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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유니텔로 접속해서 피씨통신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그러니까, 연도가 98년이나 99년쯤되려나.
주인공 롱맨 민수가 "벽속의 요정"을 처음 만났던 퀴즈방(그러니까, 2007년도에도 여전히 채팅방 같은 데는 이런 방이 있다는건데,, 그랬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퀴(즈)방 이런 데 들어가서, 퀴즈방 밖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조금은 자아 도취적인 성향들을 충족시키곤 하던 시기가 음, 생각난다. 잊고 있었던 시절의 기억을 요런 데서 건드려 준다.
연설을 할 때는 감동을 주든가 아니면 지식을 줘라. 그것도 안되면 즐겁게라도 해줘라. ..라고 그리스의 수사학자들이 말했다지.(이 책에서 나옴)
나 또한 감동은 아닌 거 같고, 지식도 약간은 회의적이고 그래, 적어도 즐거움은 주었다. 김영하는 재밌는 소설을 쓸 줄 아는 작가다. 코드가 맞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생각해 보지만, 그건 아닌 것도 같고, 세태에 맞게 몸피를 바꿀 줄 아는 듯 보이는 작가가 참으로 영리(?)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거나 무거운 화두로 독자로 하여금 부담 혹은 불편함을 주지 않으니까. 선호하는 작가군에 든다.
조선 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을 묶은 거라고 한다. 연재 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고충에 대해서 고려해보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앞에서 정한 상황들이 이미 신문지상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뒤에서 아귀가 맞게 딴소리 안 하고 풀어야 한다는 것. 분명 쉽지 않을거다. -암튼 그랬구나! 그래서, 종종 엉성한 결론(예를 들면, <어제의 책> 헌책방 주인이 민수가 판 책들을 사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민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전하는데, 결국엔 헌책방 주인이 사업구상을 바꾸게 되는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흘러감-난 또 이 사람이 새로운 사건을 불러오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을 보아야 했던 건가?
민수와 관련된 여자가 셋 등장한다. 첫째 민수의 과거 애인(레포트나 발표 준비 등에 민수의 노동력을 적당히 착취하나, 민수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은 외면하는(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상가에 오지 않음) 현실파 빛나. 둘째, 쉰고구마를 먹고 배탈이 났을 때 민수가 약을 사다줘서 안면을 트게 된 옆방녀(고시원에서 민수의 옆방에 기거). 스스로를 '촌년'이라 부르는 수줍음 많고 말이 없는 그녀는 자식이 많은 가난한 집에 막내딸인데 9급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서울에 와 있다. 새벽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낮에는 대형 마트에서 포장일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고단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산다. 셋째 벽속의 요정.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해 구구절절히 늘어놓는 건 스포일러일테니. 생략
처음 옆방녀가 등장했을 때, 작가가 이 여자 운명을 흉폭하게 그려 놓을 거 같아, 염려가 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려운 말들로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게 하는 소설 뒤에 붙은 복도훈의 해설을 보면, 그가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은 게 있다.
바로 옆방녀와 민수가 고시원 옥상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눈 장면인데. 아름답다기 보단, 가슴 아픈 쪽에 가까운 게 아닐까. 가끔 고기를 먹어줘야 한다면서 삼겹살을 같이 먹자던 옆방녀.
사회학도도 아닌 내가, 이런 소설이 꽤나 사회학적으로 읽히는 것은, 이렇게 옆방녀와 민수의 고시원에서의 삶,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평창동에 사는 독특한 서재를 가진 지원과의 데이트의 충돌이요, 편의점 점주나 고시원 주인 혹은 회사의 장군과 같은 기성 세대와 민수로 대표되는 세대와의 충돌, 이렇게 계층과 계층군의 대립이 퍽이나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
근데, 처절한 20대의 대표 주자인 주인공 민수가 내 눈에는 막막하고 고단한 일상의 약자인 옆방녀 부류라기 보담, 독특한 서재를 갖고 있는 민수와 정신적 코드가 딱 맞는 알고보니 부잣집 딸 지원과 더 가까운 부류로 보이니....! 그리고, 민수도 결국엔 돈푼 '깨나'만지고, 여자 '깨나' 울린 혹은 공무원이나 선생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는... 그런 기성 세대가 되지 않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