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 미술, 패션, 인테리어 취향에 대한 내밀한 탐구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21~22쪽

취향은 때로 심오하게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어떤 친구와 같이 놀고 싶지 않으면 “넌 왜 그렇게 옷을 못 입니?”라든가 “너의 독서 취향은 왜 그 모양이니?”라고 취향을 무시하는 몇 마디를 던지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차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딸기를 좋아한다고 치자.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줄지는 의심스럽지만, 누군가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이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하고 만다. 어떤 음식을 차별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한 개인의 엄숙한 선언과도 같고, 어떤 불가침의 영역처럼 존중되는 것이다.

 

56~57쪽

이번 뉴 뮤지엄의 전시가 신선했던 건 보여주고자 하는 톤 때문이다. 현재 예술계를 정의하는 트렌드와는 달리 이 저시는 어둡고 심각하다. 지난 아무리 쇼에서도 후마 바바의 작품을 보았지만, 번쩍거리는 아무리 쇼에서 그 작품은 팔리기 위해 존재했다. 이번 전시회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비로소 작가의 작품이 제대로 보였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미술관의 일이란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적당한 공간, 온도와 습도, 조명, 그리고 맥락. 어떤 전시를 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 속에 특정 작품들이 설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고, 각각의 작품들은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 기획된 전시라는 맥락을 갖는다. 어떤 전시냐에 따라, 관객들이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존재와 의미는 변한다. 그렇게 해서 변용을 거친 작품은 다시 작품을 보는 관객과 전시와 세상의 각도를 조금 틀어놓기도 하는 것이다. 




72쪽 

한 벌의 드레스에 대한 환상이 꼭 황당한 건 아니다. 엄청난 양의 쇼핑을 일삼던 여성이라도 결국은 고작 몇 벌, 대개 한 벌의 드레스로 기억된다. 코코 샤넬조차 수많은 옷을 만들었지만 정작 그녀를 떠올리면 진주 목걸이를 내려뜨린 검정색 드레스가 떠오르지 않는가. 실제로 19세기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의 ‘패션’ 전략은 한 벌의 드레스였다. 말 그대로 딱 한 벌만 입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스타일의 검정색 실크 드레스만 입었다. 이유는 패션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 시간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듯 치장하는 데 드는 정신적 에너지조차 아까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티에 초대를 받을 때는 꼭 내실을 요청했다. 현명한 사상가들과 친지들을 따로 불러, 쓸데없이 치장을 할 빌미 자체를 없애기 위한 거였다. 조르주 상드가 돈이나 취향이 없어 한 벌만 입은 게 아니라 일종의 전략으로 그렇게 했기에 내가 패션이란 말을 썼지만, 한 벌의 옷만 입는 건 엄격한 의미에서 패션이 아니다. 패션이란 것의 전제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갈망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78~81쪽 

그 여자의 옷 입기 - <토니 타키타니>(2004)

책장을 넘기는 속도로 진행되는 영화 <토니 타키타니>엔 하루키의 원작엔 없는 장면이 살짝 삽입되어 있다. 토니가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는데, 옆에서 쇼핑을 하던 젊은 여자가 오렌지 더미 옆을 지나자 갑자기 오렌지가 와르르 무너진다. 주인이 달려오자 그녀는 옆에 이떤 토니를 보며 붇는다. “내가 그런 거 아니죠? 맞죠?”

<토니 타키타니>의 인물들은 ‘오렌지가 무너지는 세상’과 직접적인 연루를 피해 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영화에선 폐쇄된 공간, 감옥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 각자 나름의 상자 안에 갇혀서 살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그렇겠지만, 이는 특히 일본인들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 데 적당해 보인다. 벤토 박스에 점심을 먹고 성냥갑처럼 작은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태어난지 며칠 만에 엄마를 잃은 토니는, 미국식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나중에 미술 대학에 진학하는데, 다른 학생들처럼 데모도 안 하고, 인간의 감정을 담은 예술에 대해선 ‘조악하고 미숙하고 부정확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복잡한 기계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던 토니가 “외로움은 감옥과도 같다.”라는 사실을 처음 느낀 건 사랑에 빠졌을 때다. 그런데 토니는 다른 것도 아니고 한 여자의 아름다운 옷 입기에 매료된다. 그는 여자가 “먼 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라고 자신의 인상을 고백한다.

