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나를 부르는 숲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일전 “빛의 속도로 일을 하시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

요즘 내가 붕붕거리는 벌처럼 일하게 된 데에 화근이 되는 말이다. 

당시 그렇게 무섭게 속도를 내서 해야만 했던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하루 휴가 쓰려고), 그 말에 순진하게(?)도 탄력 받고는 그 이후로도 일의 의뢰한 사람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팽이를 돌렸다. 오늘 문득 바보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계절이 계절이라 굳이 내장산이 아니고, 지방 국도로 차를 몰고만 나가도, 산의 때깔이 정말 다르다. 산 중에 으뜸은 가을산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향 냄새가 나고, 빠삭빠삭하며 톡 쏘는 가을 대기. 푸른 하늘, 햇빛에 선명하게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올려다보며, 숲길을 걷는 게 요즘의 로망인데. - 이걸 실천하는 데 발목 잡는 것들이 마치 수학 공식처럼 꾸역꾸역 발생한다. 

나를 부르는 숲.

참 근사한 제목이다. 약간은 멜로 분위기가 나면서, 수목원 같은 데서 광합성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떠오르게도 하는. 사실 그런 느낌 때문에 빌 브라이슨의 이 책과 나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고, 빌 브라이슨의 이 책이 두둥 존재감을 짙게 드러내었다. ‘나’를 읽지 않으면 후회할 걸.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을 전제하고, 일생에서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정면으로 죽음과 대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


나는 그냥 민둥민둥 심심한 산들을 좋아하지, 절경에다가 험악한 악산을 등반하는 것은 좋아하지도 즐기지도 않는다. 험악한 악산이라, 기억나는 등반은 지당하게도 13년 전 2박 3일 코스로 지리산 등반이다. 같이 갔던 선배들이 사고 위험이 많은 험한 등반이 될 거라고 엄포를 놔서,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매순간을 긴장하며, 발을 디뎠던 기억이 난다. 엄청난 양의 땀을 쏟고, 갈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마어마한 물을 마셔대고, 배낭은 무겁고, 힘들게 정상에 올라서서 고목에 걸린 운무를 내려다보며 철푸덕 앉아서 담배 한 가치를 피우는 사람들이 무지 부러웠던 기억도. 잠은 텐트를 치고, 별빛 아래서 잤다. 한여름이었지만, 겨울 파커를 껴입고,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이랑곳하지 않고, 눈감기가 무섭게 잠이 들곤 했다. 

노고단에서 시작해 돼지평전, 토끼봉, 새석평전을 거쳐 뱀사골(당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난 후라 많이 유명해져서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천왕봉으로 해서 마지막 날 산을 내려오다가 진주 어디메쯤, 일듯 사람이 사는 작은 마을을 처음 봤을 때, 그 반가움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살아 돌아와 만나는 것과 맞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크고 작은 등산 혹은 등반 경험 이후로, 완주! 정상 정복! 이런 데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악산을 정복하는 희열 같은 거 굳이 내가 체험해야만 맛인가, 이런 식(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는 등의, 하긴 이 아저씨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애팔래치아 종주에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의 대리 만족으로도 감지덕지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책은 지적이고, 우스꽝스럽고, 간결하며, 구비구비마다 기막힌 반전까지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양장피 겨자 소스와 같은 역은 브라이슨의 등반 동반자 ‘카츠’다.

이이가 산에서 펼치는 대책없는 어떻게 보면 엉뚱한 돌아이 같은 짓. 하하....! 처음엔 브라이슨의 동반자로서는 맞지 않는 우려하는 마음까지 들었으나, 점점 브라이슨에게 뿐만 아니라, 카츠에게까지 감정 이입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등반의 마지막(중도 하차)이 될 것임을 예고하던 날 브라이슨과 카츠의 대화다.

