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황홀 - 윤광준의 오디오이야기
윤광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사운드를 내는 스피커는 어떻게 가려내는가 하는 질문에,  ‘비올라의 음색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가의 차이이다.’ 라고 어디서 주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말에 나는 그런 의문을 품었었다.  비올라 소리인지, 바이올린 혹은 첼로의 음색인지 구별해 내는 능력은 스피커가 만들어 내 주는 것이 아니라 비올라가 어떤 소리를 낸다~ 하는 지각, 인식 같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맨눈으로도 저것이 비올라인지 바이얼린인지 구분을 못하는 판국이라면 더더욱.
나는 이렇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오디오에는 좀 ‘무식한’이다. 내로라 하는 오디오 파일인 윤광준은 오디오 기기를 바꾸는 과정에서 음악과 기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세 축을 정교히 하지만, 나는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청각도 원체 무감각스럽고.....

 

사회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97년 첫 월급을 타서 내 소유의 미니컴포넌트를 샀었다. 그 전까지는 룸메이트의 대형 라디오를 귀동냥이나 하는 신세였다. (귓동냥의 설움을 아시는지, 피아니시모 부분에서는 볼륨을 약간 높여 듣고, 포르테시모 부분에서는 순발력을 발휘 볼륨을 최대한 줄여 듣는 경지를 말한다.) 아무튼 그때 샀던 그 제품은 97년이었는데도 LG가 아니라 ‘골드스타’라는 브랜드명이 박혀 있었다. 흐흐... 갓 출시된 따끈한 신제품이 아니었던 탓에 비교적 싸게 구입했던 거다. 99년 초 직장을 옮길 때, 전 직장의 퇴직금을 탈탈 털어 지금까지 내 좋은 벗이 되어 주고 있는 롯데 오디오를 구비했다. (아마 기계가 망가져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 기기를 바꾸지 않을 성 싶은데..)

이 오디오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제1 바이올린 연주자의 분주한 손놀림이 보이는 듯하고, 중앙 위쪽에 위치한 금관 악기 소리 특유의 뻗어가는 듯한 에너지가 각인되듯이 귀에 들어온다. 무대 저 뒤편에서 바닥을 설설설 기는 듯이 낮게 깔려오는 베이스는 공기의 간질거림으로 전달된다. 콘트라베이스의 잔향이 묵직한 여운의 꼬리를 남기며 공간 속으로 사라져간다. 여리고 유약한 부분이 전혀 없다.

확실히 이 녀석은 첫 월급을 탔을 때 샀던 골드스타 컴포넌트하고의 확연한 차이를 주며, 실로 접신의 황홀경을 주었다. 나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것, 그것은 원래는 저 선율 속에 살았는데.... 이 밖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닌 거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한번 수준이 높아진 귀는 점점 고급으로만 치닫는다 하니, 귀가 둔감한 척 애써 점잔을 빼며, 더 좋은 오디오에 대한 갈망을 감추고 살아야 할까 보다. 비용이 많이 드니까.

그가 언급한 명기들 골드문트나 마크 레빈슨 따위의 하드엔드 기기들 잘 모른다. 따라서 윤광준이 선정한 10대 명기 이야기인 3부 ‘하이엔드 오디오의 세계’는 사실 오디오 사진만 감상하면서, 눈이 호강하는 데만 그쳤다.
2부 ‘오디오 더 깊이 사랑하기’는 앰프, 스피커, 플레이어 등 각 파트별로 구체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항목이다. 사실 이 책과 같은 전문 서적은 아는 사람에게는 물고기 물 만난 듯 반갑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렵게만 느껴지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이 장을 읽다보면 윤광준이 오디오를 잘 모르는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은 친절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았던 부분은 맨 앞 1부 ‘추억과 열정의 오디오 편력기’ 편이다. 여기서는 그 기기를 만든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고뇌가 얽혀 있는 오디오 이면의 고군분투하는 숱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의 열정과 도전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뭔가에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이 책에는 인간에게 유보시킬 행복은 없다는 말이 나온다. 머뭇거리고 망설이다보면 결국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사람의 삶이 때문이다. 꼭 오디오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빠져 있는 만큼 생은 행복할 것이다.

 

오디오에 조예나 관심은 전무하지만 음악은 진지하게 듣고 싶은 이들이나, 인간의 다양성 만큼이나 다양한 오디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신 분들, 그리고 자신을 소멸하고 몰두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소리에 미쳐 있는 사람의 정신 세계를 엿보고 싶으신 분들이 이 책을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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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메모....

 

“글렌 굴드의 명연주로 널리 사랑받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엔 굴드 특유의 흥얼거림이 녹음되어 있다. 피아노 연주 도중 간간이 튀어나오는 그의 음성은 연주의 감흥을 높여 준다. 이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아노의 음이 아니라 굴드의 목소리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곡은 스피커를 바꾸었을 때 굴드의 목소리는 더욱 분명하고 끊어짐이 없이 들린다고. 오디오의 기기가 음의 디테일와 뉘앙스를 더해 준다는 것이리라.” 