토니가 옷 입기를 칭찬했을 때 여자는 옷은 자신의 빈곳을 채워주며 월급의 대부분을 옷 사는 데 써버린다고 고백한다. 토니가 여자와 결혼하고 자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행복감에 젖는 순간, 아내의 쇼핑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내가 다른 것엔 관심이 없고 쇼핑에만 몰두하는 것도 자폐적이지만 좀 다른 데가 있다. 토니는 아내가 쇼핑을 할 때면 “얼굴 표정이 변하고 목소리까지 변한다”는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녀가 샀던 옷을 되돌려주고 돌아오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은 “쇼핑을 그친 여자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토니의 아내에게 패션과 쇼핑은 그 자체로 실제하고 텅 빈 현실을 대체해줄 수 있는 하나의 ‘자족적’인 생존 방식이다. 직장이나 집에서의 일들이 존재의 유일함을 매순간 거스르는 하잘것없는 것이어도 쇼핑몰을 찾으면 애기가 달라진다. 브랜드 이미지가 가장 앞서가면서도 배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약속해주고, 크레디트카드의 구매력은 그 세상 속에서 그녀의 위치와 권력을 보장해 준다.  




96~97쪽

아침에 그라놀라에 얹어 먹거나 팬케이크에 곁들여 먹기에 딸기만큼 예쁘고 맛있는 것이 없다. 친지를 불러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디저트로 가장 만만하다. 딸기와 산딸기, 블루베리와 블랙베리를 화이트 와인과 설탕에 절여 하룻밤 재운 후 민트 잎사귀를 띄워 내면 그럴 듯한 디저트가 된다. 이도 저도 귀찮을 때는 딸기를 한 아름 사다가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아낸다. 여기서 포인트는 사람들이 작게 ‘와’ 할 정도로 많이 담아내는 것이다. 모두들 그저 한두 알 집어 먹어도 상관없다. 그 탱탱하고 빨간 딸기들이 놀랄 정도로 많이 담겨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디저트는 먹는 거나 다름없다. 꽃이 있는 식탁에선 밥을 조금 먹어도 배부르고 행복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




106~107쪽

사람들이 좀 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개인 차원의 미적 분별력이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17~18세기경 영국인들의 취향에 관한 발언들을 보면 재미있다. 영국의 한 철학자는 취향이란 영혼에 달린 액세서리 같은 것이라 했고, 한 작가는 취향이 생기는 순간 악덕과 무지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 했다. 그 시대는 취향이라는 말이 교양이나 사회적 매너까지 아울렀다고 할 수 있다.

취향이 갖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대개 소비의 문제로 귀착된다. 취향이란 결국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소비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숨길 수가 없다는 건 취향의 나쁜 점이자 좋은 점이다. 언제든지 돈으로 ‘좋은 취향’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취향이 근거가 없다면 어디서든 드러나게 된다. ‘고급 취향’을 통해 자니의 경제 능력이나 지위, 뛰어난 감각을 뽐내려 노력할 때 조차 그 상대에 따라 하릴없이 자신의 몰취향을 드러낼 수도 있으니 얼마나 낭패인가.

어린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의 ‘타고난’ 방향성을 자신과 남에게 알리는 차원에서 유의미하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단순히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버틸 수는 없다. 느끼고 배우지 않은 인간을 상상할 수 없듯이, 미적 경험과 교육으로 연마되지 않은 취향이란 취향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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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神신 엄마가 만든다 - 수학으로 서울대 간 공신 엄마가 전하는 수학 매니지먼트 노하우!
임미성 지음 / 동아일보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도서]  

 

이 책은 크게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내 맘대로 구분)

첫째, 수학 상위 3퍼센트, 수학의 신 만드는 엄마의 전반적인 노하우
둘째, 세 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학적 바탕을 완성해 주는 노하우
셋째, 초등학교 1, 2, 3학년 수학 실력 키우기의 실제
넷째, 수학 메니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섯째, 케이스별 맞춤 상담(Q&A)

올해로 네 살이 되는 29개월짜리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셋째, 넷째 파트는 아직 큰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내용이기는 하다.

