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오병욱 지음 / 뜨인돌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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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처음부터~ 227페이지까지(책의 사분의 삼)

미국의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꽃을 보지만 어떤 점에서 아무도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꽃은 아주 작고, 우리는 아주 바쁘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친구를 사귀는 일이 시간이 걸리는 일인 것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 왔지만 여전히 제대로 하지도 못한 일들만 잔뜩 쌓여 있다는 걸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된다. 아니 너무 바빠서 그런 걸 깨달으며 살 수나 있으신지....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일에 치여 내가 그렇게 하며 살기 벅차다면,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도 나직히 귀기울여 듣고 싶었고....

비바람에 후둑후둑 감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소나기가 그친 뒤 뒤뜰에 나가 젖은 이끼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하얀 감꽃을 본다.

가을 겨울에 걸쳐서 이따금씩 딱따구리가 찾아와 감나무 둥치를 쪼아댄다. ....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언제나 귀를 기울이게 된다. 무게 있게 딱딱 소리가 나면 멀쩡한 둥치이고, 통통통 울림이 있으면 속이 빈 둥치, 퍽퍽 뿌직뿌직 나무 뜯는 소리가 나면 썩은 둥치다. 나무 종류에 따라서 딱따구리 소리도 조금씩은 바뀌겠지만 그 차이를 알아들은 만큼 내 귀는 섬세하지 못하다. 나무마다 바람소리가 다르고 그 소리 또한 계절마다 다를 것이다.
딱따구리는 머리에 충격 완충 장치 같은 게 있어서 나무를 쫄 때 생기는 지속적인 충격으로부터 자신의 머리를 보호한다고 한다. 그러니 다른 새가 함부로 딱따구리 흉내내다가는 그야말로 골치가 아프게 된다.


딱따구리 소리의 차이를 알아들을 만큼 자신의 귀가 섬세하지 못함을 실토하는 저 단백함. 다른 새가 딱따구리 흉내내다가는 골치 아플 거라고 에둘러 말하는 묘미.

그리고 그는 1998년 8월 그해 물난리 때, 폐교 된 초등 분교에 잡았던 작업실이 통째로 떠내려가는 물난리를 맞는다. 비가 온 다음날 작업실을 찾으니, 그 안에 있던 그림들이며, 물감이며, 이런 재료들이 모두 떠내려간 작업실. 교실 바닥이 패이고 커다란 웅덩이만 남아 그 안에 물이 고여 있었다니. 게다가 몇년만의 전시를 그 해 가을 앞두고 있던 터라 전시회 일정을 취소를 해야 했었을 텐데. 그 상실감이란...참... 내가 옮기기엔 송구하다....

나는 갑자기 거대한 폐허 앞에 홀로 서 있게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쪽 아래에 뭔가 있다. 동네 앞에 있는 자갈밭 모퉁이에 사람들이 하얗게 앉아 있었다. 그게 그렇게 고마웠다. 8월 중순 뙤약볕 아래 새카맣게 그을린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제 막 배급받은 마른 빵을 뜯고 있다. 물도 우유도 없다. .... 노인들의 흰 옷과 하얀 모래밭이 너무나 눈부셨다.


이 책은 227페이지까지만 참 좋다.

227페이지가 넘어가면, 맑고 담담하게 느낌이 조금씩 퇴색된다. 은근히 자기 자랑이 뭍어 나고(학교 다닐 때, 기타를 잘 치고, 노래를 잘 불러 어딜가나 힘 안들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는 이야기, 그에 딸려 나는 인연들 성공회대 교수이자 노찾사 창립 멤버인 김창남은 그에게 전도되어 음악 노래패에 가입했다고, 김창남이 그날 밤 기숙사에서 그의 기타 소리에 홀리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메아리(서울대 노래동아리)’가 노찾사가 되었을까? 하고....홀로 묻고 있다. 서울대 음대 친구들과 음악을 같이 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질펀히 듣고 난 터라 그 이후의 페이지도 그 수수하고 담백했던 느낌이 조금 변색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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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2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얼마 전에 어디선가 읽은 사진에 관한 글이 생각 얼핏 생각나네요.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바라보는 진득함, 요즘 우리들 내면에는 바로 이게 필요할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그럼에도 더더욱 조급하게 만드는 이곳, 현재.(자꾸 뭔가를 재촉하는 듯한 이놈의 커서!)
서방님을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가만가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요. ^^
저도 '다른 새가 함부로 딱따구리 흉내내다가는 그야말로 골치가 아프게 된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 키득키득 했는데...

