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박완서 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중에서 발췌

초기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6. 25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은 오빠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보려는 몸부림 같은 작품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 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 가며 곡을 하고 문상객을 치르고 ,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내 처녀 시절,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는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너도 결혼을 해야지. 처자식만 알 착실한 남자하고.

어느 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 대번에 동의했다. 처자식의 먹이를 벌어들이는 것 외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 나도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게 마치 오빠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애를 낳고 또 낳았다.

처자식만 아는 남편, 많은 아이들, 그래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사는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마치 망가진 용수철처럼 풀려 있었다.

나는 망령들을 내 내부에 가뒀으니까. 망령은 언젠가는 토해 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 체증이 되어 내 내부 한가운데에 가로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차 더 묘한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망령을 가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망령에게 갇힌 꼴이라는 것을. 나는 망령에 갇힘으로써 온갖 사는 즐거움, 세상 아름다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계기는 뒤늦게도 40세가 되어서 왔다. 그땐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보기에도 그렇고, 살림 외에 딴짓을 생각하는 게 가당찮아 보일 만큼 나이도 들고, 주부로서 관록도 붙어 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어렵지만 40세에 어떻게 글을 쓸 마음을 먹었느냐,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누구에게 사사했는가 등등의 구체적인 질문에도 대답이 궁색하다. 사사도 한 바 없고 습작기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으스대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이 소설도 타고난 소질 없이는 어느 정도 이상은 갈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타고난 것만으로 풀어먹을 수 있는 한계는 만들어진 한계보다 훨씬 더 협소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용훼(容喙)할 수 없는 정의를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을 썼다는 얘기가 된다.

소설에 대한 엄숙한 정의를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할 무렵 비로소 남들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에 솔깃하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해한 문학론 같은 것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옳은 소리 같았다. 하다못해 소설은 마땅히 이런 거여야 한다. 아니다 마땅히 저런 거여야 한다고 싸우는 소리에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조 없게도 양쪽이 다 옳은 소리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일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08-1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에 밑줄 쫘악 긋고 싶네요.
누구 닮았다는 소리 듣기 싫은 만큼 내 글이 누구 글 닮았다는 소리도 끔찍히 싫어하는데 박완서님의 글을 읽으면 내 일기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자주 들어요.아! 부디 오해는 마시길! 제가 그만큼 출중하게 쓴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고 내 생각이나 내 경험의 일부를 박완서님의 글에서 만난다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 정말 놀라우면서도 좌절스럽답니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이렇게 옮겨 놓았지? 하는 착각은 놀라움. 나는 죽었다 깨나도 못 쓸 텐데, 이 분은 이렇게 술술술 자연스럽게 풀어놓는구나 하는 좌절감..거기에 덧붙여 좀 더 귀여운 좌절도 있어요. "이 분이 먼저 이렇게 선수를 치셨으니 나는 나중에라도 못 써먹겠다"대충 요런..ㅎㅎㅎ

이카루님, 올만이염^^
웬만하면 찬이 사진 좀 올려주시고요~^^

icaru 2009-01-1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박완서 작가나 진주 님이나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랄까 아우라가 비슷하다는 생각 들어요~ 찬이 사진요? ㅎㅎ.. 안 올려 버릇하니깐 그게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