“하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거든. 어쩔 수가 없어. 내 말은, 브라이슨, 나는 그걸 사랑해. 그 맛을 사랑하고 2병을 마셨을 때 취하는 기분을 사랑하고, 냄새와 선술집의 분위기를 사랑해. 나는 음담패설과 주변 당구대에서 공이 부딪치는 소리. 밤에 술집의 어둠 침침하면서 푸른빛 도는 분위기를 그리워했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의 전부는 TV 디너뿐이야. 마치 만화속의 한 장면처럼 끊임없이 늘어선 그게 춤추며 나한테 다가와. TV 디너 먹어 본 적 있어? 정말 쓰레기야. 그리고 정말 삼키기 힘들어. 그걸 보면 때때로 내가 바보 멍청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줄 아니? 지금은, TV 디너를 먹을 수 있다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기분이야. 정말 살인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트레일을 포기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시도를 했다!!!!! 어쨌든 많은 경험을 축적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자랑스럽게도 몸이 날렵하고 튼튼해졌다. 삼림과 자연, 그리고 숲의 온화한 힘에 대해 깊은 존경을 느꼈다. 그게 중요하다.


인생이 그러하듯 트레일 또한, 지겹지만 여전히 이상하게도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지루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았지만 불가항력적이 되버리는, 끝없이 펼쳐진 숲에 신물이 났지만 그들의 광대무변함에 매혹되고 마는, 그만두고 싶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싶기도 한 것.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고, 텐트에서 자고 싶기도 한 것, 봉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으면서도 다시는 봉우리를 안 봤으면 싶은 것인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7-11-0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막걸리 먹는 것이 제일 좋아요. 정상에 오르거나 하는 것은 무지 싫어합니다.ㅎㅎ

icaru 2007-11-07 17:23   좋아요 0 | URL
기왕이면, 도토리묵 무침도 껴 주세요 ^^
정상에 오르고 나면, 뿌듯 뭐 이런 맛도 무시못하겠지만, 죽자사자는 글쎄, 산악인이 아니라선지요.흣

2007-11-07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7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론은 기싸움이다 - 탁석산의 글쓰기 5 탁석산의 글쓰기 5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꿔다논 보리자루가 청산유수가 되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절박한 사람에게 적어도 말하기의 두려움을 줄이는 데는 약간의 효험이 있다. 게다가, 도사님 풍의 멘토와 조금은 까칠한 제자가 우스개스러운 대화를 나눠가며, 토론에 대한 썰을 차근차근 풀고 있기 때문에 읽는 재미도 있고.

현대를 소피스트의 시대라고 한다고. 소피스트는 원래, 이 세상에 절대적이고도 객관적인 진리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개개인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고, 진리도 시대마다 변한다.

토론이나 대화를 통해서 참된 무엇가를 말하기 보다는 나쁜 의견을 좋은 의견으로 대체해 나가는 정도를 구현할 수 있다면 만족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장 좋지 않은 발표는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하는 발표라는 것이었다. 인상적이라는 말은 보통은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나쁜 의미로 인상적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마케팅 팀에서 경쟁 회사의 개발자 팀워크나 작업 환경의 전반적인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 발표를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런 발표를 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구먼. 발표자는 개발자들의 업무 환경을 너무 모르는구나!’

하면서 흥분했던 적이 있는데 이 경우 또한 나쁜 인상을 남겼다기 보다는 청중을 자극시켰다는 쪽으로 이해해야 하면 되려나. 정말 인상적이긴 했다. 발표자는 남 눈치 볼것없이 - 그게 회장님이라도- 소신껏 자신이 하고픈 말을 모두 하고 있었다.

사실, 발표나 토론 전에는 소신을 말하리라 다짐을 하고 들어가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면 청중의 태도라던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수도 많이 있으니까. 그에 굴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거기다가 비유나 사례 중심으로 말한다면, 말짱!으로 추대할 수 있겠다.

말짱은 회의나 토론의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이며, 참된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사회라는 공동체의 유익을 증대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회의 : 보통 권력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토론 : 회의에 비해 대등한 관계의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

발표 : 1인 발표, 집단 발표, 공식적 발표, 비공식적 발표, 연설 등을 포함한다.

