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러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저 멀리, 장화홍련전으로 가면 두 자매를 사악하게 괴롭히던 계모가 허씨였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생활의 애환을 노래하던, 그 주인공 생원이 허씨였고,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백면서생으로 글만 읽다가 갑자기 돈모으는 재주를 부리는 위인으로 뒤바뀌어, 지상 낙원을 꿈꾸는 주인공 양반도 허씨다.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피를 팔아 해결을 보는 이 소설의 주인공 허삼관도 허씨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거다. 참 허허롭다. 이렇게 싱거운 소리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건 뭘까, 이건, 이 소설, 내내 삼관이네 가족에게 닥치는 모진 인생 역정 속에서도 유유하게 흐르던 해학을 내가 전수받고자 애썼던 결과인가보다.

이 책의 유난한, 처절함 속에서 나오는 희극미와 해학의 압권은 여러 주인공의 행태를 통해 나타나지만, 그 중에 백미는 바로 삼관이이다. 그가, 친자식이 아님이 밝혀진 일락이만 뺀 온 식구를 데리고 국수를 먹으러 가는 장면이나,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임분방과 바람을 피는 장면에서는 '허삼관 참 소갈머리 없다,' 하기도 했지만 다음에 벌어지는 사건에서, 일테면 일락이를 따스하게 감싸고, 아내 허옥란의 결혼 전 일을, 당신도 잘못(하소용과의 일) 나도 잘못(임분방과의 일)이라고 덮어주는 일 등등, 그의 희극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서 '사람살이가 다 이렇지 뭐.'하게 된다.

내가 정말 박장대소하며 읽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었다. 결혼전 하소용과의 일로 곤란함을 겪던 허삼관 마누라 허옥란이, 길거리에서 하소용의 부인과 대판 싸움이 붙는다. 동네 사람들이 이 사실을 허삼관에게 알리는데 허삼관이 동네 사람들의 반응에 응수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다. '삶은 돼지가 뜨거운 물 무서워하는 거 봤수'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부분이었다. 삶은 본래 싸움터처럼 질펀한 것. 여간한 일이 아니라면 일일이 핏대를 올리고, 충격을 받거나, 당황할 것까진 없다는 듯한 뉘앙스가 이 삶은 돼지~ 운운에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을 읽다보면 대개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거 같다. 약간의 억지(?)의 요소를 보이는 이 내맘대로의 구분은 이렇다. 작가가 머리로 쓴 소설과, 몸으로 쓴 소설. 이 소설을 굳이 껴 넣자면 어디에 넣을 수 있을까. 작가의 체험을 토대로한 육성이 녹아 흐른 작품인지는 내 수준에서 감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머리로 쓴 관념 소설이 아니기에, 주인공들의 삶의 극한적인 고통에서 유발되는 웃음과 울음이 독자로 하여금 더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소설 <살아간다는 것>과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를 얼른 수소문하여 읽어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05-03-2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의 독서 일기를 읽다보니 그런 말이 나온다. 모국어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중국 사람들은 축복받은 느낌이었을 거라는... 모든 여타의 찬사와 칭찬의 말을 짧고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icaru 2005-08-22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신용의 <고백>1994에도 밥을 사먹기 위해 혈액원에 피를 팔러 가는 장면이 마지막에 나온다.
눈 내리는 겨울날 주인공이 피를 팔려 갔는데 의사가 "당신은 이제 피를 뽑으면 죽어요"라며 체혈을 거부한다.
주인공은 혈액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눈을 미사포처럼 쓰고 있는 지게를 발견하고, 지게에 묻은 눈을 턴 후 삐그럭거리는 지게에 돌멩이로 못질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 어깨에 둘러메고 청계천 쪽으로 사라진다. 바이러스에겐 고단위 항생제가 생존의 위협이자 그 상황이 곧 새로운 종의 기원이 되듯, 즉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주인공을 지게꾼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