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 미술, 패션, 인테리어 취향에 대한 내밀한 탐구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22쪽

취향은 때로 심오하게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어떤 친구와 같이 놀고 싶지 않으면 “넌 왜 그렇게 옷을 못 입니?”라든가 “너의 독서 취향은 왜 그 모양이니?”라고 취향을 무시하는 몇 마디를 던지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차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딸기를 좋아한다고 치자.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줄지는 의심스럽지만, 누군가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이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하고 만다. 어떤 음식을 차별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한 개인의 엄숙한 선언과도 같고, 어떤 불가침의 영역처럼 존중되는 것이다.

 

56~57쪽

이번 뉴 뮤지엄의 전시가 신선했던 건 보여주고자 하는 톤 때문이다. 현재 예술계를 정의하는 트렌드와는 달리 이 저시는 어둡고 심각하다. 지난 아무리 쇼에서도 후마 바바의 작품을 보았지만, 번쩍거리는 아무리 쇼에서 그 작품은 팔리기 위해 존재했다. 이번 전시회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비로소 작가의 작품이 제대로 보였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미술관의 일이란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적당한 공간, 온도와 습도, 조명, 그리고 맥락. 어떤 전시를 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 속에 특정 작품들이 설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고, 각각의 작품들은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 기획된 전시라는 맥락을 갖는다. 어떤 전시냐에 따라, 관객들이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존재와 의미는 변한다. 그렇게 해서 변용을 거친 작품은 다시 작품을 보는 관객과 전시와 세상의 각도를 조금 틀어놓기도 하는 것이다. 




72쪽 

한 벌의 드레스에 대한 환상이 꼭 황당한 건 아니다. 엄청난 양의 쇼핑을 일삼던 여성이라도 결국은 고작 몇 벌, 대개 한 벌의 드레스로 기억된다. 코코 샤넬조차 수많은 옷을 만들었지만 정작 그녀를 떠올리면 진주 목걸이를 내려뜨린 검정색 드레스가 떠오르지 않는가. 실제로 19세기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의 ‘패션’ 전략은 한 벌의 드레스였다. 말 그대로 딱 한 벌만 입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스타일의 검정색 실크 드레스만 입었다. 이유는 패션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 시간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듯 치장하는 데 드는 정신적 에너지조차 아까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티에 초대를 받을 때는 꼭 내실을 요청했다. 현명한 사상가들과 친지들을 따로 불러, 쓸데없이 치장을 할 빌미 자체를 없애기 위한 거였다. 조르주 상드가 돈이나 취향이 없어 한 벌만 입은 게 아니라 일종의 전략으로 그렇게 했기에 내가 패션이란 말을 썼지만, 한 벌의 옷만 입는 건 엄격한 의미에서 패션이 아니다. 패션이란 것의 전제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갈망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78~81쪽 

그 여자의 옷 입기 - <토니 타키타니>(2004)

책장을 넘기는 속도로 진행되는 영화 <토니 타키타니>엔 하루키의 원작엔 없는 장면이 살짝 삽입되어 있다. 토니가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는데, 옆에서 쇼핑을 하던 젊은 여자가 오렌지 더미 옆을 지나자 갑자기 오렌지가 와르르 무너진다. 주인이 달려오자 그녀는 옆에 이떤 토니를 보며 붇는다. “내가 그런 거 아니죠? 맞죠?”

<토니 타키타니>의 인물들은 ‘오렌지가 무너지는 세상’과 직접적인 연루를 피해 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영화에선 폐쇄된 공간, 감옥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 각자 나름의 상자 안에 갇혀서 살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그렇겠지만, 이는 특히 일본인들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 데 적당해 보인다. 벤토 박스에 점심을 먹고 성냥갑처럼 작은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태어난지 며칠 만에 엄마를 잃은 토니는, 미국식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나중에 미술 대학에 진학하는데, 다른 학생들처럼 데모도 안 하고, 인간의 감정을 담은 예술에 대해선 ‘조악하고 미숙하고 부정확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복잡한 기계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던 토니가 “외로움은 감옥과도 같다.”라는 사실을 처음 느낀 건 사랑에 빠졌을 때다. 그런데 토니는 다른 것도 아니고 한 여자의 아름다운 옷 입기에 매료된다. 그는 여자가 “먼 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라고 자신의 인상을 고백한다.

토니가 옷 입기를 칭찬했을 때 여자는 옷은 자신의 빈곳을 채워주며 월급의 대부분을 옷 사는 데 써버린다고 고백한다. 토니가 여자와 결혼하고 자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행복감에 젖는 순간, 아내의 쇼핑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내가 다른 것엔 관심이 없고 쇼핑에만 몰두하는 것도 자폐적이지만 좀 다른 데가 있다. 토니는 아내가 쇼핑을 할 때면 “얼굴 표정이 변하고 목소리까지 변한다”는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녀가 샀던 옷을 되돌려주고 돌아오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은 “쇼핑을 그친 여자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토니의 아내에게 패션과 쇼핑은 그 자체로 실제하고 텅 빈 현실을 대체해줄 수 있는 하나의 ‘자족적’인 생존 방식이다. 직장이나 집에서의 일들이 존재의 유일함을 매순간 거스르는 하잘것없는 것이어도 쇼핑몰을 찾으면 애기가 달라진다. 브랜드 이미지가 가장 앞서가면서도 배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약속해주고, 크레디트카드의 구매력은 그 세상 속에서 그녀의 위치와 권력을 보장해 준다.  




96~97쪽

아침에 그라놀라에 얹어 먹거나 팬케이크에 곁들여 먹기에 딸기만큼 예쁘고 맛있는 것이 없다. 친지를 불러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디저트로 가장 만만하다. 딸기와 산딸기, 블루베리와 블랙베리를 화이트 와인과 설탕에 절여 하룻밤 재운 후 민트 잎사귀를 띄워 내면 그럴 듯한 디저트가 된다. 이도 저도 귀찮을 때는 딸기를 한 아름 사다가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아낸다. 여기서 포인트는 사람들이 작게 ‘와’ 할 정도로 많이 담아내는 것이다. 모두들 그저 한두 알 집어 먹어도 상관없다. 그 탱탱하고 빨간 딸기들이 놀랄 정도로 많이 담겨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디저트는 먹는 거나 다름없다. 꽃이 있는 식탁에선 밥을 조금 먹어도 배부르고 행복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




106~107쪽

사람들이 좀 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개인 차원의 미적 분별력이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17~18세기경 영국인들의 취향에 관한 발언들을 보면 재미있다. 영국의 한 철학자는 취향이란 영혼에 달린 액세서리 같은 것이라 했고, 한 작가는 취향이 생기는 순간 악덕과 무지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 했다. 그 시대는 취향이라는 말이 교양이나 사회적 매너까지 아울렀다고 할 수 있다.

취향이 갖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대개 소비의 문제로 귀착된다. 취향이란 결국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소비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숨길 수가 없다는 건 취향의 나쁜 점이자 좋은 점이다. 언제든지 돈으로 ‘좋은 취향’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취향이 근거가 없다면 어디서든 드러나게 된다. ‘고급 취향’을 통해 자니의 경제 능력이나 지위, 뛰어난 감각을 뽐내려 노력할 때 조차 그 상대에 따라 하릴없이 자신의 몰취향을 드러낼 수도 있으니 얼마나 낭패인가.

어린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의 ‘타고난’ 방향성을 자신과 남에게 알리는 차원에서 유의미하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단순히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버틸 수는 없다. 느끼고 배우지 않은 인간을 상상할 수 없듯이, 미적 경험과 교육으로 연마되지 않은 취향이란 취향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