면접 : 권력 관계가 개입되어 있으며 자신을 증명해야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월의 책입니다-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리스 레싱 하면, 뭐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심사가 떠올려진다.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없으면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류의 작품도 아닌데.

그녀는 메시지가 명쾌한 감동의 화제작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 편에 손을 들어주는 건지, 저 편을 옹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문제작을 쓰는 것이다.

사실, 한 해 마다 한 권씩 이상한 계기로(나는 어디서 선정해서 읽으라고 간접 권유를 하는 것 일테면, *** 수상작 하는 것 -은 읽을 마음이 용케 생기지 않으니,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상하든 정상이든 어찌어찌하다가 사로잡히게 된 것을 읽는 쪽이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2004년에 벽호(지학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선집 중 하나인 <풀잎은 노래한다>를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해 읽었다. 2005년에는 책 표지 그림이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런던 스케치>를, 그리고 임신중이었기에,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던 <다섯째아이>를 미루고 미루다가 최근에 읽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여기서는 아이들의 엄마인 해리엇) 남들도 범상하게 누리고는 하는 일상적인 행복을 꿈꾸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또한 이상한 것이 다른 소설들처럼, 저건 바로 우리들의 삶이구나! 하면서 애착과 함께 동변상련의 그 무엇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해리엇의 문제가 뭔데, 작가가 자꾸 화살을 쏘아대는 거지? 저 화살은 사랑의 화살이겠지만, 당신이 그 화살을 맞아야 할 이유는 좀체 알 수 없다! 하면서 의아해진다. 그게 왜일까. 하고 생각해 보니, 작가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사랑받는 주인공은 티가 나게 마련인데,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은 그저 인물군상이며, 불완전함을 갖고 있으며,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조금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게 된 달까. 마치 다른 사람이 나을 볼 때 하듯이 자신을 보는 느낌이랄까.

전통적인 가치에 순응하는 젊은이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나 결혼에 이르렀고, 한 명, 두 명 아이들을 낳아가며 그야말로 그럼처럼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넷째 아이까지 낳고 시간적 간격을 두려던 해리엇에게는 어느새 다섯째 아이가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부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오게 생겼다.

다섯째 아이는 백일도 되지 않아서 제 힘으로 침대를 잡고 일어서는가 하면, 귀여운 동생을 만져보기 위해 아기침대 창살 사이로 손을 넣은 넷째, 폴의 손목을 창살에 대고 꺾어버린다. 애완 동물들이 소리 없이 죽어 나가고, 다섯째 아이 벤은 자기 방에서 밤새도록 어두운 창문을 차가운 증오에 가득찬 눈빛으로 응시한다. 다섯째 아이라는 존재가 드리워진 이 가정은 점점 어둡고 음울해져 간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좀 엉뚱하긴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전통적인 역할 차이를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는 이 파괴적이고 무시무시한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요양소 혹은 감호소(그 곳에 가면 아이는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되어 있다.)로 보낸다. 어머니는 남은 네 아이보다는 비정상적인 한 아이에게 온 마음을 쓰지만, 아버지는 비정상적인 한 아이를 포기하더라도 남은 정상적인 아이를 지키고 싶어한다. 남편은 감호소에서 아이를 다시 데려온 아내에게 마음속으로 맹렬히 비난한다. (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 )  사실, 그가 아녀도, 이 모든 악의 씨앗의 탄생 자체에 대한 비난이 다섯째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로 돌아간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 아이들이 조금 자랐을 때, 벤과 폴을 제외한 그들은 자의에 의해 외가, 친가, 기숙학교 등지로 뿔뿔히 집을 떠나게 되고, 덜렁 남은 두 부부의 관계는 예전의 그것이 아니고, 특히 남편은 화도 낼 의사를 상실할 만큼 지쳐 있었다. 해리엇도 자신의 삶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한결 폭삭 늙어빠진 느낌이었고,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한없이 가정적이던 남편은 회사 일에만 전념하였고,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남편에게는 이제 회사가 일의 중심이 되었고, 가족에게는 점점 소원했다.  남편에게는 돌아갈 회사가 있었지만, 해리엇에게는 뭐가 있나?


