 있었다. 너무나 불행한 결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현재 어린 조카를 자식처럼 키우며 살고 있다. 조카가 있어서,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기면증이 나아서, 그녀는 행복하다고 한다. 책 표지에 실린 박서원은 너무나 고고하게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시를 쓰는 그녀에게 상업적인 성공을 담보로 하며 뻗어오는 유혹의 손길도 많았으리라 보여질 만큼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쉬워 보이는 그런 길들을 한사코 마다했으리라. 그리고는 이렇게 처절한 인생 위에서 당당하게 일어섰으리라.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백지연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인생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