비로그인 2005-07-26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되는 냥반은 좀 기분 나쁘실 거 같은데 책표지 사진 봄서 '사람 거, 되게 말 안 듣게 생겼네..'하고 혼자서 실실 쪼개고 있었거든요.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고마운 책이네요. 이 책도 '쿠오레'에서 봤었던 거 같아요!

icaru 2005-07-2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들...이 시간 서재에 계시군요...

노파 님.. 깜빡 대는 커서를 보고 있음... 맘에 조급증이 일지요~ 얼릉 써재끼야는데 함서요... 이 책엔 그의 시골 생활이 함빡 묻어나 있는데... 그 재미가 좋아요~ 농사만 안 짓다 뿐... 자연에 푹 취해서 살더라고요... 아들녀석 공부책상도 나무로 직접 만들어서 주고, 우체통이랑 새집도 만들고... 우리가 좋아하는 백구도 키우고...쫑이와 슝이던가...뭐던가...

푸후후... 복돌 언냐 사람보는 눈이 나랑 찌찌뽕이네요...
책속의 그와 사진 속의 그는 판이하게 달라버려요!! 그죠~ 저도 로드무비 님 포토리뷰로 먼저 보았었더랬어요...

플레져 2005-07-2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이 책은 227페이지까지만 좋다! 요거요거 소설 제목이로군요.

로드무비 2005-07-27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나는 잘난척하는 걸로 안 읽혔는데......
아무튼 반갑고 재밌는 리뷰.(이건 추천!^^)

인터라겐 2005-07-2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보고 보관함속에 넣어둔 책이랍니다.. 급할게 없다 싶어... 1년지나 할이 시작하면 살려구요... ㅎㅎ 그런데 어떤 내용일지 무지 궁금해 지네요..

icaru 2005-07-27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 님...제목을 확 바꿀까요~ 이 책은 227페이지까지만 좋다! 로...

로드무비 님.. 어..그러게요...그런 뉘앙스로 굳이 안 읽어도 되는데... 암튼..내가 듣고 자팠던 이야기는 아니었더래요..저도 가만 보면...자기 자랑하는 이야기 듣는 거에 알레르기 있나봐요...^^

icaru 2005-07-27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인터라겐 님...코멘트를 우째 못 봤을까나요~
엇...그거 알뜰한 생각인데요~ 당장 읽을 책두 많은 시국에~ 이건 좀 두었다가 여유있을 때...^^

잉크냄새 2005-07-2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속에 있으면 속이 실한 둥치, 빈 둥치, 썩은 둥치에서 나는 소리도 구별할수 있나 보네요. 그런 통찰력이 인간 세상에도 적용될 것이고..
전 작가 사진 보고 인도차이나 어디메쯤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icaru 2005-07-2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좀 이국적인 외모지요~
그러니까 님들 말씀을 종합해 보면... 말 되게 안 듣게 생기신 인도차이나~ 분이시네요... 작가분이...
저도 머리 밀면... 말 되게 안 듣게 생긴 인도차이나 여자로 볼지도 모르겠어요...흐흐..

내가없는 이 안 2005-07-28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독특한 리뷴데요. 227쪽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어서 리뷰를 쓰시다니! 이카루님 기발해요, 기발해... 댓글들도 너무 재밌네요. ^^

icaru 2005-07-2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놀랬어요...어떻게 227페이지 이후가 넘어가면서... 어쩜 그렇게 제 태도가 싸악...변해, 읽는 둥 마는 둥 해질 수 있게 되는지... 227페이지 전까지는 담백하고~ 소탈하다 아!! 좋아~ ...
전...있죠... 사람들만 이상하게 봐 주지 않는다면... 삭발해보고 싶어요... “그래 그렇담 내 너에게 죽을 때까지 머리털 한 올 안 나게 해 주겠어~....” 이것두... 아조 곤란한 일이지만...한번쯤 삭발하고 리버럴하게 살아봤음...^^
님 말씀 듣고 댓글들을 주욱~ 읽어봤는데... 어...정말 재밌네요... 역시 님들과 공명하는 이 맛이야...리뷰 쓰는 맛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