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꼬네집에 놀러올래
이만교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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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읽고, 서평을 썼던 일을 떠올려 본다. 막상은 재미있게 읽고도, 서평으로는 별로라고 써지던, 정말 이중적인 모습을 연출했었다.

이번에는?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꿈꾸는 것은, 책을 덮고 났을 때 그 글의 작가가 친구처럼 느껴져 언제든지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라고. 그렇다면 소설가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요. 다소나마 작가님 꿈에 근접하신 듯 보입니다.

이 소설... 앞부분은 진짜 재밌었다. 벽에 기대앉아 가볍게 만화책을 넘기는 거 보다 더 발랄하고 박진감 있게 책장이 넘어갔다. 주인공네 가족들이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중에 그것이 미국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모텔 켈리포니아로의 여행인 걸 알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된 이후부터 어쩜 저렇게 재밌게 쓰냐...감탄을 연발했지만, 서서히 끝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결국, 여자 친구 해연이가 주인공을 떠나는 장면에 가면 페이소스랄까. 웃음의 정체는 서글픔으로 둔갑해 버렸다. 내 느낌이 그랬다. 게다가 여자 친구의 결별 선언을 듣고, 여자 친구가 교통 사고를 당하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든지, 사실은 친구와 결혼한 여자 친구를, 멀리 유학 가서 가끔 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받
아들이는 주인공의 이러저러한 모습들.... 허허...

이런 소설은 읽을 땐 유쾌해서 좋지만, 다 읽고 나면, '왜, 나는 저 소설보다 나은 상황에
살면서도 항상 찌들어든 모양새로 살까' 하는 자책이 들곤 한다. 저 속의 세상은 넉넉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못한 형편이긴 하지만 '소설' 속의 세상이기에 유쾌한 건가. 아..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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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를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에바 헬러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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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위해 들고 다니는 내내 화려한 책 표지와 책 제목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본의 아니게 집중시키며 다녔다. 어떤 사람은 '다른 남자를 만나면 어떻게 모든 것이 달라지더라고 말하더냐'고 직접적으로 내게 물었는데 거기에 합당한 대답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마땅한 대답 대신 '한 남자 때문에 지지고복고 하던데.'라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주인공 '나'는 스물 다섯 즈음에 영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자칭 진보적인 지식인 여대생이다. 그렇다, '자칭'이다. 스스로를 퍽 자부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학교에 강사인 고트프리트만 빼고(이 소설의 막바지 부분에 가면 주인공 '나'는 이 인물에게 가장 많이 실망을 하게 된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약간은 속물 취급을 하거나 한수 아래로 보곤한다. 물론 때때로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 내부의 목소리를 글줄로 읽을 때마다 '사실은 너,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셈이야!' 하며 냉소적인 포즈를 취하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악의적이지만은 않게 그러니까 유머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끊임없이 겪게 되는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이 독자이며 여성인 '나'의 모습들을 보는 것도 같아 마음이 껄쩍지근해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의 주인공 콘스텐체와 그 주변의 여러 여성들의 인물 유형은 남다르고 특별한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고 사실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그녀는 항상 지적인 자기 향상에 가치를 두고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사회의 인습과 제도를 거부한다. 딴에 그렇다는 거다. 이런 그녀는, 이 사회의 결혼 제도와 가족 제도는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권력 유지의 수단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자연스런 자아를 왜곡시키는 억압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동거인이자 애인인 잘생기고 인색한 병원 수련의로 있는 남자 친구 알베르트가 있었지만, 그는 '나'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는 동반자가 되기엔 부족한 전형적인 현실주의자이다.

그녀는 이성적이며 전적인 상호 합의하에 이 남자 친구 알베르트와 이별을 한다. '전적인 상호 합의 하의 이별'란 이 글의 나래이터이자 주인공이 말하는 진술이고, 독자가 보기에는 함께 쓰던 소지품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 내 것이라 네 것이라고 옥식각신 할만큼 치졸한(?) 결별이었다.

그리고나서 지성적인 남성의 전형으로 생각한 영화 학교 강사 고트프리트와 동반자적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이 고트프리트의 실체는 '혁명가를 가장한 아주 완강한 보수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영화 학교 강사와의 교제 시도는 '나'에게 실망과 좌절의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관계의 허구성에 대해 깨닫는다.

결국 헤어졌던 옛날 남자 친구 알베르트와 다시 재결합 즉, 결혼 약속을 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진정한 동반자 관계란 상대방의 인생관과 인격을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맞춰 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소설의 작가는 장장 500페이지 남짓되는 이 소설을 큰 사건도 없이 끌고 온 것 셈이 되긴 하지만, 뭐 퍽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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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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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마구마구 책을 읽어 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래서 한 번 잡은 책은 무리하게 속도를 내어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철학 관련 책자들을 읽을라지면, 처음 부분을 읽다가 말다가 하다가 결국엔 내던져 버리기 일수이다. 속도가 붙질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게 무한정 붙들고 늘어져 있을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이젠 이것이 아예 하나의 독서 패턴으로 자리를 잡아,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인문 철학 관련류의 책은 애초에 배제해 놓는다.

누군가 말했다. 책을 현명하게 읽을려면 어려운 책과 가벼운 책을 적절히 배합해 가면 읽어야 한다고, 어제까지는 좀 어려운 책을 붙잡고 씨름을 했으면, 오늘은 심각해지지 않을 책을 잡아야만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균형 감각 같은 것이 생긴다는 요지이다. 나의 경우에는 항상, 읽는 행위가 계속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책읽기에 대해 한없는 애정을 갖도록 하는 책들은 후자, 그러니까 가벼운 소설책이었던 것 같다.