“우리는 벌받은 거야. 그 뿐이야.” 그녀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방어적으로 남편이 말한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그녀가 말했다.

"헛소리!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벤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야,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1-06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6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7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유니텔로 접속해서 피씨통신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그러니까, 연도가 98년이나 99년쯤되려나.
주인공 롱맨 민수가 "벽속의 요정"을 처음 만났던 퀴즈방(그러니까, 2007년도에도 여전히 채팅방 같은 데는 이런 방이 있다는건데,, 그랬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퀴(즈)방 이런 데 들어가서, 퀴즈방 밖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조금은 자아 도취적인 성향들을 충족시키곤 하던 시기가 음, 생각난다. 잊고 있었던 시절의 기억을 요런 데서 건드려 준다.

 연설을 할 때는 감동을 주든가 아니면 지식을 줘라. 그것도 안되면 즐겁게라도 해줘라. ..라고 그리스의 수사학자들이 말했다지.(이 책에서 나옴)
나 또한 감동은 아닌 거 같고, 지식도 약간은 회의적이고 그래, 적어도 즐거움은 주었다. 김영하는 재밌는 소설을 쓸 줄 아는 작가다. 코드가 맞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생각해 보지만, 그건 아닌 것도 같고, 세태에 맞게 몸피를 바꿀 줄 아는 듯 보이는 작가가 참으로 영리(?)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거나 무거운 화두로 독자로 하여금 부담 혹은 불편함을 주지 않으니까. 선호하는 작가군에 든다.  
 
조선 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을 묶은 거라고 한다. 연재 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고충에 대해서 고려해보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앞에서 정한 상황들이 이미 신문지상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뒤에서 아귀가 맞게 딴소리 안 하고 풀어야 한다는 것. 분명 쉽지 않을거다. -암튼 그랬구나! 그래서, 종종 엉성한 결론(예를 들면, <어제의 책> 헌책방 주인이 민수가 판 책들을 사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민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전하는데, 결국엔 헌책방 주인이 사업구상을 바꾸게 되는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흘러감-난 또 이 사람이 새로운 사건을 불러오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을 보아야 했던 건가?

민수와 관련된 여자가 셋 등장한다. 첫째 민수의 과거 애인(레포트나 발표 준비 등에 민수의 노동력을 적당히 착취하나, 민수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은 외면하는(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상가에 오지 않음) 현실파 빛나.  둘째,  쉰고구마를 먹고 배탈이 났을 때 민수가 약을 사다줘서 안면을 트게 된 옆방녀(고시원에서 민수의 옆방에 기거). 스스로를 '촌년'이라 부르는 수줍음 많고 말이 없는 그녀는 자식이 많은 가난한 집에 막내딸인데 9급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서울에 와 있다. 새벽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낮에는 대형 마트에서 포장일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고단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산다. 셋째 벽속의 요정.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해 구구절절히 늘어놓는 건 스포일러일테니. 생략

처음 옆방녀가 등장했을 때, 작가가 이 여자 운명을 흉폭하게 그려 놓을 거 같아, 염려가 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려운 말들로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게 하는 소설 뒤에 붙은 복도훈의 해설을 보면, 그가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은 게 있다.
바로 옆방녀와 민수가 고시원 옥상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눈 장면인데. 아름답다기 보단, 가슴 아픈 쪽에 가까운 게 아닐까. 가끔 고기를 먹어줘야 한다면서 삼겹살을 같이 먹자던 옆방녀.
 