그리고 둘째 파트 ‘세 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학적 바탕을 완성해 주는 노하우’ 부분에서 “ 은물(恩物)과 가베는 공간 지각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거의 모든 기하학적 개념의 출발은 그 교구들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가베 등 교구를 많이 가지고 논 아이들은 수나 언어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다. 지능 발달, 창의력 계발, 정서적 안정, 집중력 향상 등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실제로 교구를 많이 다뤄본 아이들은 크기, 거리, 위치 등의 이해가 빠르고, 고학년이 되어서도 도형 부분에서 어려워하지 않는다.”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사실 많이 부담스럽다. 요는 수학적 바탕을 완성해 주기 위해서는 물심양면의 부모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물적인 제공에 대한 부분이다. 모든 교구는 하나하나 다 유용하니,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는 다 사주라는 의미가 되겠다.

셋째, 넷째 파트는 집에 아이가 자람에 따라 좀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크게 공감했던 내용은 아이와 수학 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머릿속을 비우고 아이에 대한 선입견은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만해도 아직 어린 아들이 또래보다 퍼즐이나 블록 쌓기 놀이 등에 흥미를 전혀 보이지 않아, “혹시 쟤가 날 닮아 수학머리는 꽝 아니야!” 하고 지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건 엄마 자신이 수학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아이와 함께 실생활에서 수학이 활용되는 것들을 찾아보고, 우리의 삶이 수학 덕분에 어떻게 편리해지고 유익해졌는지 알아본다. 수학에 관심이 있는 엄마들의 아이일수록 수학을 더 잘하는 것은 생활 전반에서 수학을 접할 기회를 더 많이 주기 때문이라나.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수학을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수학 공부를 안 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공부하는 습관이 전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수학 공부에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야 할 길을 끝까지, 행복하게 잘 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엄마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사실 영어를 공부시키기 위해 갖은 아이디어를 다 짜내면서도 수학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런 노력을 하는 엄마는 드물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아이와 함께 실생활에서 수학이 활용되는 것들을 찾아보고, 우리의 삶이 수학 덕분에 어떻게 편리해지고 유익해졌는지 알아볼 수 있는 실제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이 등장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다섯살 이상 초등3학년까지의 자녀를 둔 부모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잠시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못하는 아이들은 종이 접기, 블록이나 칠교판 등 이왕이면 좋아하는 놀이를 통해서 공부 같지 않게 공부를 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다. 간간이 숫자 노래도 부르고 문제와 연관된 게임도 만드는 등 처음엔 엄마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은 특유의 근성을 지니고 있다. 자존심이 강해서 스스로 생각해서 풀려고 하지 가르쳐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학적 근성이 강한 아이로 키우려면 생활 속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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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 2009-01-1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찬이 월령에서는 <국제적 우등생은 10살 이전에 키워진다> 보시면 수학에 관해 조금 더 도움되는 말이 있을거예요. 제목이 거시기 해서 그렇지 기회되시면 빌려 보시든지 하면 좋을거예요.

icaru 2009-01-1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설 님, 아~ 고맙습니다!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어어, 하면서 막 스피디하게 책장을 넘기기는 하는데, “주인공 너는 왜? 이렇게 나락으로 나락으로 향하고 있는거니? 뒤에 가면 나오려나?” 싶은 거. 작중 인물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데 대한 동기 부여랄까, 그런 게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점이 감상을 약화시킬 수도 있겠다.