<밑줄 긋는 남자>는 딱 그 쪽이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로맹 가리라는 소설가를 좋아하는 발랄한 스물 다섯 살의 여자 주인공 콩스탕스가 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와 소통을 꿈꾸는 여자이다. 왜 누구나 그렇듯 이 여자도 지금 속이 많이 허하다. 이 때 마침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밑줄 친 부분들이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느낀다.

콩스탕스 또한 밑줄을 긋는 형식으로 알 수 없는 이 타자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 동안에 별 의미없이 다른 남자를 사귀다가 헤어지기도 했고, 한동안 책 읽는 걸 중단하기도 했다. 밑줄을 긋는 남자가 너무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온다고 느꼈고, 콩스탕스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더디게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에 콩스탕스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 밑줄 긋는 남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도서관 사서인 지젤을 통해서.

책은 콩스탕스로 하여금 타자와의 교류를 꿈꾸게 만들었다. 결말에서는 주인공 콩스탕스가 그리던 그 밑줄 긋는 남자를 만났는가? 이건 다음에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여기까지.... 지금 내가 조조거리면 재미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와 이 모든 일상이 모두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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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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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와 어떤 장소나 그만의 냄새가 있다. 심지어는 우리집 강아지에게서도 아무리 샴푸질을 해도 그 녀석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질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낯선 장소에 떨어져도 전에 맡은 적이 있는 냄새를 맡게 되면, 마음이 편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생선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나고 버려진 그르누이는 천성적으로 몸에 냄새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는 냄새에 유난한 집착하며, 가히 후각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급기야 향수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그르누이에게는 야심이 하나 생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향수계의 스승인 발디니나 드뤼오가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그를 죽도록 혹사시키거나 이용해 먹거나, 다른 동료나 세상 사람들이 그 자신을 지루한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 밖에 없다. 향수를 만드는 일. 그 향수로 말할 거 같으면, 그걸 뿌린 사람을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향수. 일단 그 향수를 만들면, 세상은 자기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모두가 자신의 편이 되니까. 정말 시작은 그래서였을까?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서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인가? 

세월이 흘러 드디어 그르누이가 원하는 대망의 향수를 완성하게 되었을 때, 그의 그동안의 살인 행각이 밝혀지고, 시민들이 모인 광장 앞에서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다다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스물 여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이 살인마를 잔인하게 처형시켜야 한다며 아우성이던 사람들이 그르누이가 처형장에 당도한 순간, 처형이 다 뭔가, 그에게 연민과 호감을 느끼며 급기야 사랑하게 된다. 모두 그 향수 덕분이다.

그르누이가 꿈꾸던 것이 드디어 성공했다. 일생일대의 기다리던 그 감격의 순간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 그런데 가만있자 그렇지가 않다. 그르누이 마음이 달라졌다. 사람들로 사랑을 받는 이 상황이 혐오스럽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거지. 사람들은 진짜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에게서 단지 그가 연출한 분위기만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르누이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르누이는 그가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유 고약해라. 

그가 만든 향수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존재가 들키지 않도록 하는 향수, 다른 사람에게 순진하고 가여운 느낌을 주는 향수, 다른 사람들에게 단정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향수.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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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현종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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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은 책을 통해 소개 받는 경우가 많다. 일테면, 밑줄 긋는 남자에서 로맹가리의 소설들을 소개 받고, 상실의 시대를 통해 이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어하듯 말이다. 나는 최근 뉴욕과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읽었는데 시공 디스커버리에서 나온 뉴욕을 읽다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느낀 게 있다. 외국 소설은 번역자를 잘 보고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이 번역한 소설은 남다른 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역시 편견이다. 다른 번역자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더라도 이렇게까지 맥락이 끊기는 단절감을 수시로 경험해야 했을까? 정현종 님의 번역을 에누리없이 말하자면 그거다. 당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이 소설이 유명세를 동반하는 것은 1920년 당시의 뉴욕 상류 사회의 모습, 특히 남녀 관계, 결혼 생활, 부자에 대한 모습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전 중에 고전의 형태인 로망스를 담고 있다는 것. 어릴 적에 읽어대던 하이틴 로맨스들은 <위대한 개츠비>의 형식을 빌어 답보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저 미치었으니.

데이지는 한낱 군인에 지나지 않던 5년 전 신분의 개츠비를 사랑하고는 있었으나, 그가 옥스포드로 파견을 가게 되어 데이지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데이지는 차분히 개츠비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이 타자에 의해 어떤 확실한 형태를 갖추어지길 바랬고, 게츠비가 귀향하지 못하고 있는 그 상황은 무척이나 불안했으리라, 그러다가 만난 부유한 톰에게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고, 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5년만에 만난 부자 개츠비를 보고 그에게 마음이 가는 걸 느꼈지만 현재의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하고 어찌하는 둥의 일련의 일들에 엄두도 안 났으리라.

반면, 이미 유부녀가 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되찾으려는 개츠비의 노력은 그가 갖춘 위엄과 재산의 정도로 보았을 때, 가히 귀엽고 순진해 뵈는 수준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야망을 품은 것이었다. 왜냐, 데이지와 게츠비는 너무나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는 데, 둘이 재결합이 불가능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데이지 쪽의 삶의 스타일은 엉성하며, 무책임하고, 산뜻하며 경쾌하다면, 개츠비는 그와 다르다. 개츠비의 뚝심과 책임감은 데이지가 저지른 교통 사고의 책임까지 스스로 짊어질 정도이다. 결국 그 사건이 개츠비의 죽음을 불러오게 된다.

이 스토리는, 태생적으로 부유한 사람과 후천적으로 부유해진 사람이 결합하고자 하는 데서 발생한 비극적인 에피소드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이 작품의 주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면 않을 그런 주변적 문제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소설에 드러난 돈 있는 사람들의 무책임과 삶의 엉성함 대한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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