사회학도도 아닌 내가, 이런 소설이 꽤나 사회학적으로 읽히는 것은, 이렇게 옆방녀와 민수의 고시원에서의 삶,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평창동에 사는 독특한 서재를 가진 지원과의 데이트의 충돌이요, 편의점 점주나 고시원 주인 혹은 회사의 장군과 같은 기성 세대와 민수로 대표되는 세대와의 충돌, 이렇게 계층과 계층군의 대립이 퍽이나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

근데, 처절한 20대의 대표 주자인 주인공 민수가 내 눈에는 막막하고 고단한 일상의 약자인 옆방녀 부류라기 보담, 독특한 서재를 갖고 있는 민수와 정신적 코드가 딱 맞는 알고보니 부잣집 딸 지원과 더 가까운 부류로 보이니....!  그리고, 민수도 결국엔 돈푼 '깨나'만지고, 여자 '깨나' 울린 혹은 공무원이나 선생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는... 그런 기성 세대가 되지 않으려나.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1-04 0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4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5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11-0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층갈등소설, 재밌는 분류에요.
이카루님^^

icaru 2007-11-05 19: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근데요... 생각해보면, 계층갈등소설 아닌 소설 찾기도 또 힘들겠다는 ㅎㅎㅎ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뭘 주어먹어도, 아무데나 내놔도, 우리 아이는 건강하다. 라고 생각했던 거.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었을까? 주말에 아이와 친정에 내려갔다 온 게 아이에겐 강행군이었나보다. 다녀온 뒤로, 감기로 비실비실. 문제는 그 먹보가 도통 아무것도 먹으려 들지 않는다는 거.

어제밤도 나는 내내 설치다. 아이와 같이. 열이 심하고 계속 보챈다. 아침에 꼭 소아과에 데려가(게 해)야지! 밖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거.

서럽게 잦아드는 울음을 우는 아이를 등 뒤로 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문밖 저멀리까지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회사 도착했으나, 10분 지각.

오전은 동동거리며, 분주히 지났는데 오후가 되니, 피곤이 억만겁 몰려온다. 게다가, 아이도 걱정되고, 깡통 이유식을 사다 줄지언정 뭘 먹게 해 주고 싶은데, 해서 퇴근 시간 되면, 바로 집으로 향하고픈데. 남은 일은 누가? 집에 싸들고 가?

굉장히 불운하고,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퇴근 시간이 되었고, 오늘은 남편이 일찍 집에 들어가겠단다. 게다가 저녁이 되니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한다. 남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불운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7-10-31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낮엔 계속 피곤하고 잠 오고 그러더니 지금 이 시각이 되니까 정신이
나네요.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ㅎㅎ

프레이야 2007-10-3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아이가 아파서 어떡해요? 일하는 엄마는 힘들죠. 힘내세요^^

2007-10-31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umpty 2007-11-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운과 비참이 왜 일케 서럽게 들리지?
철이 철인지라 마이클 찬도 감기에 걸렸구만요. 에구...

icaru 2007-11-01 16:09   좋아요 0 | URL
몸이 피곤해서..더 죽겠더라고~ 어제 오후는 말이지.
마이클 찬... 오늘도 병원 갔덩..

반디 2007-11-0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뭉클한 글.
아픈 아이를 두고 나올 때 만큼 힘든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 쾌차하길 빌어요. 그리구요..바빠서 자주 못와요. 죄송^^;

icaru 2007-11-06 08:37   좋아요 0 | URL
자주 보믄 조컷어요@@@@

잉크유령 in china 2007-11-0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이 찡하네요. 이곳 중국까지 전해지네요. 힘내시길....이런 분위기에서는 복돌언냐의 출현이 약발이 먹히곤 했는데...

icaru 2007-11-06 08:37   좋아요 0 | URL
복돌언냐는 뭐하고 잘 사나 몰라요! 궁금 한 가득
잉과장님,,, 중국 출장 중이시군요~ 어쩐지 안 뵈시더라~ 건강히 잘 지내다 오시얍!
그럼, 과장님 짜이찌에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