 
“영국제 스피커들은 보기와는 아주 다른 유려하고 매끈한 음을 들려 준다. 고유한 울림이 잘 반영되어 있다.”

 

아 이 책에서는 저자 윤광준의 친구로 김갑수 시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라디오 디제이이자, 시인인 김갑수도 한 오디오파일이라 한다. 얼마나 돈을 아끼고 아껴서 오디오와 음악에 투자했는지 화장지를 살 돈이 없어서 화장실에서 일을 본 후에는 샤워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째, 물값이 더 들겠다 싶은 거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러갈 시간이 없어서 아녔을까 싶은데..ㅋ 아무튼 그만큼 남 눈치 안 보고 좋아하는 것에 미쳐 있었다는 뜻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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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6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3-16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들린 친구의 방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LD 판과 한쪽 구석에 자리한 턴 테이블이 생각나네요. 얼마나 부럽던지요. 저는 첫 월급을 타서 산 것이 삐삐와 소니 휴대용 카세트였답니다. 미니컴포넌트와 카세트...음악적 수준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네요.^^

하루살이 2005-03-1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저는 도대체 음감이 빵점이라. 노래방도 제일 가기 싫어하는 곳.
그런데 소리의 색감을 이해한다는 건. ^^;
저도 콤포넌트를 구입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오직 DVD와의 연결을 위한 값싼 선택. 그래도 인켈이면 됐지 하면서 자족하고선 아직도 그 작은 보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욕심도 알아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알면서도 초탈하면 크게 해탈?

내가없는 이 안 2005-03-17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첫번째 오디오가 롯데였어요. 대학 입학 선물이어서 부모님 취향이긴 했는데 아주아주 오랫동안 친구로 잘 지냈죠. 그런데 혹시 그런 거 아세요? 사실 아는 거 쥐뿔도 없는데 남들이 조금 기대해줄 때 느끼는 당혹감. 피아노 쬐금 칠 줄 알고 음악을 쬐금 듣는다 해서 회사 동료가 어느날 갑자기 오디오 사러가는 데 도와달라는 통에 나서긴 했는데, 그 친구가 바라는 저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난감했던 경험. 미안도 하고 진땀도 나고. ^^ 복순이언니님은 참 독서폭도 넓어요. 감탄. 감탄. ^^

hanicare 2005-03-1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에게 이문세5집을 선물했던 기억이 나는군요.느릿느릿 넘실거리며 돌아가던 턴테이블과 몇 번을 거듭 들어도 줄어들지 않던 한가한 오후도.지금 우리집 인켈은 턴테이블도 없고, 있다해도 바늘을 갈아줄 사람도 없습니다...

icaru 2005-03-1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 냄새 님~ 고등학교 적 님의 친구분... 대단하네요~ 열몇살에... 엘피 음반에 그토록 깊은 열정을 갖고 있기란... 혹시...부모님 꺼 아니었을까요?? 전 지인들네집 가면...음반을 주욱 뒤지고 다녔었요... 어떤 친구들을 자기가 가진 음반을 자랑할 기회가 생겨... 이것 저것 보여 주면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들을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 보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요.... 첫 월급으로 사람들은 참...많은 의미를 주는 것들을 삽니다~ 님은 휴대용 워크맨을... 저는 그 당시 뭘 또 샀나 더듬어보니... 엄마아빠 잠옷도 샀었네요... 재미난 건...집에 가보니까요... 엄마 입으시라고 고른 베이지 색 잠옷을 주로 아빠가 입고 계시고...아빠 입으시라고 산 네이비블루 색 잠옷은 장롱 속에 고이!~ 잠자고 있더군요.... 제가 부모님 취향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건가봐요...


하루살이 님.. “오직 DVD와의 연결을 위한 값싼 선택!!” 탁월하심다 ~ ! 그래도 작은 보물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단순히 값싼 선택이 아녔던 게야요~

이안 님~ 님도 롯데!! 저도요... 그런데 부모님 정말 쿨~ 하세요... 입학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오디오를 선물해 주시는 부모님... 님이 갖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계셨던 가봐요...!
저도.. 아는 거 하나 없는데... 오디오 어떤 게 좋겠냐고 골라달라는 친구 따라 매장엘 간 적이 있었어요...몇년 얼추 10년이 다 되어 가네요.. 제가 뭘 알아야죠... 친구가 뽑은 예산에 가장 걸맞는 걸 골라줬죠... 고른 이유는 디자인이 튀어서였어요... 밝은 야광색이 도는 청록색...아...그것도 롯데였는데..히히..

하니케어 님... 무척 시적인 표현입니다. “몇 번을 거듭 들어도 줄어들지 않던 한가한 오후도” ...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체감 오후는 짧아져만 가네요.... 지금은 퇴근을 기다리는 조바심 나는 오후입니다~

2005-03-19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3-1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님..저도 이 시간에 잠안자고 이러고 있어요...앗...지금 넘어갑니다~

2005-03-31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4-0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하하...님도 효녀시구낭.. 와아...전국 대학생 음악경연대회 요? 와...언제 그 에피소드 꼭 듣고파요...님 ^^