주인공 미로가 사랑했던 남자 나루세는 왜 미로의 친구 요코를 죽였으며, 미로가 나루세를 어떤 경로로 경찰에 밀고해 버렸다는 것일까? 나루세가 형을 마치게 될 때까지 기다려서 나루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으며, 감옥 안에서 임기를 마치고 있을 줄 알았던 나루세가 몇 년전 자살을 했고, 의붓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로에게 전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의붓아버지를 죽여야겠다는 발상을 하게 되는 것은 또 어떤 사연이 바탕에 깔려서일까?   ------> 정확히 2년이 지나고, 그의 작품 얼굴에 흩날리는 비 라는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을 읽고 이해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말 물만두 님 말마따나 첫작품부터 나왔어야 할 것을...

그런데 내가 납득할 법한 사연 같은 것은 없더라는....  내가 납득하고 자시고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실제 그런 삶도 맹목적인 삶도 있을법하다. 복수만을 생각하며 한걸음 내닫는 삶, 다 접고 손 안의 몇 십만 엔을 밑천으로 낯선 도시 혹은 다른 나라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스산한 욕망만 남은 삶.    


/

"왜 자식을 찾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재난이기 때문이야. 내가 버린 자식이 재난을 몰고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어. 말하자면 버린 과거를 세월이 흐른 뒤에 수습해야만 할 시기가 와. 그때를 위한 준비지.”
/

"쌀쌀맞은 소리겠지만, 그 정도 부채를 안고 있는 게 앞으로 살아가기 쉬울 거예요."
/

"방금 사람을 죽인 게 처음이라고 했지만 거짓말이야. 나는 의붓아버지를 죽게 만들어서 도망 다니고 이어. 약을 먹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일부러 못 먹게 했어. 아버지는 괴로워하며 죽었지. 히사에는 아버지 애인이었기 때문에 나를 증오하며 집요하게 뒤쫓은 거야. 사람이 죽으면 재앙이 와."
/

"왜라니? 어떤 얼굴을 한 애가 나오는지 보고 싶지도 않단 말이냐? 재미있어. 어떤 사정이 이는지는 모르지만 남자 따윈 관계없어. 낳으면 여자가 이기게 되어 있어. "
/

갓난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애를 보니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솟구쳤다. 내 몸에서 태어난 힘없는 생명을 보호하고 싶다는 욕망과 힘없기 때문에 멋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 양쪽 다 비슷한 무게의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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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1-0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시리즈인지라 첫 작품이 먼저 나왔다면 좋았을텐데요.
거기다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시리즈 안에서도 시간이 뒤죽박죽이라고 하더라구요.

icaru 2009-01-1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로 시리즈로 나왔다는 것은 뒤에 옮긴이의 말에서 알 수 있었는데, 그렴 다크를 읽기 전에 무얼 읽었더라면 좋았을까요? 저는 뒤늦게 기리노 나쓰오 같은 대작가를 만나 행복했다는 ^^ .. 최근에 잔학기, 암보스 문도스, 아웃1, 2,를 몰아서 읽었더랬어요~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박완서 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중에서 발췌

초기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6. 25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은 오빠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보려는 몸부림 같은 작품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 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 가며 곡을 하고 문상객을 치르고 ,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내 처녀 시절,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는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너도 결혼을 해야지. 처자식만 알 착실한 남자하고.

어느 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 대번에 동의했다. 처자식의 먹이를 벌어들이는 것 외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 나도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게 마치 오빠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애를 낳고 또 낳았다.

처자식만 아는 남편, 많은 아이들, 그래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사는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마치 망가진 용수철처럼 풀려 있었다.

나는 망령들을 내 내부에 가뒀으니까. 망령은 언젠가는 토해 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 체증이 되어 내 내부 한가운데에 가로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차 더 묘한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망령을 가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망령에게 갇힌 꼴이라는 것을. 나는 망령에 갇힘으로써 온갖 사는 즐거움, 세상 아름다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계기는 뒤늦게도 40세가 되어서 왔다. 그땐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보기에도 그렇고, 살림 외에 딴짓을 생각하는 게 가당찮아 보일 만큼 나이도 들고, 주부로서 관록도 붙어 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어렵지만 40세에 어떻게 글을 쓸 마음을 먹었느냐,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누구에게 사사했는가 등등의 구체적인 질문에도 대답이 궁색하다. 사사도 한 바 없고 습작기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으스대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이 소설도 타고난 소질 없이는 어느 정도 이상은 갈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타고난 것만으로 풀어먹을 수 있는 한계는 만들어진 한계보다 훨씬 더 협소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용훼(容喙)할 수 없는 정의를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을 썼다는 얘기가 된다.

소설에 대한 엄숙한 정의를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할 무렵 비로소 남들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에 솔깃하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해한 문학론 같은 것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옳은 소리 같았다. 하다못해 소설은 마땅히 이런 거여야 한다. 아니다 마땅히 저런 거여야 한다고 싸우는 소리에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조 없게도 양쪽이 다 옳은 소리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일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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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8-1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에 밑줄 쫘악 긋고 싶네요.
누구 닮았다는 소리 듣기 싫은 만큼 내 글이 누구 글 닮았다는 소리도 끔찍히 싫어하는데 박완서님의 글을 읽으면 내 일기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자주 들어요.아! 부디 오해는 마시길! 제가 그만큼 출중하게 쓴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고 내 생각이나 내 경험의 일부를 박완서님의 글에서 만난다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 정말 놀라우면서도 좌절스럽답니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이렇게 옮겨 놓았지? 하는 착각은 놀라움. 나는 죽었다 깨나도 못 쓸 텐데, 이 분은 이렇게 술술술 자연스럽게 풀어놓는구나 하는 좌절감..거기에 덧붙여 좀 더 귀여운 좌절도 있어요. "이 분이 먼저 이렇게 선수를 치셨으니 나는 나중에라도 못 써먹겠다"대충 요런..ㅎㅎㅎ

이카루님, 올만이염^^
웬만하면 찬이 사진 좀 올려주시고요~^^

icaru 2009-01-1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박완서 작가나 진주 님이나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랄까 아우라가 비슷하다는 생각 들어요~ 찬이 사진요? ㅎㅎ.. 안 올려 버릇하니깐 그게 잘....
 
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구판절판


이 순간, 노리코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운다. 마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마구 운다.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고통을 견디어 온 이 젊은 여자, 자신이 선량하다고 믿지 않는 이 젊은 여자.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사람은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사람은 자신이 선량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을 용서하면서 삶을 살아 나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107쪽

30세 생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지만 브릭은 평생에 단 한번도 자살을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 후 이틀 동안 아파트에 혼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고통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떠날 수 있는지 그것만 궁리했다.
- 147쪽

인생의 이런저런 순간에, 모든 가족은 아주 기이한 사건을 겪게 된다. 가령 끔찍한 범죄, 홍수와 지진, 기괴한 사건, 기적적인 행운 등이 그런 것이다. 비밀이나 감추고 싶은 약점이 없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여기자는 그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가족 혹은 대부분의 가족은 그럴지 모르지만, 모든 가족이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그녀는 자기 가족의 사례를 들면서 단 한번도 기이한 사건, 혹은 예외적 사건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무슨 소리, 알렉이 말했다. 한번 집중해서 잘 생각해 봐. 그러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어. 그러자 여기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래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라고 대꾸했다.
-167쪽

그녀가 자신의 내부에 많은 고통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았어. 평상시에 소니아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어. 부드럽고, 상냥하고, 충실하고, 남을 잘 용서하고, 생기발랄하고, 정말 엄청난 사랑의 바탕을 갖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때때로 정신이 딴 데로 팔려 있었어. 심지어 대화 중에도 그러곤 했지. (중략)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본능이나 충동은 아주 깊었어. 오싹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기이할 정도로 천박했어. 그녀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잘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 어떤 것이든 아주 오래 집중하지 못했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을 빼고 말이야.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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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9-01-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도 많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